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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

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배움은 평생교육이라 했다.

2006년 지역사회에서 <내 고장 알기>로 시작했던 문화체험활동에 이어

올해 꽃피는 춘삼월에 새맘 새 뜻으로 알차게 준비한 카툰캠퍼스 <만저봐>만의 성북동 프로젝트, 이들이 야심차게 서울 한복판을 누비고 다녔다.

 

어슬렁어슬렁~ 성북동 문화체험

언뜻 생각하면 한가로워 보이고, 여유롭게 다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과연 그럴까.

 

서울 한복판 광화문에 모여 있으니 주변의 온통 건물과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걸 보니 대환영인가 보다. 출발하기 전, 이원영 이사님, 일명 이이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광화문 명성황후 조난지 신무문 팔판정육점 말바위안내소

삼청공원 등산길 북정마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이태준생가 길상사

여러분~ 오늘 코스는 앱에 올려놨으니 설명을 참고하여 보시면 됩니데이 ~

 

“건너편에 저기 보이시져. 청계천 길이거덩여. 그리고 여기 쭈욱 내려가믄 남대문 나오는 것 아시고, 서울역, 한강대교 나오는 거 아시고 , 자 이 건물 있잖아여. 이거 여기가 몇 번지게~여. 종로구 1번지, 여기가 종로구에 생긴 첫 건물이라 해서 종로구 1번집니다. 여기가 나중에 도로가 개편되면서 도로주소로 바뀌었지만 여기는 끝까지 종로구 1번지예요. 교보에서 이것만큼은 지켜야겠다고 하는데 교보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시고 자 이동 하겠습니데이.”

가는 도중에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기자회견 하는 모습과

법인권사회연구소 주관으로 걸린 현수막 <평화의 소녀상> 플래카드도 보인다.

“저 위는 광화문을 찍을 때 가장 좋은 장소로 개방하지 않습니데이. 예전에는 불허했지만 지금은 허가되어 사진촬영도 가능하다고 합니데이. 그리고 이 도로 주변은 예전에는 온갖 관공서로 되어 있었어여. 지금은 대로 안에 언론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여.”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경상도 언어라서 설명을 다는 귀담지 못해 아쉽다.

 

광화문에 다다르니 한복 입은 모습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잠시 멈췄다.

선왕조 도읍이었던 서울은 한나라의 수도로 4개의 산, 4대문과 4소성으로 이루고 있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 등이 있고, 서울의 진산은 북한산이다. 서울의 산 성곽은 군사목적이 아니고 동네 담벼락 같고, 군사적 요소로는 북한산과 남한산이며, 삼각산은 북한산 자체가 삼각산이다. 그리고 인왕산코스는 혜화동까지는 성곽 길로 되어 있고, 서울 성곽길 중에 청와대 뒷편은 3시 이전에 가야 출입이 가능하며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조선을 설립한 이성계는 도읍지 한양에 4개의 대문을 세우고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고 도읍의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을 세워 도읍의 기본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4개의 소문은 북문과 동문 사이에 혜화문, 동문과 남문 사이에 광희문, 남문과 서문 사이에 소의문, 서문과 북문 사이에 창의문을 두었다.

 

경복궁에 들어서며 나무가 별로 없는 이유를 묻는다.

자객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며, 지붕에 뭣이 놓여있느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우리나라 궁에는 문이 2개, 중국은 3개로 차이점은 폐하와 황제로, 중국은 벽돌인 반면 우리나라는 돌과 화강암이 다르다고 했다. 인왕산 북한산도 돌덩이가 많고 성북동, 혜화동도 1970년대에는 주로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경복궁!!!

조선시대 건물로 사적 제 117호인 경복궁은 종로구 1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임금이 살던 궁과 나라의 대신들이 일을 의논하던 건물로 태조 4(1395)에 종묘 사직단과 함께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에 불타 273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이 7년여의 무리한 공사 끝에 다시 지어졌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다는 구실로 근정전 남쪽 전각들이 수난을 겪거나 철거당해 10여 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궐이라고도 불리었다.

 

또 별궁으로, 와룡동에 위치한 창덕궁(155)은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5(1405)에 지어졌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자 3백여 년 간 조선왕실의 궁궐로 쓰이면서 또 다른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국보인 인정전과 보물인 돈화문, 선정전, 대조전 등이 있고 천연기념물인 700년된 향나무와 600년 된 다래나무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궁으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드디어 아픔의 역사가 남아 있는 건청궁에 들어섰다.

