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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모와 영광의 굴곡끝에 만난 일제강점기 모던 청년의 감성-부천인문路드 정지용 편

수모와 영광의 굴곡끝에 만난 일제강점기 모던 청년의 감성

부천인문路드 정지용 편

 

일제강점기 시를 쓰던 청년이 있다.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로 씌어진 청년의 작품은 그를 한국 대표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렸다. 한국 서정시의 서두를 연 청년은 40대에 막 접어든 1942년 붓을 꺾고 과거 수주라 불렸던 부천에서 그의 종교인 천주교 청년활동에 몰두한다.

이후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가을을 지나면서 그의 행방이 영원히 묘연해졌다. 해방 후 혼란한 시기 조선문학가 연맹에 가입한 연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럼에도 전후 생사가 불명하다는 이유로 월북시인이라는 주홍글씨가 남아버렸다. 그의 이름은 1988년 그의 작품이 해금되고 대표작 향수가 노래로 발표될때까지 제대로 불릴 수 조차 없었다.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부천 인문로드에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바로 이 정지용 시인이 종교 활동에 몰두한 흔적들을 짚어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가 직접 세웠던 성당은 사라졌지만 카톨릭 청년활동을 하며 암울했던 시기에도 ‘한국어’로 된 청년회보를 발행한 그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있다.

1902년 생인 정지용 시인은 대한제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미군정 시기를 거쳐 한국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 절반을 온몸으로 겪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이념으로 나뉘어 싸웠던 시대의 수레바퀴 아래 그의 이름도 함께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한국어로 작품활동이 어려웠을 시기인 1942년 그가 붓을 꺾은 것에 나는 주목했다. 또한, 한국어로 카톨릭 청년회보를 3년간 발행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세례명 방지거-지금은 프란치스코-로 부천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의 머리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었을까? 그토록 고운 시를 써내려 가던 시절 절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 해줄 사람이 없어 남겨진 자료의 조각들을 모아 유추할 뿐이다.

<가톨릭청년>에 발표된 정지용의 산문 <소묘 3>의 첫부분

또한 정지용 시인은 이념 갈등으로 존재가 강제로 지워진 예술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존재다. 부천 인문로드 강연에서도 강조했던 것처럼 그는 무엇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소사 성당을 직접 벽돌을 쌓아 올려 지은 그에게 좌익딱지는 이해가 조선문학가연맹에 가입했다는 것말고는 그가 월북했다는 증거 또한 없다. 그의 존재는 대중들에게 접근할 기회를 강압적으로 빼앗긴 수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를 극명히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혼란의 시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분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발라드같은 그의 시들을 좀 더 여한없이 누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천 소사동 정지용 집터에는 정부가 아닌 부천 복사골 문학회에서 남긴 표식이 있다. 엉킨 과거사 해결에 아직도 갈길이 먼 한국 문학의 현주소를 내비치는 듯 해 씁쓸함을 남긴다.

<부천>정지용 집터에 남아있는 복사골 문학회의 표식, 부천인문로드 투어 중 정지용 작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카툰캠퍼스 이원영이사

정지용 시인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같은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과 함께 앞으로 남겨진 과제를 바라본다.

후니수모와 영광의 굴곡끝에 만난 일제강점기 모던 청년의 감성-부천인문路드 정지용 편

인문路드 – 정지용과 향수

정지용 / 카툰 배추김흥수 / 낭송 김희정

 

누구의 시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그립고 보고 싶을때 흥얼 거리는 노래가 있다. 특히 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부는 이맘때쯤이면 더욱 더 그렇다.

정지용의 ‘향수’는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그가 고향을 그리면서 쓴 시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잘 담겨져 있다. 이 시가 일제의 암흑기에 쓰여 졌으니 나라를 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타향에서 느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 했을지 차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고 난 후에 한결 여유 있는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가사는 물론이고 시가 담고 있는 리듬과 운율에 그 누구나 공감하고 모든 것을 품어줄 수 있는 따뜻한 우리의 정서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 그는 누구인가? 학교 다닐 때 어렴풋이 들어본 것 같지만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잘 몰랐던 시인이었다.


