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가면

소설가 박경리의 청계천

화창한 5월의 어느 날 어슬렁 청계천 투어에 올랐다. 경상도 깡 시골 출신인 내게 서울은 가깝고도 먼 도시다. 20대부터 서울과 경계인 부천 하고도 역곡에 살고 있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울 마실을 가지 않는다. 굳이 인 서울을 하지 않아도 볼거리 즐길 거리가 부천에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계천은 꼭 가보고 싶었다.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세운 역사문화공원과 디자인플라자의 위용도 보고 싶고 맑은 물이 졸졸 흐른다는 청계천변을 걸어보고 싶었다. 1978년 서울에 처음 올라와 청계천 헌책방을 많이 다녔다. 가난하고 책 욕심 많은 학생에겐 그만한 안식처가 없었다. 결혼 후에도 가끔 청계고가 밑으로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과 광장시장, 동대문시장을 둘러보며 쇼핑으로 하루를 보냈다. 조금만 발품을 팔면 마음에 드는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살 수 있었다. 청계천 하면 인도(人道)의 반을 차지하며 내놓은 물건들 하며 좁은 골목들을 헤치며 걷던 많은 인파들이 생각난다.

2003년인가 청계천 복원사업의 시작으로 청계고가를 철거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교통이 통제된 청계고가에 올라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걷는 시민들의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그 후로 청계천을 못 가봤다. TV에서만 부분적으로 봤을 뿐이다.

1971년에 만들어진 청계고가로, 2003년 철거되었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 고가 철거

기념으로 남아있는 철거되지 않은 청계천 고가도로

오전 10시, 상왕십리역에서 ‘만저봐’ 식구들과 만났다. 오늘 투어는 동대문 역사박물관에서 시작해 동대문 역사공원과 성곽 길, 버들다리와 광장시장을 지나 천변을 걸어 종각까지 갈 예정이다.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미래를 전시하고 있다는 박물관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청계천 이야기와 구보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이 전시되고 있었다. 원래의 청계천은 발원지 백운동천에서 실핏줄처럼 이어진 30개의 개천이 모여 이루어 졌고 24개의 다리가 놓여있었단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이었는데 1914년부터 ‘청계천’으로 불렸단다. 그동안 몰랐던 청계천의 역사를 더듬다가 소설가 (고)박경리 선생님의 기고를 읽었다. 뜻밖이었다. 선생님과 청계천이 관련되었다니….

서울 성동구에 위치한 청계천 박물관

 

‘청계천 복원, 역사의 복원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사업의 핵심은 개발이었습니까?’

 

생계수단을 내어놓고 협조한 청계천 노점상 대표의 성난 목소리다. 이들 민초의 충정과 분노에 대하여, 청계천 복원에 다소나마 관여한 만큼 나는 민망하고 부끄럽다. 

청계천 사업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시장은 맹세코 정치적 목적을 떠나 이 대역사를 진행하고 있는지, 그렇다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 겨울밤 가등 밑에 웅크리던 노점상들이 그 빈한한 생계수단마저 내놓은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 희생에 등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본부장 역시 이해와 상관없이 복원공사에 몰두하고 있는지, 그렇다 한다면 그도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지식인의 양심은 이 시대의 등불이니까. 

참, 말을 해놓고 보니 멋쩍고 찬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다. 어쨌거나 그 숱한 개발과는 달리 청계천의 복원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정서를 살리는 숨은 뜻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치적 의도 때문에 업적에 연연하여 공기를 앞당긴다면, 결과가 복원 아닌 개발이 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시장의 정치적 역정에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또 만일, 추호라도 이해라는 굴레에 매달려 방향을 개발 쪽으로 튼다면 본부장 역시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그는 그렇다 치고 납득이 안 되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복원 전문도, 토목 전문도 아닌 조경전문가가 어찌 총책임을 맡았는가 하는 점이다. 옛날, 큰 건축공사를 총괄하는 도편수(도목수)는 재상감이라 했다. 나라에 바치는 정성과 사물을 보는 안목을 따졌던 것이리라. 

두 번째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청계천 복원 사업 설계보고’에 관한 것이다. 항목별로 돼 있는 것을 보니까 하천 분야가 7페이지, 하수도 분야가 3페이지, 유지용수 분야가 4페이지, 도로 분야가 5페이지, 교량 분야가 22페이지, 다음 조경 분야는 압도적으로 27페이지에 이르고 있다. 

