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용택

shinyt53

노년의 인생이야기를 만화로, 세상 아름다운 마음으로 다양한 가치들과 함께 펼쳐가고 있습니다. 미담, 경험, 생명의 가치 등 올바른 인성이 함께하는 안전한 세상으로... shinyt53@cartoonfellow.org

옥구슬로 꿰어 준 카툰캠퍼스의 만저봐 세상

2018년 무술년도 저물고 2019년 기해년이 밝았다.

매사 주어진 일에 몰입하다보면 시간은 수없이 흘러가는데 이 중에 카툰 캠퍼스의 <만저봐>를 잡았다.

카툰캠퍼스!!

2016년 2월에 시작되었다. 만화로 그려내는 <만화저널세상을 봐>는 어느덧 3주년을 넘었다. 처음엔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 보니 신기한 작품들을 많이 맛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연습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도중에는 험난 풍파까지 만나 헤매다 뒤집혀져 있을 때는 오히려 안아주며 감싸주던 만저봐 식구들!! 가족들이 끝없이 나만 바라볼 때도 재충전할 기회와 의지를 불어주곤 했었다.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 놓지 못하는 끈임을 알면서도 헛소리할 땐 성실과 인내라는 명목으로 감싸주고 위로해주던 곳이었다.

더욱이 사진찍기 좋아하는 낭자에게 만끽의 즐거움과 구슬까지 꿰어 주고도 모자라 선물로 챙겨주신 책자들. 혹여나 구겨질세라 조심조심 다루며 책꽂이에 만저봐의 작품들을 꽂아놓노라면 칸칸이 늘어날 때의 뿌듯함은 나만이 즐기는 소소한 행복이리라.

매번 컴퓨터나 외장에서 잠자고 있을 법한 사진이나 기타 기억들.

다시 생각하고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끈기로 만들어진 작품은 염실장의 기술이 아니면 그 누가 해주리오. 갈수록 캠퍼스가 매력적인 장소와 소중한 인재들임을 나만 느껴서는 안 되겠단 생각마저 든다.

 

아낌없이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카툰 캠퍼스와 만저봐 식구들.

소소한 만남으로 맘 뜻이 모아져 더 큰 소망이 이뤄지길 빌어본다.

어려울수록 본심을 알 수 있듯이 어려움이 닥칠 때 서로가 아우르며 함께하는 곳이라 앞으로도 좋은 이들만 이길 살짝 욕심내어 본다.

만나면 좋고, 헤어지면 가고 싶은 이곳 카툰 캠퍼스와 우리들.

올해는 일 년이 한 달처럼 휘리릭 지나갔고, 좋은 결과도 얻었듯이

2019년 기해년에도 이곳에서 더 많은 목표달성의 결과물이 쏟아지길 기대해 본다.

 

그동안 못했던 부분을 새해에는 꼬옥 채워가며 열심히 노력한다면

황금돼지의 누런 복들이 우르르 굴러 들어올 것으로 믿는다.

신 용택옥구슬로 꿰어 준 카툰캠퍼스의 만저봐 세상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안녕? 요즘 낭자는 어떻게 살고 있니? 살아는 있는 거야?

그때가 며칠 남지 않은 서른 즈음에 막차 탄 것 같은데, 벌써 스무고개를 넘고 넘었네. 살다보니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하듯이, 살아보니 마음 편한 것이 제일 좋더라는 말이 귀에 쏘옥 들어오니 내 너무 힘들었나보다.

맏이라는 자리가 그리 클 줄도 모르고, 그저 열심히 하다보면 따라줄 것이고,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건만 인간의 오묘한 마음은 한길임에도 알 수 없음을 느꼈지. 특히 가까울수록, 알수록 더하고, 궂은일이 생겨 힘들수록 더 하다고 느꼈다네. 혹시나 내 발등에 떨어질까 우려하는 마음은 지나보니 알겠더라. 그때 마음은, 그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역시 차이가 확연히 있음을 느꼈지.

뭘 바라보고 한 것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누가 뭐래도 내 길만 가다보니 지금 돌이켜보면 몸은 지쳐 쓰러지고 힘들었지만, 맘 편하고, 나를 지지해 주는 이가 있다면 절반은 성공이지? 각종 아부와 아첨과 술수를 등지고도 맘속의 굳건한 지지자가 많다면 그래도 낭자는 잘 살았으니 만족했으면 좋겠어. 방금 생각에 모교장샘이 하신 말씀 중 인생 참 잘살았다는 말씀이 떠오르네. 골고루 알맞게 균등하게 잘 살았다며 이런 예는 드물다고 하시는 과찬의 말씀이 알면서도 어깨가 으쓱은 해지는군.