조선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일본세력을 배척하자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이 되어 고종 32년(1895) 10월 8일(음력 8월20일)에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사건으로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곤녕합으로 명성황후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침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잠시 아픔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신무문(神武門)!!! 청와대가 바로 보인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출입하는 문으로 정문격인 광화문이 있다면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이 있다. 현재는 광화문과 신무문을 통해서 경복궁을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신무문은 청와대 정문과 연결되는 문으로 최근에는 개방되고 있다. 공터가 많은 이유를 묻자 이전에는 수도방위사령부, 일명 수방사로 지금은 과천 남태령 고개로 이전했고 참고로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수년전 동생이 수방사에서 군복무를 해서인지 느낌이 달랐다)

(청와대 정문을 뒤로하고 삼청공원 등산길로 이동하며 해설은 다시 시작된다).

횡단보도는 아무나 못 건너가며 직원들만 다니는 곳

고종과 김구가 연결된 백범일지를 읽어보라며 역사가 얽혀 있다고 했다.

 

 

 

삼청공원 등산길로 올라서니 이제 부터는 체력의 안배가 필요했다. 극기!! 그동안 나를 이기지 못해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 극기로 그동안의 어려움을 이겨낼 필요가 있었다.

<삼청공원 등산길-북정마을 사진>

이 코스와 곁들어서 알아야 할 것은

청계천과 혜화동인데 청계천은 광화문에서 우측으로 쭈욱 넘어가면 혜화동이 나오며 경복궁, 창경궁까지 나온다. 혜화동 로타리와 한성대교까지 나오고 한성대 입구부터 성북동이다. 성북동편에서 330번지 교보단지로 문화대기업이 모두 있다고 한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지역이기도 하다.

북정마을을 거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에 머물렀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오셔요 중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 -심우장에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잔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남향하면 바로 돌집*을 바라보는 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다.“ -돌집: 조선총독부

“철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 -벽초 홍명희-”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

“나는 돌에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

각 민족의 독립 자결은 자존성(自存性)의 본능이요, 세계의 대세이며, 하늘이 찬동하는 바로서 전 인류의 앞날에 올 행복의 근원이다.

누가 이를 억제하고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중

 

학창시절 꼭 외워야 했던 <님의 침묵>중의 한 구절은 생활 속에서도 읇조리던 한마디이기도 했다.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었던 월북작가 이태준의 생가를 찾았다. 상허 이태준이(1933년~ 1946년)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하고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 피는 정원』,『황진이』 『왕자 호동』 등 주옥같은 작품을 저술하였기에, 이곳을 이태준 문학의 산실이라 부른다.

잠시 고택을 둘러본 후 다음 행선지 길상사로 향해 출발했다.

 

이곳을 찾아 가는데 아슬아슬한 옛날 골목들이 많아 마치 미로 찾는 느낌이고, 한참을 지나서야 끄트머리에 길상사가 있었다.

북악산각, 대원각. 삼청각, 청원각은 요정으로 이중에 대원각이 길상사라고 한다.

1997년 길상사를 창건한 이곳은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법정스님 유골을 모신 진영각이 있고,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김영한 여사가 보리심을 발하여 성북동의 대원각을 조건 없이 기증하였다고 한다.

공덕주 길상화 보살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7천여 평의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청하였고, 1997년 대원각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창건되는 아름다운 법석에서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 라는 불명을 받았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저서와 역서: <무소유>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화엄경> <숫타니파타) 등 다수

 

 

길상사를 끝으로 둘러본 뒤 터널을 통해 원 위치에 도착한 만저봐 일행은

19254걸음 걷기+달리기 거리 11.9키로미더를 걸었다는 만보기를 보여주는 카툰캠퍼스 조희윤 대표의 한마디에 모두가 힘은 들었지만 알찬 첫 문화탐방을 자축하며 다음 성공을 위해 파이팅을 외쳤다.

고구마작가님,  만저봐와 함께한 생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신 용택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격세지감(隔世之感) 소격동 여세부침(與世浮沈) 삼청동

지난 3월 7일 만저봐 어슬렁 성북동 근현대사 투어를 다녀왔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가를 관통하여 성북동과 그 인근을 구석 구석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보는 반나절 기행.

어슬렁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은 투어를 마치고 내려와서 만나게되는 소격동과 삼청동이었다.