조경전문가인 본부장은 아전인수를 일삼은 것일까. 조경의 예산이 도시 얼마인지 궁금해진다. 주객이 전도되어도 유분수,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예산이 넉넉지 못할 경우 조경은 안 해도 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겉치레일 수도 있고, 청계천과 비슷한 프랑스 파리의 센강에서 나는 조경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 화면을 통해서 자주 접하게 되는 여러 나라 수도를 끼고 흐르는 유명한 강들도 그러하다. 강변은 탁 트여 있을 뿐, 기억에 남은 것은 라인강의 인어상 정도다. 

물길을 잡아주고 홍수에 대비하는 하천 분야, 강물의 오염을 막기 위한 하수도 분야, 교통을 원활하게 하는 교량 분야, 그런 것을 튼튼하게 하면 되는 거지, 조경은 세월 따라 자연이 만들어 주게 되어 있다. 

앞서 도편수의 안목을 말했는데 우리 문화의 진수는 생략이다. 생략은 저 광활한 지평선 수평선, 우주와 지구가 맞닿은 곳의 균형과 강건함에 다가가고자 하는 정서이며 소망으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단히 높은 우리민족의 감성인 것이다. 

그리 크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공간인 청계천에 덧붙이고 꾸미고 구조물이 들어앉을 조경은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복잡하고 어지럽고 규격화에 지친 도시인들은 단조로운 여백 속에서 쉬어야 한다. 야하게 분바르고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여인보다 소박하고 품위 있는 어머니의 품을 생각해 보라. 

시냇물에 분수가 가당키나 한가. 설계를 보아하니 요란스러운 교량도 몇 개 있던데 청계천이 잡탕이 될까 두렵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원 문제다. 단적으로 말해서 조경 때문에 복원이 희생되고 있는 것 같다. 

복원한다는 풍선은 띄워놓고 수표교 복원은 유야무야, 다른 공사가 진행 중인데 수표교 복원이 결정될 때 진행 중인 공사는 뜯어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복원을 하게 되면 뜯어내야 할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저의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복원은 안 하겠다는 속셈이며 그 속셈을 감추기 위한 술책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수표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이다. 문화재나 유적의 복원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적 사업으로 신중하고 철저하며 복원인력 양성에도 막대하게 국가가 투자하는 것이 외국의 사례이다. 결국 청계천은 30여년 전에 첫 개발에 의해 매장되었고 이번에 또다시 개발에 의해 모든 유적은 파괴되고 유실될 위기에 놓여 있다. 

처음, 청계천 복원을 꿈꾸던 몇몇 학자들이 십년 후에나 가능할까, 이십년 후에나, 하면서 토지문화관에 모여 두 차례 세미나를 개최했다. 어쨌거나 그것이 발단이 되어 시작이 된 청계천 복원 사업이다. 

지금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미력이나마 보태게 된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 발등을 찧고 싶을 만치 후회와 분노를 느낀다. 차라리 그냥 두었더라면 훗날 슬기로운 인물이 나타나 청계천을 명실 공히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몇 년은 더 벌어먹고 살았을 텐데. 노점상인들이 안타깝다.

– 2004년 3월 5일 동아일보 박경리 특별기고

 

노년에 원주에 기거하시며 글이 안 써질 때마다 밭일을 하신다는 선생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자연에는 돌 하나 풀 한 포기, 선생이 아닌 것이 없다는 기사를 읽으며 얼마나 선생님이 생명과 환경에 관심이 많은지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처음엔 청계천 복원사업에 찬성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맑은 물과 나무가 있고 그 속에서 물고기가 뛰노는 청계천변에 공연장, 미술관, 전시장을 만들어 우리의 특색 있는 문화를 보여주고 시멘트 공간에 갇혀있는 서울 시민들이 숨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 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원이 아닌 개발이 되어 가는 걸 보고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금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미력이나마 보태게 된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 발등을 찍고 싶을 만치 후회와 분노를 느낀다. 차라리 그냥 두었더라면 훗날 슬기로운 인물이 나타나 청계천을 명실 공히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몇 년은 더 벌어먹고 살았을 텐데. 노점상인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얼마나 한탄스러웠으면 발등을 찍고 싶었을까!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청계천변을 걷는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오후, 나무 그늘이 없어 온 몸으로 해를 받다 보니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래도 물길이 좋아 마냥 걷게 된다. 걷는 도중 몇 개의 다리를 만났다.