그 만족감이 알게 모르게 지원군 되어 이어지는 경로당과 이곳 생활이 좋다.
갈수록 새록새록 다른 모습들로 채워주고 채워가는 상생의 길이 또 다른 삶으로 돼가고 있지.

그동안 마음 아픈 일 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듯 각종 험한 폭언과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잘 견뎌낸 낭자는 그동안 고생 참 많이 했다

세월이 그대를 아프게 하고 속일지라도 그대는 노여워말라는 문장들처럼
귀담아 듣지도 말고 근처 가까이도, 얼씬도 하지 말라던 부모님 말씀처럼

다가오는 황금돼지해에는 하늘아래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맑은 하늘처럼, 좋은 곳에서 좋은이들 만나 마음에 굵고 진하게 난 상처자국은 치유됨과 동시에 사라지길 두 손 모아 염원할게.


아울러 새롭게 펼친 도화지에 앞으로의 희망찬 그림들만을 그려서 재미가 솔솔 나는 나날이길 바래. 험한 세상의 다리는 이제 그만 놓자.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 존 러스킨

신 용택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인문路드 – 수주 변영로와 그의 형제들

노랗게 물들어가는 들녘을 바라본다. 청명하다는 높고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토끼구름 애기구름마냥 두둥실 흘러 다닌다.

가을이다. 이맘때면 매번 찾아나서는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의 내고장 알기 현장체험학습. 그러나 이번엔 카툰캠퍼스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어슬렁 프로젝트인 부천인문로드’로 고리울 강상골의 밀양 변씨 일가를 찾았다.

고리울 강상골은 부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지로,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고리울에서 ‘고’자를 따고 강상골에서 ‘강’을 따서 고강동이라 부른다. 특히 밀양 변씨 집성촌으로 100년이 넘는 가택이 있고, 뒷 언덕길의 따라 올라서면 부천의 향토유적 제1호 <공장공 변종인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부천에는 신도비가 제1호~4호까지 있다)

수주(樹州)는 부천의 고려 때 부천의 행정명칭으로 나무 수(樹)자에 고을 주(州)로 ‘나무가 많은 고을’로 변영로 시인의 호 수주도 여기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수주의 형제는 삼형제로 맏형인 산강 변영만은 한학자이며, 법률가로, 일석 변영태는 둘째형으로 국무총리와 교수를 역임했다고 한다. 이들을 삼변이라고 하는데 당송 8대가인 소동파 소식 집안의 삼소(三蘇)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삼소란, 소식의 아버지 소순, 그리고 소동파의 소식의 아우인 소철이 모두 문장이 뛰어났기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들 중 막내인 수주 변영로의 시비는 삼변 묘소 아래에 세워져 있고 푯돌은 50미터 전방에 세워져 있다.

수주 변영로(卞營魯: 1898~1961)는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다. 아호는 수주(樹州)로 정상(鼎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다.

수주 변영로는 어렸을 때 이름은 영복(營福)이었다. 12세 때 중앙학교를 중퇴하고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San Jose)에 대학에서 수학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활동시작은 1918년 청춘에서 영시로 <코스모스>를 발표하면서이고,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 <폐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꿈 많은 나에게><나의 꿈은>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1922년에는 <신생활(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하는데 제1기는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로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실제(失題)><사벽송(四壁頌>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벽(南宮壁)의 유고 일문시(日文時)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時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 서울시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했다.

– (부천시의역사와문화유적 참고)

1996년에 12월에는 ‘문학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 고장의 큰 인물로 그를 기리기 위해 중앙공원에 <논개>를 새긴 시비를 건립하였고, 다음해는 고향집 앞에 푯돌을 세웠다. 1998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고강동 묘소 앞에 그를 기리는 묘비를 세웠고, 2001년 10월엔 수주로에 그의 동상도 세워 오가는 이들이 우리 문단의 큰 별을 자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소재지: 고강동 11-26번지)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娥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  시 변영로 / 카툰 이현정 / 낭독 이현정

강상골 향나무 
2018년 10월 26일에는 시비 재건립 차원에서 재막식 행사를 한다고 한다. 