그런데, 이 어슬렁 투어의 초입에 만날 수 있는 팔판동이 소격동 삼청동 사이에 있다. 팔판동의 이름은 여덟 판서가 살았던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경복궁 옆 위치값 제대로 하는 이름이겠다.

팔판동의 수많은 가게 가운데 어슬렁 투어가 꼭 짚은 곳은 바로 팔판정육점이다.

그곳 주인을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씨가 ‘전설적인 정육 명장 이경수 선생’이라고 칭송했단다.

무려 3대가 76년째 영업중이고 우래옥과 하동관에 들어가는 고기를 70여 년째 대고 있는 곳이다.

예전에 우래옥 냉면과 하동관 곰탕을 자주 먹었지만 명장의 손길이 닿은 고기를 먹었을 줄이야..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 오래된 추억의 맛에 또다른 감동이 스민다.

인기 많은 상점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줄 서서 기다린다는 곳이니 육식파들은 한번 쯤 들려볼만 하다.

 

네이버 지도 캡처. 빨간색 테두리로 쌓인 지역이 위부터 삼청동, 팔판동, 소격동이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맞닿은 삼청동은 경계가 삼엄하던 군사정부 시절을 뒤로하고 서울시내에서 힙하면서 화려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이제는 북촌의 한 부분으로 맛집과 소규모 갤러리, 카페가 즐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동네다. 삼청동은 북촌이 그러하듯 고즈넉한 한옥들이 아직도 원형을 유지한 채 사람들을 맞이한다. 도시재생이던, 전통 보존이던 어떠한 명목이나 이름으로라도 이 아름다운 동네가 후세에도 그대로 유지되길 바란다.

한편, 네이버 검색으로 찾아본 소격서는 다음과 같다.

“고려 때부터 소격전(殿)이라 하여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는데, 1466년(세조 12) 관제개편 때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그 후 도교를 배척하는 유신()들의 조직적인 운동과 조광조()의 끈질긴 폐지 주장에 따라 1518년(중종 13)에 폐지되었고, 이때 제복()·제기()·신위()까지 땅에 파묻었다. 1525년(중종 20)에 복설()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뒤 다시 폐지되었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소격서[昭格署]: 관직명사전, 2011.1.7.,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렇듯,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중기까지 국가의 제사를 지냈고, 조선왕조 종친부가 들어서 있던 소격동은 삼청동과 함께 한양 도성의 심장부였고 근대를 지나 현대사에 들어서도 그 위치를 놓치지 않고 있다. 비록 성격은  많이 달라졌지만.

소격동은 청와대를 위에 두고 국군기무사령관이 오랜 기간 자리한 까닭에 위치와 어울리지 않게 개발이 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경복궁 바로 옆 옛 북촌의 한 자락이지만 많이 알려지지도 접근성이 높은 동네도 아니었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더더욱이나 소격동의 현대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2014년 서태지가 아이유와 콜라보로 발표한 ‘소격동’의 뮤직 비디오는 분명히 존재했으나 지금은 잊혀져가는 그 시절 ‘소격동 시대’를 배경으로 담고 있다.

서태지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서 소격동의 곡 배경을 묻는 손석희 앵커에게 “예쁜 동네의 무서웠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곳은 아름다왔지만 80년대의 무서웠던 동네 분위기를 빼고는 노래의 배경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린 서태지가 뛰어놀던 그 곳에서 서슬퍼렇던 보안사령관은 녹화사업을 빙자해 명단을 작성했다. 그 명단을 통해 강제 징집이 이뤄졌던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이제는 젊은이와 관광객이 몰려드는 상업 지역이 되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예쁘고 공포스러웠던 묘한 추억이 서린 복잡한 동네인 것이다.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에게 지금의 소격동은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요 여세부침이다.

어슬렁 투어의 마무리는 소격동의 한 수제맥주집이었다. 이연실의 노래 가사처럼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던 목로주점의 세월은 갔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을 안주 삼아 가까운 이들과 맛있는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 곳.

바로 삼청동과 소격동으로 성북동 어슬렁 투어의 마지막을 함께 해 보길 권한다

후니격세지감(隔世之感) 소격동 여세부침(與世浮沈) 삼청동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심장이 뛰다

성북동을 가기위해 광화문에서 만났다.

광화문!!

광화문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맞다 촛불이다.