광통교, 수표교, 살곶이 다리 등, 모두 새로 만든 거라 했다. 공사 중에 유물들이 상당히 나왔지만 제자리에 가지 못하고 지금도 하수종말처리장에 쌓여 있다.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에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단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애물단지였던 청계고가를 허물고 복원을 통해 시민들에게 도심 내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새로운 관광명소를 만들었다는 평도 받는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약 1억 9천 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하였다. 도시에 바람 길을 열어 대기 환경을 개선하고 온도를 낮추어 도심의 열섬현상을 줄이는데 큰 기여를 했단다. 게다가 슬럼화 되어가던 구도심을 복원해 환경을 개선시키고 다양한 입지 매력도를 상승시켜 상당한 경제적 효과를 얻었다고 했다.

5.8㎞ 이른다는 아름다운 청계천변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와 오해와 진실이 숨어 있다니….

청계천박물관에 전시된 청계천 복원관련 전시

나는 청계천을 잘 모른다. 그저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을 뿐이다. 선생님의 바람대로 맑은 물과 나무가 우거진 생명과 환경이 존중되는 아름다운 청계천을 그려볼 뿐이다. 어슬렁 청계천을 걸으며 제대로 역사공부를 한 것 같아 힘은 들었지만 뿌듯하다.

한 성희소설가 박경리의 청계천

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

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배움은 평생교육이라 했다.

2006년 지역사회에서 <내 고장 알기>로 시작했던 문화체험활동에 이어

올해 꽃피는 춘삼월에 새맘 새 뜻으로 알차게 준비한 카툰캠퍼스 <만저봐>만의 성북동 프로젝트, 이들이 야심차게 서울 한복판을 누비고 다녔다.

 

어슬렁어슬렁~ 성북동 문화체험

언뜻 생각하면 한가로워 보이고, 여유롭게 다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과연 그럴까.

 

서울 한복판 광화문에 모여 있으니 주변의 온통 건물과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걸 보니 대환영인가 보다. 출발하기 전, 이원영 이사님, 일명 이이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광화문 명성황후 조난지 신무문 팔판정육점 말바위안내소

삼청공원 등산길 북정마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이태준생가 길상사

여러분~ 오늘 코스는 앱에 올려놨으니 설명을 참고하여 보시면 됩니데이 ~

 

“건너편에 저기 보이시져. 청계천 길이거덩여. 그리고 여기 쭈욱 내려가믄 남대문 나오는 것 아시고, 서울역, 한강대교 나오는 거 아시고 , 자 이 건물 있잖아여. 이거 여기가 몇 번지게~여. 종로구 1번지, 여기가 종로구에 생긴 첫 건물이라 해서 종로구 1번집니다. 여기가 나중에 도로가 개편되면서 도로주소로 바뀌었지만 여기는 끝까지 종로구 1번지예요. 교보에서 이것만큼은 지켜야겠다고 하는데 교보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시고 자 이동 하겠습니데이.”

가는 도중에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기자회견 하는 모습과

법인권사회연구소 주관으로 걸린 현수막 <평화의 소녀상> 플래카드도 보인다.

“저 위는 광화문을 찍을 때 가장 좋은 장소로 개방하지 않습니데이. 예전에는 불허했지만 지금은 허가되어 사진촬영도 가능하다고 합니데이. 그리고 이 도로 주변은 예전에는 온갖 관공서로 되어 있었어여. 지금은 대로 안에 언론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여.”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경상도 언어라서 설명을 다는 귀담지 못해 아쉽다.

 

광화문에 다다르니 한복 입은 모습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잠시 멈췄다.