이전의 가택이나 시비는 재정비 된 추후의 변화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 용택인문路드 – 수주 변영로와 그의 형제들

수도산 아랫마을 신家네 아침풍경

수도산 아랫마을 아침풍경

21세기 세계화시대에 살면서 6.70년대 얘기를 한다면, 먼 옛날 고리짝얘기로만 들릴 수 있을까. 그리운 시절, 내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수도산아래 보금자리. 그 산 아래를 중심으로 나지막한 산들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둘러싸여 조용했던 골짜기로 기억나는 나의 고향 청수동 안동네 청당골

또한 산자락에 위치한 상수도가 있어 언제나 콸콸 흘러 내려오는 시원한물로 매년 가뭄을 모르고 살았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로 우리오남매가 한 고향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봄이었을까?

그때는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시대로 잘살아보자고 외치던 시대로, 6시가 다가오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아침 방송이 있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들려~ 하고 물으시는 목소리까지, 마을이장님의 하루일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곧이어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변함없이~또~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아 ~이~ 소리~, 또 그 노랫소리가 단잠을 깨워버린다.

비몽사몽 잠결에 시끄러움 속에서도 일어는 나야는데 하며 생각 뿐, 몸과 마음은 귀찮음을 연이어 느끼며 뒹굴뒹굴할 때 빨리 일어나라는 소리도 뒷전이다.

이런저런 소리도 들릴만한데 귀담아 듣지 않는 나와 동생들, 한 이불속에서 꼬물꼬물 거린다, 일어나라는 소리와 자겠다는 소리로 말씨름하며 끌고 당기는 모습은 마치 이불속 전쟁 같았다. 그때 부엌 쪽에서 불호령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반면에 동생들의 이런 모습에 담당 언니는 구세주 엄마로 인해 한시름 덜었다는 엷은 미소는 보지 않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엄마의 불호령 때문인지 갑자기 조용해지며 맡은바 충실하려는 우리 오남매들, 맏이인 언니는 이불개기와 요강비우기, (참고로 이전엔 둥그런 요강이 있었는데 밤새동안 남자는 무릎 꿇고 쉬하고, 여자는 요강에 앉아서 쉬했다. 온 식구가 다 볼일을 봤어도 누구도 냄새난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이런 풍경이라면 에쿠쿠 상상에 맡겨야겠다), 바로 위 오빠는 마당 쓸기와 불 때기로 일명 불 지피기였다. 아침은 엄마가 밥하면서 하셨고, 언제나 저녁 5시면 어김없이 놀다가도 들어와서 불을 때야했던 우리집만의 규율, 오빠는 불을 지피기전에 아궁이에 쌓인 재를 삼태기에 담아 퍼내야했다. 지금 내 아들이 이런 상태라면 과연 가능할까? 세 번째인 나는 늘 방청소와 설거지 담당. 방청소야 빗자루 슬슬 쓸고 물에 걸레 담갔다 쓱쓱 닦아내면 되었지만, 설거지는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참 많았다. 설거지를 시키면 화풀이는 언제나 말 못하는 그릇들 이었다. 툭! 툭! 탁! 탁! 덜거덕 거리며 설거지를 하노라면 엄마는 늘 걱정되어 그릇 다 깨지겠다고 야단치시며 싫으면 하지 말라고 까지 하신다. 그땐 하지말라는 소리에 스르르 화가 가라앉는걸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못 말리는 고집 센 둘째딸 이었나보다. 끝으로 내 동생은 룰랄라~

 

그중에 제일 느긋한 분은 바로 우리가 존경하는 아버지.

조용하시다. 큰소리도 없다. 늘 조용조용 하시다.

만저봐의 어슬렁 처럼 이른 새벽부터 동네 한 바퀴를 휘이익 돌고 오신 아버지는 엄마의 식사시간 맞춤도 제때에 따~악이었다.

아마도 무겁지만 둥그런 은색시계가 틈틈이 알려준 덕분도 한 몫은 했으리라. 틈틈이 모아 마련한, 정성이 담긴 엄마의 소중한 선물, 아버지는 아시리라.

드디어 대문 안을 들어오며 우리의 이 광경을 목격하신 아버지는

“아 이눔~들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네한바퀴 돌고 오면, 밥맛이 얼마나 좋은데 아직도 잠만 자고 있어”

하시며 엄마의 불호령에 놀란 우리들의 맘을 달래려고 큰소리를 치신다.

비록 큰소리는 났지만, 따스한 정이 넘치는 아버지라 우리는 늘 평온하게 늘 하던 대로 각자 자기자리에 앉아 일상생활의 아침을 맞는다.

따로 같이 라는 말이 있었다.