지난 겨울 그 추위를 다 녹이고도 남을만한

국민의 촛불, 그 속에 나도 있었다.

아무일도 안 일어나도 좋을 만큼 웃으며 그 속에 있는 자체가

의미였던 지난 겨울처럼.

구르는 낙엽만 보아도 웃고울던 중학시절

내 손에는 항상 한용운의 시집이 있었다.

그 시집의 제목은 님의 침묵.

첫 장을 넘기면 나오는 시

님의 침묵.

그의 시를 외워서

학교뒷산 가득한 아카시아 내음새 속에서 누워

친구와 속삭이던 읋었던 지나간 세월 속 오월의 향내가

이번 만저봐 어슬렁 성북동 투어 속에

다시 났다.

그래서, 투어라지만

존경하고 따르던 만해 한용운 시인의 거처,

심우장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들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 더 머물러 있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 용 운 –

성북동 투어 덕분에 다시 만난 만해 한용운.

이번 기회에 그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만해 한용운

그는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 용운은 법명, 만해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14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고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홍성읍 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 동학 농민 운동에 함께하다가 실패 후 설악산 오세암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고향 홍성군으로 되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때문에 의병을 탄압하는 일본 임시직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고, 당시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여,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또한,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반을 복역하였다. 한편 그는 자수하기 직전의 민족대표자들 중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었다 한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다.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다시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선임되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인위적으로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이어 만해는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연설이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오랜만이오. 만해.”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신이 누구요?”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하자 만해는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남선이 전향을 선언하던 날 한용운은 그의 제사상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

그의 사상과 신념은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경의 사상을 인용하여 이를 현대적 자유사상에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만인의 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

심우장

만해 한용운은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북동 북쪽에는 산이 있어 대부분의 집은 남향인데 비해, 심우장만은 북향이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총독부가 있는 남쪽과 마주치기 싫어 북쪽을 향해 집을 지었던 것이다.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한용운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심우장의 이름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소박한 명상이 가능하다. 마당에는 성북구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나무로 소나무와 한용운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으며 한켠에 올래여행(역사문화여행) 스탬프가 있는 우체통이 있다. 만해 한용운은 이 곳 심우장에서 끝내 조죽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한 메모

주차공간은 별도 없으며,

관람시간은 09:00 ~ 18:00까지이며

관람시간내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마음껏 사진도 찍고 앉아 있을 수 있다.

주변 가볼 만한 곳으로는

성곽과 마을이 아름다운 북정마을과 북정미술관 등이 있다.

오드리 기자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심장이 뛰다

성북동에서 이태준을 만나다

‘만저봐’ 어슬렁팀과 성북동 투어에 나섰다. 광화문에 모여 경복궁을 지나 청와대 앞길로 사부작사부작 걷기 시작했다.

삼청공원과 말바위 전망대를 2시간쯤 오르내리다 드디어 성북동 비둘기 공원에 도착했다. 김광섭 시인의 시‘성북동 비둘기’의 배경지 ‘북정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월이 잠자고 있는 듯, 5,60년대의 집들과 골목이 그대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 골목골목을 누비다 문인들이 살았던 집들을 기웃거린다. 한용운 시인의 ‘심우장’을 둘러보고 소설가 이태준이 살았던 ‘수연산방’에 도착했다. ‘산속의 작은집’이라는 이름답게 아담하고 정갈스럽다. 집 앞에는 상허 이태준 가옥이라는 푯말이 있다. 그 시절 성북동에는 많은 문인들이 살았단다. 이산 김광섭, 구보 박태원,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집터가 고만고만 모여 있다. 달동네였던 이곳이 가난한 문인들이 살기엔 좋은 동네였나 보다.

