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수호

sooho9

시인, 前 부천시인협회장, 前 복사골문학회장 2005년 첫 시집 <우리가 사는 도시의 외로움에 대한 보고>와 2007년 <솔안말 찾아가는 길>, 2013년 <물끄러미>를 출간. 2017년 <목련 비에 젖다> 출간. 시 해설집 <지금은 시를 읽는 시간> 출간.

박수호 시인의 당신을 위한 시한편 –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혹은 시인에게 더욱 가까운 정서는 행복함이나 긍정적인 것들 보다 우울함과 부정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부정적이고 어둡다고만 이야기 하기에는 기형도 시의 핵심을 비켜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형도를 가까이했던 지인들은 평소, 그는 오히려 유쾌한 농담과 재치 넘치는 수다로 주위를 밝히는 편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그의 어둡고 절망적인 시를 읽었을 때 무척 당혹스러웠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거나, 아니면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을 가졌던 건 아닐까, 그래서 시를 붙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외면과 내면의 간극이 큰 만큼 그의 고독과 외로움은 더 깊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의 시들은 유년시절의 가난, 사랑의 상실, 부조리한 현실의 폭력,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物化된 인간의 모습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대체로 절망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그의 절망은 절망의 끝까지 가 본 자의 도저한 절망으로,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풍경에 속한다. 이 시는 폭력적인 현실과 그로 인한 죽음, 공포의 삶을 고도의 상징적 표현 속에 담아내고 있다. 이 시는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을 시적 동기로 삼고 있다. 그 해 여름, 화자가 신문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그’가 `그 일’이 터진 지 얼마 후 죽었다. 거센 비바람 속에 거행된 `그’의 장례식 행렬에 사람들은 악착같이 매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다가 나타났으며, 망자의 혀가 거리에 넘쳐흘렀다. 그리고 또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 사건은 80년대 중·후반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정치적인 억압과 사회적 통제가 알게 모르게 강화되었던 당시, 권력에 반대하는 비판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시 속의 `그’와 없어졌다가 나타난 많은 사람들은 바로 그 세력들을 뜻한다. 그들은 저항의 결과 혹독한 고통을 당해야 했는데, 죽음과 일시적인 사라짐―투옥―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침묵을 지킨다. 세계의 폭력에 그들은 굴복해 버린 것이다. `안개’와 `흰 연기’는 진실을 은폐하는 부정적인 현실을, `책’과 `검은 잎’은 관념적인 지식과 죽음의 징후들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 역시 방관자의 한 사람이며, 먼지 낀 책을 읽는 무력한 지식인이었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고,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서 `먼 지방’과 `먼지의 방’의 발음―띄어쓰기의 차이만이 있는―과 의미―현실과 괴리된 공간으로서의―의 양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이 흥미롭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후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으며’,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놀란 자의 침묵 앞에’ 용기 있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비판하며, 죽은 `그 때문에’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한다.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나약한 방관자들은 부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중의 억압을 느끼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람들은 죽음과 폭력을 비굴한 침묵으로 방어하는 대신,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고 파편화되며 방향성을 상실한다. 택시 운전사와 그를 믿지 못하는 `나’,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와 나는 서로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이제 나는 그가 누구인지,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대답해야만 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모르지만, 예전의 `먼 지방/먼지의 방’이 아닌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가서 현실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다.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으로 암시되는 낯설고 황량하며 어두운 현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뜻하는 죽음과 굴복, 타협의 징후들이 끝없이 나를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박 수호박수호 시인의 당신을 위한 시한편 –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박수호 시인의 당신을 위한 시한편 –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

진한 남도사투리의 편지 사연에 푹 빠져 읽어가노라면 그 정서가 덩어리째 스며든다. 따로 사투리 해석이 없어도 오 난독의 염려가 별로 없지 싶으나 몇 가지 시인이 알려주는 대로 풀이하자면, 비민하것냐만→ 어련히 알아 하겠냐만, 징허긴 징헌갑다→ 심하긴 심한가보다, 너할코→ 너마저, 제금 나고→ 결혼해서 떠나고를 뜻한다. 그리고 이 시의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어 마저 소개한다.

“내가 있는 학교의 제자 중에 수녀가 한 사람 있었다. 몇 해 전 남도 답사길에 학생 몇이랑 그 수녀의 고향집을 들르게 되었는데 다 제금 나고 노모 한 분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생전에 남편이 꽃과 나무를 좋아해 집안은 물론 텃밭까지 꽃들이 혼자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흐드러져 있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린 넋두리로 씌어진 이 작품은 어머니 혼자서 빈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농촌생활의 피폐함과 쓸쓸함, 그리고 수녀가 되겠다는 딸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를 일시에 반전시키는 마지막의 처리가 인상적이다. 농촌의 어두운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복사꽃 저리 환하게’ 피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사와는 상관없이 자연은 어김없이 그 질서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는 구절 속에는 보고 싶은 딸과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

그리움은 보고픈 감정이 해결되지 않을 때의 묵힌 정서 상황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그리움이 별밭에 일렁이는 은하수라면 고향에 계시는 부모들의 도회로 나간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은 차라리 겨울 비탈에 선 애절한 나목이다. 부모 둥지 떠난 자식들의 고향 찾는 횟수가 고작해야 일 년에 두어 번. 아니면 그조차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너나없이 승용차가 있고 씽씽 KTX가 달린다한들 사정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 힘들게 고향을 찾아와서도 재깍 내빼고 튈 궁리만 앞선다. 처음부터 복귀할 만반의 태세를 갖춘 사람 같다. 그래야 잘 나가는 자식의 유세처럼 보인다. 더구나 올해는 추석을 끼고 3일간 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준다니 웬만큼 산다 싶은 이도 얼씨구나 찬스를 놓치지 않으려 시방 고속도로는 북새통이다.

