백성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대왕과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지멋대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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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태종때부터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은 신문고라는 북을 직접 쳐서 임금에게 알려 해결하는 제법 민주적인 제도였다.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절차는 먼지 고을의 관청에 신청한 후 수령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다음 관찰사의 허가를 받고 마지막으로 사헌부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만약 이를 어길시에는 엄벌에 처하기 때문에 신문고 앞에는 이를 알리는 절차를 게시하였고 어길시 곤장 백대를 치겠다는 벌칙 조항과 또 한가지 만일 무고한 사람을 해 하려고 신문고를 울릴 경우 엄벌에 처한다는 문구도 있었다고 한다.
관청이나 관찰사는 지방에 있다하더라도 사헌부는 서울에 있었으니 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 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신문고를 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관청의 수령이나 관찰사가 자기 지역 백성이 신문고를 치게 되면  본인에게 닥칠 불이익을 생각하여 신청을 허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러한 제도를 두려워한 것은 왕의 귄위가 하늘같았던 때도 국민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한 것으로 보아 현대의 대통령들보단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왕들 중에 대왕이라는 칭호를 듣는 이가 두 분이 있다.
한분은 모두가 잘 아는 세종대왕이고, 다른 한분은 선뜻  생각나지 않겠지만 정조대왕이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큰 업적이 있지만 정조는 왜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을까?
물론 정조는 탕평책이나  규장각이나 수원성을 만들기도 한 업적이 있지만 영조나 다른 왕들도 훌륭한 업적이 있어 그것만으로 대왕이 된 것은 아니다.
정조는 수원성에 자주 행차를 하였다. 당시 왕들은 암살등 위험에 노출되기를 극히 꺼려하여 자신의 동선을 절대 주변에게 알려주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다른 왕들과는 달리 정조는 행사계획을 미리 알려 주었다. 백성들도 정조가 언제 어디를 가는지 알수 있었다. 때문에 정조가 수원에 가는 행차중에는 이를 보기 위해  많은 백성들이 몰렸고 특이한점은 요란하게 꽹과리치는(객정: 인조가 시행한 요란한 꽹과리로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제도) 한 무리들이 있었다. 정조는 그 소리를 들으면 행차를  멈추고 그사람들을 불러 왜 꽹과리를 치는지 사유를 들었다. 꽹과리로 백성이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이를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자리에서 해결을 했다고 한다. 탐관오리가 있다면 당장 붙잡아 들였다. 이러한 왕을 백성들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왕이 백성과 직접 소통했던 정조야 말로 학문적으로나 업적으로나  백성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니 대왕의 자리로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국민들보다  시민의식이 강화 되고 수준높은 지금의 국민들과 소통하지 않는 대통령은 결코 역사에서 명예로운 이름으로  남지 못 할 것이다.


이 원영스토리텔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