그중에서도 이태준에 끌린 것은 글 모임을 지도해 주시는 부천대 민충환 교수님의 열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월북 작가 이태준이 해금되자마자 선생님은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출생지인 철원과 살았던 집 성북동과 그가 다녔던 휘문고를 수도 없이 답사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이태준 연구>라는 책을 쓰셨다. 오랜 시간 금기였던 그의 이름과 작품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과정을 지켜보았기에 ‘수연산방’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수연산방’을 둘러본다.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이태준이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을 1999년부터 그의 증손녀가 찻집으로 개방해 운영하고 있었다. 원형을 그대로 살려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한옥의 멋을 간직하고 있다. 마당의 작은 정원에는 그가 애지중지 키웠다는 파초의 흔적도 보인다. 집 한쪽 벽에 사진 한 장이 눈에 띈다. 가족사진이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이태준과 그의 아내,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기를 안고 있는 상허와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단란하고 행복했을 가족의 일상이 그려진다.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보통학교 교관과 주사를 지낸 지식층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한말 나라를 개혁하려고 개화당에 가담했던 아버지는 개혁에 실패하자 가족을 이끌고 블라디보스크로 간다. 이태준이 다섯 살쯤 아버지가 화병으로 죽고 얼마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그는 누이 둘과 함께 고향 철원의 친척집에 맡겨진다. 하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친척 어른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가출을 한다. 철원 봉명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배재학당에 합격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다니지 못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1921년 휘문고에 입학한다. 가난했던 그는 교내 청소를 하며 학비를 면제받기도 하고 책장사를 하며 수업료를 벌기도 하며 힘들게 학업을 이어갔다. 학예지 <휘문>의 학예부장을 맡고 기행문과 감상문 등의 작품을 실어 문학적 소양을 발휘하지만 1924년 동맹휴교 주모자로 몰려 퇴학당한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조선문단>에 소설 <오몽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1927년 일본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하지만 그 이듬해 자퇴하고 만다.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어보았지만 가난한 고학생에게 대학생활은 궁핍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후 <개벽사>에 들어가 <학생>과 <신생>의 편집을 맡게 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된 그는 1930년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의 아내 이순옥을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수연산방에 걸려있는 상허 이태준의 가족사진

1934년 성북동 248번지에 집을 짓고 작품 활동에 몰두한다. 마당의 정원과 돌담에 놓인 돌멩이 하나에도 그의 정성이 안 들어간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황진이」 「달밤」 「코스모스 피는 정원」 「돌다리」 「왕자호동」 등을 집필했다. 그의 삶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리라. 그러나 1948년 그렇게 정성스레 지은 집을 버리고 돌연 가족과 함께 월북하고 만다.

그 후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월북 초기에는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며 극진한 대접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남한에서의 ‘구인회’ 활동과 일제 말 친일작품을 쓴 이력으로 사상검증을 받고 결국 숙청당했다고 한다. 본인은 물론 그의 자식들까지 연좌제로 묶여 숙청당하거나 추방당했다.

이상, 박태원, 정지용 등과 함께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구인회’에 들어가고 <문장>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우리 문학사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긴 상허 이태준.

아름답고 수려한 문장으로 시인 정지용과 쌍벽을 이루었던 천재 문장가는 결국 사망 시기도 밝혀지지 않은 채 소리 소문 없이 가족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교과서처럼 읽었던 이태준의 ‘문장 강화’와 해방 기념 조선 문학상을 받은 단편집 「해방 전후」를 읽으며 그의 문학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이 소설에는 그의 등단작 「오목녀」를 비롯해 좌파 이념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 8.15 전후의 일들을 ‘한 작가의 수기’로 풀어낸 「해방 전후」와 「고향」 「달밤」 「복덕방」 「까마귀」 「밤길」 「돌다리」 등 빼어난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비운의 작가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수연산방’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그를 만난 듯 반갑다. 언제 한가로운 시간에 작가들의 사랑방이었을 툇마루와 사랑채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차를 마시고 싶다.

 

 

 

한 성희성북동에서 이태준을 만나다

어슬렁성북동 관찰기

 

박 현숙어슬렁성북동 관찰기

법정스님 무소유 의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듯이 길상사를 찾았다

무방비 상태의 내게 다가온 법정스님의 모습은

티끌보다 작은 나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무엇이든 채우기만 하였던 내가 부끄럽다

손수만든 나무의자와 고무신 한켤레는 무한한 우주보다 커보였다

이제부터라도 비움의 미덕을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두를 하나둘 비워 나가자

 

장 대식법정스님 무소유 의자

성북동 북정마을엔 그 누가 살까요?

이곳은 600년의 조선 역사가 가득 담겨있는 문화유산인 서울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성북동’이라고 불린다.

조선 왕조 초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성곽에 돌과 흙으로 쌓은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동), 돈의문 (서), 숭례문(남), 그리고 숙정문 (북)이 바로 그것이고 4소문은 흥화문 (동북), 광희문 (동남), 창의문 (서북), 그리고 소덕문 (서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 때는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과 방어 시설을 늘리는 대대적인 공사를 단행하였다고 한다. 숙종에 이르러서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으로 되게 쌓았다.