선왕조 도읍이었던 서울은 한나라의 수도로 4개의 산, 4대문과 4소성으로 이루고 있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 등이 있고, 서울의 진산은 북한산이다. 서울의 산 성곽은 군사목적이 아니고 동네 담벼락 같고, 군사적 요소로는 북한산과 남한산이며, 삼각산은 북한산 자체가 삼각산이다. 그리고 인왕산코스는 혜화동까지는 성곽 길로 되어 있고, 서울 성곽길 중에 청와대 뒷편은 3시 이전에 가야 출입이 가능하며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조선을 설립한 이성계는 도읍지 한양에 4개의 대문을 세우고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고 도읍의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을 세워 도읍의 기본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4개의 소문은 북문과 동문 사이에 혜화문, 동문과 남문 사이에 광희문, 남문과 서문 사이에 소의문, 서문과 북문 사이에 창의문을 두었다.

 

경복궁에 들어서며 나무가 별로 없는 이유를 묻는다.

자객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며, 지붕에 뭣이 놓여있느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우리나라 궁에는 문이 2개, 중국은 3개로 차이점은 폐하와 황제로, 중국은 벽돌인 반면 우리나라는 돌과 화강암이 다르다고 했다. 인왕산 북한산도 돌덩이가 많고 성북동, 혜화동도 1970년대에는 주로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경복궁!!!

조선시대 건물로 사적 제 117호인 경복궁은 종로구 1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임금이 살던 궁과 나라의 대신들이 일을 의논하던 건물로 태조 4(1395)에 종묘 사직단과 함께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에 불타 273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이 7년여의 무리한 공사 끝에 다시 지어졌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다는 구실로 근정전 남쪽 전각들이 수난을 겪거나 철거당해 10여 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궐이라고도 불리었다.

 

또 별궁으로, 와룡동에 위치한 창덕궁(155)은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5(1405)에 지어졌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자 3백여 년 간 조선왕실의 궁궐로 쓰이면서 또 다른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국보인 인정전과 보물인 돈화문, 선정전, 대조전 등이 있고 천연기념물인 700년된 향나무와 600년 된 다래나무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궁으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드디어 아픔의 역사가 남아 있는 건청궁에 들어섰다.

조선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일본세력을 배척하자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이 되어 고종 32년(1895) 10월 8일(음력 8월20일)에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사건으로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곤녕합으로 명성황후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침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잠시 아픔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신무문(神武門)!!! 청와대가 바로 보인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출입하는 문으로 정문격인 광화문이 있다면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이 있다. 현재는 광화문과 신무문을 통해서 경복궁을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신무문은 청와대 정문과 연결되는 문으로 최근에는 개방되고 있다. 공터가 많은 이유를 묻자 이전에는 수도방위사령부, 일명 수방사로 지금은 과천 남태령 고개로 이전했고 참고로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수년전 동생이 수방사에서 군복무를 해서인지 느낌이 달랐다)

(청와대 정문을 뒤로하고 삼청공원 등산길로 이동하며 해설은 다시 시작된다).

횡단보도는 아무나 못 건너가며 직원들만 다니는 곳

고종과 김구가 연결된 백범일지를 읽어보라며 역사가 얽혀 있다고 했다.

 

 

 

삼청공원 등산길로 올라서니 이제 부터는 체력의 안배가 필요했다. 극기!! 그동안 나를 이기지 못해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 극기로 그동안의 어려움을 이겨낼 필요가 있었다.

<삼청공원 등산길-북정마을 사진>

이 코스와 곁들어서 알아야 할 것은

청계천과 혜화동인데 청계천은 광화문에서 우측으로 쭈욱 넘어가면 혜화동이 나오며 경복궁, 창경궁까지 나온다. 혜화동 로타리와 한성대교까지 나오고 한성대 입구부터 성북동이다. 성북동편에서 330번지 교보단지로 문화대기업이 모두 있다고 한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지역이기도 하다.

북정마을을 거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에 머물렀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오셔요 중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 -심우장에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잔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남향하면 바로 돌집*을 바라보는 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다.“ -돌집: 조선총독부

“철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 -벽초 홍명희-”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

“나는 돌에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

각 민족의 독립 자결은 자존성(自存性)의 본능이요, 세계의 대세이며, 하늘이 찬동하는 바로서 전 인류의 앞날에 올 행복의 근원이다.