그는, 1902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를 임신했던 당시, 그의 어머니는 연못에서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1911년 대홍수로 집이 떠내려가면서 한의사였던 아버지의 한약재와 한약 도구가 떠내려가게 된 후 가세가 급하게 기울어 어렵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윽고 12세에 동갑내기 송재숙과 1913년에 혼례를 올리고 3남 1녀를 두게 된다. 그 후 1918년 17세의 나이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졸업 후 교비 장학생에 선발된다. 그렇게 일본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진학하게 된 그는 1929년에 졸업을 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의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하게 된다.


1950년 6.25를 전후하여 그의 행방은 지금까지 알 수 없다. 다만, 6.25 때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고 있다 북으로 끌려가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설과 고문을 당하고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진위는 확인할 수 없다. 스스로 월북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월북 시인으로 분류가 되어 문학사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그의 가족들은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나중에 1988년 정부에서 재검토한 결과 월북이 아니란 것이 확인되어 해금되기 전까지는, 정지용이라는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쓸 수 없었으며 그의 시를 함부로 낭송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를 더욱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고통을 직접 겪고 살아온 부인 송재숙 씨는 70세를 일기로 1971년 4월 15일 별세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들 구관 씨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게 되어 북에 있는 동생과 만나게 되었지만, 동생들조차 아버지의 생사를 전혀 모르고 있어 그의 마지막 발자취는 지금까지도 알려져있지 않다.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등장한 그는 다양한 감각적인 경험을 선명한 이미지와  절제된 언어로 시를 썼다는 평을 받는다.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여, 김영랑과 함께 순수 서정시의 개척에 힘을 썼으며 한국 현대시의 초석을 놓은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향수’는 그의 초기작으로 1927년 조선지광(朝鮮之光) 3월호 통권 56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 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1933년 ‘카톨릭청년’ 편집고문이 되면서 2년 후 첫 시집 ‘정지용시집’을 간행하게 된다. 그의 작품 활동은 그 이후로도 이어져 1939년에 ‘시문학동인’ 이 되었으며 1941년에 시집 ‘백록담’을 간행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1945년에 이대교수가 되었으며 1946년에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4년 세계 2차대전 말기 열세에 몰린 일본군이 연합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에 소개령을 내리게 되면서, 정지용 일가는 그 후 1946년 5월까지 3년 동안 경기도 부천시 소사읍 소사 본 2동 89-14번지로 거처를 옮겨서 살아왔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렇게 이사한 부천에서 시를 쓰지는 않고, 대신에 소사성당 창립에 전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곳에서 그는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기도문 번역에도 참여해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된다. 하지만 소사성당 건물이 흔적도 없이 소실되게 되면서, 그의 신앙심과 열정을 따르고자 최근에 현재의 소명여자중·고등학교 도서관을 이용한 소사성당에서 첫 미사가 봉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특히 부천 지역 교회사와 관련해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부천 복사골문학회는 1993년 정지용 집터에 기념 표석을 세웠고 부천시는 부천중앙공원에 ‘향수’ 시비를 세웠다. 부끄럽지만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무렵 그의 시비 앞을 아무런 생각 없이 가볍게 지난적인 있다.

그러한 그의 시 ‘향수’는 대중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래로 탈바꿈 하게 된 데에는 일화가 있기 마련인데, 가수 이동원이 처음 이 시를 접하게 되고 너무 마음에 들어 노래로 부르고 싶어서 당시 최고 작곡가 김희갑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노랫말로 써진 게 아니라서 운율이 잘 맞지 않아 곡을 붙일 수 없어서 김희갑 선생은 이를 노래로 만들 수 없다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끈질기게 삼고 초려하여 간청한 끝에 노래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 노래를 같이 부르게 된 테너 박인수는 같이 노래를 부르자는 이동원의 수많은 제안 끝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으나, 대중 가수와 같이 노래를 부르는 그를 국립오페라단에서는 클래식을 모독했다며 비난했고 결국 제명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끝없는 노력과 시련이 있었기에, ‘향수’가 노래로 불러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접하게 되면서 좋아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헛되지는 않았으리라.


이동원 (Lee Dongwon) + 신동호(테너) : Shin Dong-ho (Tenor) 

 
고향을 노래하고, 그리워하며, 사랑했던 우리 민족의 시인 정지용의 ‘향수‘는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게 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소중함을 더욱 잘 알게 해 주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노래다. 이번 인문로드로 인하여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역사적인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노래를 재조명해보고, 그 시대상이 빚어내는 아픔을 작가의 입장에서 해석해보면서 작가에게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실개천이 흐르던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조용한마을, 아담한 초가집에 물레방아가 돌고 있는 곳에 시인 정지용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그를 만나러 그곳에 다녀와야겠다.