광화문을 시작으로 청와대를 지나서 계속 올라가는 길에는 사람들을 내려놓고 어슬렁거리며 출발하는 급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을버스, 심우장에서 10여분 걸어 올라가면 위치한 탁 트인 정상, 계단을 올라가면 아래 동네가 훤히 보일듯한 누군가의 담벼락.. 여기는 북정마을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동네이자,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성북동 북정마을은 젊음의 거리와 대학로에서 불과 20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옆으로 성곽을 끼고 있어 성벽 근처를 중심으로 생겨난 달동네의 모습은 흡사 큰 타원형을 띄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에 진행된 도시화는 이윽고 급격한 인구증가와 주택부족 문제로 이어졌고 그 결과 사람들은 성곽에 기대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북정마을은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거친 땅을 깎고 다듬어 저마다 집을 짓고 골목에 모여 이웃이 된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고 난 후에 배고픈 문학인과 예술가들이 점점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집값이 싼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곽코스를 거닐며, 성문이라는 조그만 구멍 같은 성곽의 문을 통해 바라 본 북정마을은 방금 찾아온 설레고 아름다운 봄만큼이나 평화로웠다. 과연 저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던 북정마을 주민들은 재개발이란 희망마저 사라지게 되자 속속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주인이 떠난 빈집에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없자 빈집들이 하나 둘 늘었다고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대부분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실정이며,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들 대부분은 재개발을 염두한 외부인들 소유들이라고 한다. 대문에는 몇 개월 전, 심지어 아주 오래전에 도착한 우편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집들도 있었다.

서울 시내에 이런 마을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예스럽고 정감이 가는 동네!

서울성곽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주고 있어서 사람들이 살기에 최적의 동네가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옛 것의 정감과 날 것의 그대로가 공존하고 있는 그 공간이 좋았다. 담장 너머 빨랫줄에 걸려있는 속옷과 겉옷, 깨끗이 다듬어진 텃밭, 밭을 일구고 있는 할머니, 지붕 위에서 봄의 햇살을 등에 지고 마냥 사랑스럽고 행복하게 누워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늘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성곽길을 따라 거닐며 그날만큼은 한 발짝 살짝 늦추고 여유롭게 걸었다. 빠른 발걸음도, 큰 소리로 내뱉는 말들도, 나도 너도 모르게 ‘쉬이’하며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이내 새로 지은 예쁜 집들이며 형형색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서도 마당과 텃밭이 딸려 있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그 풍경은 서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왠지 평화롭고 사랑이 넘칠 것 같은 꼭 살고만 싶은 그 집은 옛날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의 집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재에 나는 북정마을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성북동은, 조용한 곳을 찾아온 예술가들이 가득하다. 조용한 골목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갤러리와 작업실 개념의 공방을 겸한 상점들은 상업적인 거리와는 다른 분위기를 뿜어낸다. 둘이서 걷기에도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세상에서 가장 작을 것 같은 눈에 띄는 예쁜 공방과 가게도 많았다.

예스러운 골목마다 즐비한 맛집 또한 일품이다. 상점과 음식점들은 작품에 애정을 가진 예술가들처럼 자부심을 갖고 일을 하며 관광객을 대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정겨운 마을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따뜻하고 친근함이 묻어 있었다.

광화문을 시작으로 선무문, 말바위, 북정마을, 심우장, 수연산방, 그리고 길상사까지 이어지는 성곽코스를 거닐며 성 밖에서 조망한 조선의 시대별 한양도성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빈 집들이 늘면서 개발 필요성이 점차 줄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도시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옛 것이 사라지지 않고 시민이며 많은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북정마을을 내려왔다.

정 정숙성북동 북정마을엔 그 누가 살까요?

[어슬렁성북동]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명성황후 조난지와 쿠시다신사

어슬렁 성북동팀
광화문을 따라 경내로 들어간다.

 광화문(남쪽 출입구)로  쭉 따라들어가면
신무문(북쪽 출입구) 못가서
명성황후의 거처였던 건청궁이 나온다.

 

 ▲건청궁으로 이동하는 길

 

건청궁은 명성황후의 거처였던 동시에 명성황후 조난지, 즉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를 당한곳이다.

따라 들어가다 건청궁을 만났다.