우리 ‘엄니’들이 일찌감치 명절날 달력에 동그라미 치고 그리움을 예약하시는 마음에 비해 추석 한나절부터 서두르는 귀경행렬을 보면 도회 사는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참 야속하고 사무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해남 출신 이지엽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이 노모는 홀로지만 참으로 꿋꿋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을 혼자 보기 아깝다면서 짐짓 자식들에게 유혹의 추파를 보내지만 먹혀들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안다. 마침내 대한민국은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노인 홀로 가구는 늘고만 있다. 수녀가 되어 종신서원 받은 딸자식과 엄마의 특수한 관계와 사정은 별개로 치고, 지금 우리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부모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장차는 그 불균형이 더욱 심화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어머니 떠나시고서 지난 설에 이어 두 번째 맞는 명절이다. 어머니 안 계시는 추석을 지내고보니 어머니가 드리웠던 사랑의 그늘이 얼마나 넓은지를 새삼 깨달았다. 남 보기엔 무심한척 해도 혼자 있을 때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그리움은 어찌할 수 없다. 일반화시켜 말할 건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이 부모를 받들어줄 것이란 기대는 거의 무망하다. 노후의 경제적 안정 못지않게 정서적 안정과 자립이 필요한 때다. 도리 없다, 자식에 대한 기대는 팍팍 줄이고 그리움 또한 탈탈 털어내는 수밖에는.

박 수호박수호 시인의 당신을 위한 시한편 – ‘해남에서 온 편지’ 이지엽

박수호 시인의 당신을 위한 시한편-“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평생 시집 한 권 사서 읽지 않은 사람도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시의 제목을 ‘연탄재’라고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지 싶은 이 짧은 시는 시인이 90년대 초 제 스스로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가슴 깊숙이 넣어 두고 살 당시, 그러니까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의 작품이다. 안도현은 그의 시작노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첫 줄의 명령형과 끝줄의 의문형 어미가 참 당돌해 보이지요? 밥줄을 끊긴 자의 오기 혹은 각오가 이런 시를 만들어 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시의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따지듯이, 나무라듯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화자는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함부로 말할까 하고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시를 볼 때마다 제목을 고칩니다. ‘나에게 묻는다’라고요.”

지금은 연탄을 연료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소수다. 과거에 연탄은 겨울철 난방과 취사를 동시에 해결해 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우리나라에서 석탄을 처음 사용한 시기는 대략 19세기 말쯤으로 추정된다. 1896년 서울에서 석탄을 판매했다는 기록이 있다. 1960년대에는 도시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 연탄을 연료로 사용하였고 집집마다 아궁이와 굴뚝이 있었다. 사실상 1970년대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대부분 아파트도 연탄으로 보일러가 가동되었다.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늘 조바심을 쳤다. 탄이 거의 타고 화력이 약해질 때를 맞추어 갈아줘야 하는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밤중에도 잠을 설쳐가며 연탄불을 돌봐야 했으며, 만약 타이밍을 놓쳐 불을 꺼뜨리면 정말 큰일이어서 이웃에 밑불을 구하러 다니거나 착화탄을 사다가 온통 연기를 피우는 수선을 떨어야 했다.

‘너에게 묻는다’는 3행에 불과한 짧은 시행 속에서 인정이 메말라 버린 현대인들에게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작품이다. 시의 청자 ‘너’는 특정한 인물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한없는 애정을 보였을지언정, 타인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온정의 손길 한 번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연탄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눈 후에, 재로 변해 버린 존재이다. ‘너에게 묻는다’는 명령문과 의문문의 문장을 통해 나눔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연탄재’와 이기적인 현대인들의 대비를 통해, 인정이 메말라 버린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현대인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시이다.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 이 여인을 돌로 쳐라”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바라새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의 어법으로 시인은 우리들 위선의 무리에게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골고루 묻고 있다. 시인의 말마따나 각자 알아서 스스로에 대한 물음으로 고쳐 들으면 된다. 우리 가운데도 마치 의인인 것처럼 ‘연탄재’ 함부로 걷어차는 사람이 있다. 얼핏 용기 있는 자의 강단 있는 행동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발길질은 아무것에나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다. 시인은 더는 쓸모없는 연탄재에서 단박에 사랑의 극치를 읽어내었다.

차갑게 식어버리고 볼품없이 허옇게 꺼진 연탄재이지만 그래도 한 때 불이 활활 타오를 때는 그 누구에게 뜨거운 불덩이였다. 자신의 몸을 다 태우도록 주위를 따뜻하게 만들었던 연탄이였다. 재는 길거리에 버려져 많은 사람의 발길에 차이기도 하였으나 한겨울에는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길에 깔리기도 하였고 비가 내린 후에는 물웅덩이를 메꾸어 길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편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 자체가 바뀌기를 바라지만 진짜로 바뀌어야 할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아닐지 살펴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이런 물음을 던져 볼 일이다.

‘나는 그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박 수호박수호 시인의 당신을 위한 시한편-“너에게 묻는다’ 안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