정 정숙인문路드 – 정지용과 향수

인문路드 – 수주 변영로와 그의 형제들

노랗게 물들어가는 들녘을 바라본다. 청명하다는 높고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토끼구름 애기구름마냥 두둥실 흘러 다닌다.

가을이다. 이맘때면 매번 찾아나서는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의 내고장 알기 현장체험학습. 그러나 이번엔 카툰캠퍼스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어슬렁 프로젝트인 부천인문로드’로 고리울 강상골의 밀양 변씨 일가를 찾았다.

고리울 강상골은 부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지로,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고리울에서 ‘고’자를 따고 강상골에서 ‘강’을 따서 고강동이라 부른다. 특히 밀양 변씨 집성촌으로 100년이 넘는 가택이 있고, 뒷 언덕길의 따라 올라서면 부천의 향토유적 제1호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부천에는 신도비가 제1호~4호까지 있다)

수주(樹州)는 부천의 고려 때 부천의 행정명칭으로 나무 수(樹)자에 고을 주(州)로 ‘나무가 많은 고을’로 변영로 시인의 호 수주도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수주의 형제는 삼형제로 맏형인 산강 변영만은 한학자이며, 법률가로, 일석 변영태는 둘째형으로 국무총리와 교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이들을 삼변이라고 하는데 당송 8대가인 소동파 소식 집안의 삼소(三蘇)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삼소란, 소식의 아버지 소순, 그리고 소동파의 소식의 아우인 소철이 모두 문장이 뛰어났기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들 중 막내인 수주 변영로의 시비는 삼변 묘소 아래에 세워져 있고 푯돌은 50미터 전방에 세워져 있다.

수주 변영로(卞營魯: 1898~1961)는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다. 아호는 수주(樹州)로 정상(鼎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수주 변영로는 어렸을 때 이름은 영복(營福)이었다. 12세 때 중앙학교를 중퇴하고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San Jose)에 대학에서 수학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활동시작은 1918년 청춘에서 영시로 <코스모스>를 발표하면서이고,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 <폐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꿈 많은 나에게><나의 꿈은>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22년에는 <신생활(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하는데 제1기는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로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실제(失題)><사벽송(四壁頌>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벽(南宮壁)의 유고 일문시(日文時)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時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 서울시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했다.

– (부천시의역사와문화유적 참고)

1996년에 12월에는 ‘문학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 고장의 큰 인물로 그를 기리기 위해 중앙공원에 <논개>를 새긴 시비를 건립하였고, 다음해는 고향집 앞에 푯돌을 세웠다. 1998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고강동 묘소 앞에 그를 기리는 묘비를 세웠고, 2001년 10월엔 수주로에 그의 동상도 세워 오가는 이들이 우리 문단의 큰 별을 자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소재지: 고강동 11-26번지)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  시 변영로 / 카툰 이현정 / 낭독 이현정

강상골 향나무 
2018년 10월 26일에는 시비 재건립 차원에서 재막식 행사를 한다고 한다. 

이전의 가택이나 시비는 재정비 된 추후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 용택인문路드 – 수주 변영로와 그의 형제들

어슬렁 인문路드에서 만난 ‘소사동 보호수’

카툰캠퍼스 이원영 이사님께 ‘부천 인문路드’ 교육을 받고 마지막 수업으로 오늘은 현장 탐방을 하였다.


만저봐 기자님들과 카툰캠퍼스 식구들
그리고 문화재단 관계자와 일반 시민들이 약 40여 명 참석하였다.

부천서 35년 이상을 살았지만 변영로, 정지용, 양귀자에 대하여 거의 알지를 못였는데 인문로드를 통하여 많은 걸 알 수가 있었다.

특히 양귀자 작가에 대해 많은 편견도 있었는데 소설 속의 장소를 하나하나 찾아서 나아갈때마다 새롭게 모든 걸 알 수가 있어서 좀 더 성숙된 기분을 느꼈다.

그 옛날 한참 일할 때 양귀자 작가가 살던 원미동사람들 같이 나도 책 속의 인물들처럼 그렇게 살았다.

옛 시청 자리 옆 조각공원을 출발하여 무궁화연립, 강노인땅, 장미연립, 원미산 둘레길을 두루 돌아 옛 소사성당으로 왔다.
잠시 쉬는 사이 난생처음 부천서 처음 세워진 소사성당도 볼 수 있었다.