▲어슬렁성북동팀, 이원영 카툰캠퍼스 이사님 해설을 귀담아 듣는중

어느 외국인 커플은 건청궁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루에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느라 바쁘다.

건청궁은 바로 산 아래에 있어 그런지 조용하고 스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바로 이 산이 녹산이다. 녹산에서 명성황후의 주검이 불태워졌다.

 

▲어슬렁성북동팀, 이원영 카툰캠퍼스 이사님 해설을 귀담아 듣는중

 

잘 복원되어있는 낮은 한옥 지붕과 돌담을 본다.
고즈넉한 한옥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이 한옥의 주인이였던 명성황후의 최후는 처참했다.

 

  ▲명성황후의 초상화로 알려진 사진

을미사변(1895) 당시
민비는 시해된지 2년 2개월만에 제대로된 장례식을 치를수 있었다.
남편 고종은 빠르게 변하는 정치상황 속에 있었으며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때처럼 안전한 곳에 대피해 있을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고 그제서야 아내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외세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외세를 이용하는(夷 이이제이,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다스림. 한 나라를 이용해 다른 나라를 제압한다는 의미) 근대화와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힘썼던 국모의 죽음에 국민들은 분노하였고 을미의병이 촉발되었다.

 

건청궁에 다녀오고 나서야 자료를 한참 찾아보고 나서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지난 구정, 여행서에 나온 후쿠오카 근교 신사 쿠시다신사 라는 곳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쿠시다신사의 모습(사진출처 http://www.logospringch.org/gallery/50057)

 

어느 가이드북에나 소개되는 이 쿠시다신사는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도(히젠도)가 보관된 곳이다.

히젠도는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아, 나 또한 히젠도를 직접 볼수는 없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 사용된 칼, 히젠도

 

히젠도의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 라고 써있는데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는 뜻이다.

 

일본정부의 불법적인 사변의 산물이 자랑처럼 여겨지며 신줏단지처럼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후쿠오카 시내 한복판의 신사에 버젓이 보관되고 있다는 것이 치욕적이고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0년 혜문스님은 구시다신사에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는 일본의 조선 강점 100년, 안중근 사망 100년을 맞아 귀 신사가 히젠도를 좀 더 바람직한 방법으로 처분해 주시길 제의합니다.
이 물건은 더 이상 일본에 남아서 양국 국민의 감정을 악화시키고, 우호적 한일 관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귀 신사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한일 관계가 한 단계 진전되는 전기가 마련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혜문 스님이 쿠시다 신사에 보낸 편지

이 편지를 시작으로 히젠도 환수운동이 펼쳐졌고 올해 2월, 국회에서 쿠시다신사 소장의 ‘히젠도’ 처분 촉구 결의안이 발의되었다.

여행지로서 찾아간 일본의 신사보다 건청궁에 먼저 왔어야 했다는 부끄러움과 후회가 든다.

내가 느낀바를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를 품고있는 건청궁과 쿠시다신사에 가게 되더라도 그 역사에 대해 국민으로서 당연한 분노를 느끼고 이 사실을 알리고 적어도 외면하지 말자고.

글을 마치며
나와 독자에게 질문해본다.
다음해(2019)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100년전과 지금,
우리나라는 완전한 자주독립국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서보영[어슬렁성북동]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명성황후 조난지와 쿠시다신사

만저봐 어슬렁 성북동 시즌1

성북동(城北洞)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속한 행정동 및 법정동이며, 1968년 11월 《월간 문학》에 실린 김광섭의 서정시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동입니다.

혜화문과 숙정문 사이의 한양도성이 부채꼴 모양으로 감싼 성북동은 조선시대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의 북둔(北屯)이 1765년 영조 41년에 설치된 연유로 동명이 붙여졌고. 동성 4소문의 하나인 혜화문을 나서서 왼쪽 일대의 계곡마을인 성북동은 예부터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석이 어울린 산자수명한 마을로 복숭아, 앵두나무가 많아서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곳입니다.

3월7일. 수요일 오전.
만저봐 기자단의 새해 첫 어슬렁 골목길 프로젝트는 바로 이 성북동에서 시작합니다.
아래 삽입된 구글맵의 주요 포인트들을 클릭하시면 만저봐 기자단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찾아보실 수 있을 예정입니다.

그럼..내일 아침 10시.
바로 이 페이지에 채널 고정!!!

이 원영만저봐 어슬렁 성북동 시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