누가 이를 억제하고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중

 

학창시절 꼭 외워야 했던 <님의 침묵>중의 한 구절은 생활 속에서도 읇조리던 한마디이기도 했다.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었던 월북작가 이태준의 생가를 찾았다. 상허 이태준이(1933년~ 1946년)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하고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 피는 정원』,『황진이』 『왕자 호동』 등 주옥같은 작품을 저술하였기에, 이곳을 이태준 문학의 산실이라 부른다.

잠시 고택을 둘러본 후 다음 행선지 길상사로 향해 출발했다.

 

이곳을 찾아 가는데 아슬아슬한 옛날 골목들이 많아 마치 미로 찾는 느낌이고, 한참을 지나서야 끄트머리에 길상사가 있었다.

북악산각, 대원각. 삼청각, 청원각은 요정으로 이중에 대원각이 길상사라고 한다.

1997년 길상사를 창건한 이곳은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법정스님 유골을 모신 진영각이 있고,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김영한 여사가 보리심을 발하여 성북동의 대원각을 조건 없이 기증하였다고 한다.

공덕주 길상화 보살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7천여 평의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청하였고, 1997년 대원각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창건되는 아름다운 법석에서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 라는 불명을 받았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저서와 역서: <무소유>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화엄경> <숫타니파타) 등 다수

 

 

길상사를 끝으로 둘러본 뒤 터널을 통해 원 위치에 도착한 만저봐 일행은

19254걸음 걷기+달리기 거리 11.9키로미더를 걸었다는 만보기를 보여주는 카툰캠퍼스 조희윤 대표의 한마디에 모두가 힘은 들었지만 알찬 첫 문화탐방을 자축하며 다음 성공을 위해 파이팅을 외쳤다.

고구마작가님,  만저봐와 함께한 생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신 용택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어슬렁성북동 관찰기

 

박 현숙어슬렁성북동 관찰기

장화백의 산행일기-초간정의 초겨울

문득 고향 근처 금당실 소나무 군락지가 보고프다.

이정표에 초간정이 보인다.

금당실을 지나 초간정에 도착하니

옛 선비의 자취는 간데없고 쓸쓸한 정자만 덩그러니 남아서 나를 반긴다.

소나무 밑에서 스케치를 하며 무념무상에 잠긴다.

장 대식장화백의 산행일기-초간정의 초겨울

법정스님 무소유 의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듯이 길상사를 찾았다

무방비 상태의 내게 다가온 법정스님의 모습은

티끌보다 작은 나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무엇이든 채우기만 하였던 내가 부끄럽다

손수만든 나무의자와 고무신 한켤레는 무한한 우주보다 커보였다

이제부터라도 비움의 미덕을 가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두를 하나둘 비워 나가자

 

장 대식법정스님 무소유 의자

성북동 북정마을엔 그 누가 살까요?

이곳은 600년의 조선 역사가 가득 담겨있는 문화유산인 서울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성북동’이라고 불린다.

조선 왕조 초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성곽에 돌과 흙으로 쌓은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흥인지문 (동), 돈의문 (서), 숭례문(남), 그리고 숙정문 (북)이 바로 그것이고 4소문은 흥화문 (동북), 광희문 (동남), 창의문 (서북), 그리고 소덕문 (서남)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종 때는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과 방어 시설을 늘리는 대대적인 공사를 단행하였다고 한다. 숙종에 이르러서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으로 되게 쌓았다.

광화문을 시작으로 청와대를 지나서 계속 올라가는 길에는 사람들을 내려놓고 어슬렁거리며 출발하는 급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을버스, 심우장에서 10여분 걸어 올라가면 위치한 탁 트인 정상, 계단을 올라가면 아래 동네가 훤히 보일듯한 누군가의 담벼락.. 여기는 북정마을이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동네이자,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성북동 북정마을은 젊음의 거리와 대학로에서 불과 20분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옆으로 성곽을 끼고 있어 성벽 근처를 중심으로 생겨난 달동네의 모습은 흡사 큰 타원형을 띄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에 진행된 도시화는 이윽고 급격한 인구증가와 주택부족 문제로 이어졌고 그 결과 사람들은 성곽에 기대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북정마을은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거친 땅을 깎고 다듬어 저마다 집을 짓고 골목에 모여 이웃이 된 마을이다. 마을이 생기고 난 후에 배고픈 문학인과 예술가들이 점점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집값이 싼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곽코스를 거닐며, 성문이라는 조그만 구멍 같은 성곽의 문을 통해 바라 본 북정마을은 방금 찾아온 설레고 아름다운 봄만큼이나 평화로웠다. 과연 저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열악한 환경 속에서 거주하던 북정마을 주민들은 재개발이란 희망마저 사라지게 되자 속속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주인이 떠난 빈집에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없자 빈집들이 하나 둘 늘었다고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대부분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실정이며,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는 집들 대부분은 재개발을 염두한 외부인들 소유들이라고 한다. 대문에는 몇 개월 전, 심지어 아주 오래전에 도착한 우편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집들도 있었다.