한참을 걸어 경인 국도를 가로질러 소사삼거리에서 정지용 시인 거주터에서는 이원영 이사님의 맛깔난 역사 설명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유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 한 잔을 하며 조관제 선생님의 카툰 작품과 고구마작가님의 멋진 작품을 감상하며 오늘의 공식 일정은 끝이 났다,

바깥에서 여기저기 살피던 중 눈에 확~ 들어오는 나무가 있었다.
소사동에서 보호수로 관리하는 천년이 훌쩍 넘은 은행나무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작 백 년도 못 살았고 은행나무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다.

화선지에 수묵담채로 그리다

은행나무가 말을 한다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

“어리석은 인간들아 한 치 앞을 못 보면서 뭘그리 욕심과 탐욕에 미쳐서 날뛰냐!”

장 대식어슬렁 인문路드에서 만난 ‘소사동 보호수’

부천 인문路드에서 만난 양귀자

부천 인문로드를 걸었다. 양귀자 소설가의 ‘원미동사람들’의 주 배경인 원미동을 출발해 원미산 둘레길을 넘어 정지용 시인이 거주했던 소사동으로 넘어가는 코스다. 부천에 살고 있으면서도 7~80년대 문학계를 주름잡던 양귀자의 ‘원미동사람들’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 TV 드라마로 방영되고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나서야 책을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그녀가 쓴 소설들을 다 사서 읽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부천작가회의에서 주최하는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때 부천을 빛낸 작가로 양귀자소설가를 초대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 초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잊혀갔다.

2017년 부천이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선정되었다. 시인 변영로, 정지용, 소설가 양귀자, 동요작가 목일신, 펄벅 등 부천출신이거나 부천에서 사신 분들의 힘이다. 그중 양귀자소설가는 9년 가까이 원미동에 거주하며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했다. 그녀의 수필이나 소설에 부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부천에서 수주 변영로 시인과 목일신 동요작가, 펄벅기념사업 등은 성대히 치르고 있지만 양귀자 소설가는 묻혀있었다. 문학창의도시가 되고 부천의 문인들이 재조명되면서 양귀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양귀자 소설가는 1955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문예장학생으로 원광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78년 ‘다시 시작하는 아침’(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그 후 부천으로 이사와 소시민의 삶을 다룬 ‘원미동 사람들’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희망,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숨은 꽃, 천년의 사랑, 곰 이야기, 모순 등 많은 소설을 발표하고 유주현문학상과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소설‘ 원미동사람들’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모순’, ‘나는 소망한다…’ 등은 드라마로도 제작되며 8, 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작품 활동이 뜸해져 그의 신작 소설을 접할 수 없었다.

부천출신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마련한 이번 인문路드는 원미동사람들 조각공원(원미 어울마당)에서 출발해 소설 속 배경지인 무궁화연립과 강노인의 땅, 장미연립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됐다. 소설의 주 무대였던 무궁화연립은 현대식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그렇게 지키려고 애썼던 강노인의 밭도 공원으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세탁소나 동네 주변이 있어 소설 속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들리는 듯 정겨웠다.

인문로드 투어를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재 구석에 잠자고 있던 양귀자 소설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었을 땐 잘 와 닿지 않았던 원미동 23통 동네 전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지금은 표지석만 덩그러니 놓여있지만 길 오른편에 강노인 밭과 은혜네가 살던 무궁화연립, 형제슈퍼가 있고, 길 왼편으론 원미지물포와 써니전자, 행복사진관, 강남부동산과 정육점, 싱싱 청과물이 죽 늘어선 시장골목도 보인다.

 

원미동 시인 몽달씨와 형제슈퍼 김반장, 행복사진관 엄씨와 으악새 할아버지, 등장인물 모두가 생존을 위해 아귀다툼도 하지만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주민들의 따뜻한 시선이 글 곳곳에 묻어있다. 가난하지만 국수 한 그릇도 나누어 먹던 그 시절, 우리는 다 그렇게 살았다.

숨은 꽃, 천년의 사랑, 모순 등, 다시 읽어도 그녀의 글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80년대 젊었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 소설에 푹 빠져 밤을 새웠다.

소설 속 밤무대 가수 은자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던 ‘한계령’이 귓전에서 맴돈다.

“이 산 전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한 성희부천 인문路드에서 만난 양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