서울 시내에 이런 마을이 있나 싶을 정도로 예스럽고 정감이 가는 동네!

서울성곽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주고 있어서 사람들이 살기에 최적의 동네가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다. 옛 것의 정감과 날 것의 그대로가 공존하고 있는 그 공간이 좋았다. 담장 너머 빨랫줄에 걸려있는 속옷과 겉옷, 깨끗이 다듬어진 텃밭, 밭을 일구고 있는 할머니, 지붕 위에서 봄의 햇살을 등에 지고 마냥 사랑스럽고 행복하게 누워 있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늘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지만, 성곽길을 따라 거닐며 그날만큼은 한 발짝 살짝 늦추고 여유롭게 걸었다. 빠른 발걸음도, 큰 소리로 내뱉는 말들도, 나도 너도 모르게 ‘쉬이’하며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이내 새로 지은 예쁜 집들이며 형형색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서도 마당과 텃밭이 딸려 있고 나무가 자라고 있는 그 풍경은 서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 왠지 평화롭고 사랑이 넘칠 것 같은 꼭 살고만 싶은 그 집은 옛날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의 집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재에 나는 북정마을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성북동은, 조용한 곳을 찾아온 예술가들이 가득하다. 조용한 골목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갤러리와 작업실 개념의 공방을 겸한 상점들은 상업적인 거리와는 다른 분위기를 뿜어낸다. 둘이서 걷기에도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세상에서 가장 작을 것 같은 눈에 띄는 예쁜 공방과 가게도 많았다.

예스러운 골목마다 즐비한 맛집 또한 일품이다. 상점과 음식점들은 작품에 애정을 가진 예술가들처럼 자부심을 갖고 일을 하며 관광객을 대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정겨운 마을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따뜻하고 친근함이 묻어 있었다.

광화문을 시작으로 선무문, 말바위, 북정마을, 심우장, 수연산방, 그리고 길상사까지 이어지는 성곽코스를 거닐며 성 밖에서 조망한 조선의 시대별 한양도성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빈 집들이 늘면서 개발 필요성이 점차 줄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도시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옛 것이 사라지지 않고 시민이며 많은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북정마을을 내려왔다.

정 정숙성북동 북정마을엔 그 누가 살까요?

시인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는 역은 아니랍니다. 전라남도 남평역이라는 작은 역사를 모델로 한 것이라네요. 어느 해 봄, 남해안을 여행하다가 평온하고 고요해 보이는 한 역과 고요가 깨지 며 선혈로 가득 찬 광주를 대비시켜 쓴 시랍니다.
1954년 광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불운한 성장기를 거친 그는 우리에 게 체로단풍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무는 가을이 오면 잎을 떨어뜨리면서 겨울을 준비하 는데, 매서운 눈보라가 칠 때면 나뭇가지는 우-우 신음소리를 내며 추위를 이긴다고 합니다. 이 체로단풍의 시간을 견뎌내지 않으면 나무는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참아

내는 거지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의 길을 걷게 된 그에게 부모님은 고통이라는 아픔을 주었지만 잘 견디어 냈기에 지금의 훌륭한 시인이 되었겠지요!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오는 고통이 체로단풍 시간이라지만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따스한 봄날 사평역 양지바른 곳에 아름답게 피워낸 그의 꽃밭을 보았습니다.

한 성희시인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장화백의 산행일기 – 금오산 약사암

간간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금오산을 오른다.
우중충한 날씨때문에 그런지 왠지 산 전체가
으시시하고 무거운 음기가 느껴진다.
정상을 찍고 하산길에 약사암을 만난다.
암자 마당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는 정말좋다.
많은 산을 다녀보았지만 특이하게 커피와 음료를 준비해놓고 무료로 아무나 맘껏 먹게하였다. 정말 고마웠다.
특별히 생각이 많이 나서 약사암을 그리다.
화선지에 수묵담채로그리다. 크기는 전지반장.
장 대식장화백의 산행일기 – 금오산 약사암

느닷없이 오사카

박 현숙느닷없이 오사카

북스테이, 간다면 이곳으로 속초 ‘완벽한 날들’

 

대학 동아리 언니가 속초에 서점을 개업했다.

서점을 놀이터삼아 나다니던 요즘, 아는 언니의 개업이라니.

당장 부천에서 속초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버스에서 유리창에 기대 잠든 탓에 찬바람을 맞아 코가 얼얼한 채로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며 요리조리 찾아가기 시작했다.

20분을 걸었는데 지도의 그 서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된 거지?’

결국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캐고 물어

서점과 북스테이를 겸하고 있는 ‘완벽한 날들’에 도착했다.

그런데 서점이 보이자마자 나는, 내가 정말 멍청하단 걸 깨달았다.

‘완벽한 날들’은 시외버스터미널 뒤에 있었다!

바로 뒤!

그 가까운 길을 돌고돌아 나는 속초중앙시장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던 것이다.

 

추위에 길을 찾다가 들어간 완벽한날들.

들어가는 순간 나는 일본영화 <카모메 식당>을 떠올렸고

마치 북유럽의 겨울 한 장면 속 따뜻한 오두막에 들어간 줄 알았다.

따뜻한 조명이 나를 반기고,

책들이 정교하게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압도감을 주면서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위치한 듯한 안정감도 느껴졌다.

흘러나오는 비트 느린 재즈도,

넓게 뚫린 천장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변함없이 예쁜 우리 선배 언니.

언니는 결혼해서 4살짜리 아들내미까지 있는데

새내기처럼 여전히 풋풋한 얼굴로 나를 반긴다.

마치 새댁같은 수줍은 미소가 이 서점하고 아주 잘 어울렸다.

‘속초의 어느 백반집 사장 아주머니의 강렬한 포스보다도

언니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가 아마 이 서점을 오래도록 따뜻하게 데우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문득 들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도 그랬다.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

남편은 무뚝뚝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활달한 아내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한다.

그 불균형에서 오는 안정감인지 뭔지 모를 기분에 손님들은 그 카페를 일부러 찾곤 한다.

‘완벽한 날들’도 그렇다.

특별히 좋은 책이 있어서도 아니고,

특별히 맛있는 커피가 있어서도 아니다.

하지만 속초에 가거나 주변 도시에 가게 되면

일부러라도 들르게 되는 바로 그런 특별한 힘을 가진 서점.

그것이 ‘완벽한 날들’만이 갖는 매력이다.

그러나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법.

왜 발길이 가는지 생각해보니 그것은 바로 고객에 대한 세심한 배려이다.

무엇보다 소품. 소품 하나하나 튀지 않으면서 고객을 배려했다.

북유럽에서 건너온 두툼한 커피 트레이,

책읽기 좋은 1인용 스툴,

푹신한 소파, 유리 화병에 꽂힌 계절 꽃.

화장실은 또 어떤가?

모던하면서도 큼직한 공간이 인상적이다.

편히 쉬고 가라고 소곤소곤 말을 건네는 듯하다.

또 있다.

책장을 보면 세세하게 분류되어 있는 책들의 향연을 보노라면 책에 대해 없던 관심도 생기게 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주인장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동물’, ‘고래’ 코너,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그림동화’ 코너,

책을 읽는 독자를 넘어 작가를 생산하는 ‘글쓰기’ 코너 등.

 

한 해 동안 4번이나 갈 정도로,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좋았다.

시외버스터미널과 가까운 것도 좋았다.

속초 동명항 바다와 가까운 것도 좋았다.

속초 중앙시장과 가까운 것도 좋았다.

그날 산 책을 읽으며 잠드는 포근한 밤도 좋았다.

 

완벽한날들이었다.

 

 

*작년 9월 오마이뉴스 북스테이 기사응모했던 글입니다.^^

서보영북스테이, 간다면 이곳으로 속초 ‘완벽한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