각자 정해준 엄마의 준칙, 참 많다. 우선 자리배치부터 일곱 식구 숟가락과 젓가락, 밥그릇까지 모두가 정해져 있는 우리 집만의 규율과 책임과 의무랄까.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엄마였는데 준칙은 엄했다.

그리고 오순도순 식사하며 빼놓을 수 없는 건

아버지의 남은 밥, 아니 우리를 위해 남겨진 노란 계란 비빔밥이었다.

금방 지은 밥으로, 한 주걱 먼저 살짝 푼 밥공기에 계란 한 개를 톡 깨서 놓은 다음 다시 따끈한 밥을 그 위에 덮어 뚜껑을 닫는다. 아버지는 그 밥을 간장을 넣고 비벼 드시다 먹고 싶어 하는 우리들 눈치에 배부름을 핑계로 남겨주신 그 밥은 서로가 먹고 싶어 하는 쟁탈전, 어디서도 먹을 수 없는 꿀맛이었다. 그때는 쌀보다는 꽁보리밥이 더 많았으니 흰 쌀밥으로 지은 밥에 노랗게 물든 계란밥은 군침을 더더욱 자극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기상부터 아침 식사까지 우리 집만의 풍경은 다시 그려봐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그 추억이 아름답고 소중해서 난 참으로 행복하고 든든하다.

신 용택수도산 아랫마을 신家네 아침풍경

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

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배움은 평생교육이라 했다.

2006년 지역사회에서 <내 고장 알기>로 시작했던 문화체험활동에 이어

올해 꽃피는 춘삼월에 새맘 새 뜻으로 알차게 준비한 카툰캠퍼스 <만저봐>만의 성북동 프로젝트, 이들이 야심차게 서울 한복판을 누비고 다녔다.

 

어슬렁어슬렁~ 성북동 문화체험

언뜻 생각하면 한가로워 보이고, 여유롭게 다녔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과연 그럴까.

 

서울 한복판 광화문에 모여 있으니 주변의 온통 건물과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걸 보니 대환영인가 보다. 출발하기 전, 이원영 이사님, 일명 이이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광화문 명성황후 조난지 신무문 팔판정육점 말바위안내소

삼청공원 등산길 북정마을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이태준생가 길상사

여러분~ 오늘 코스는 앱에 올려놨으니 설명을 참고하여 보시면 됩니데이 ~

 

“건너편에 저기 보이시져. 청계천 길이거덩여. 그리고 여기 쭈욱 내려가믄 남대문 나오는 것 아시고, 서울역, 한강대교 나오는 거 아시고 , 자 이 건물 있잖아여. 이거 여기가 몇 번지게~여. 종로구 1번지, 여기가 종로구에 생긴 첫 건물이라 해서 종로구 1번집니다. 여기가 나중에 도로가 개편되면서 도로주소로 바뀌었지만 여기는 끝까지 종로구 1번지예요. 교보에서 이것만큼은 지켜야겠다고 하는데 교보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시고 자 이동 하겠습니데이.”

가는 도중에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기자회견 하는 모습과

법인권사회연구소 주관으로 걸린 현수막 <평화의 소녀상> 플래카드도 보인다.

“저 위는 광화문을 찍을 때 가장 좋은 장소로 개방하지 않습니데이. 예전에는 불허했지만 지금은 허가되어 사진촬영도 가능하다고 합니데이. 그리고 이 도로 주변은 예전에는 온갖 관공서로 되어 있었어여. 지금은 대로 안에 언론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여.”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경상도 언어라서 설명을 다는 귀담지 못해 아쉽다.

 

광화문에 다다르니 한복 입은 모습들이 자주 눈에 보인다. 잠시 멈췄다.

선왕조 도읍이었던 서울은 한나라의 수도로 4개의 산, 4대문과 4소성으로 이루고 있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 등이 있고, 서울의 진산은 북한산이다. 서울의 산 성곽은 군사목적이 아니고 동네 담벼락 같고, 군사적 요소로는 북한산과 남한산이며, 삼각산은 북한산 자체가 삼각산이다. 그리고 인왕산코스는 혜화동까지는 성곽 길로 되어 있고, 서울 성곽길 중에 청와대 뒷편은 3시 이전에 가야 출입이 가능하며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조선을 설립한 이성계는 도읍지 한양에 4개의 대문을 세우고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고 도읍의 중앙에는 보신각(普信閣)을 세워 도읍의 기본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4개의 소문은 북문과 동문 사이에 혜화문, 동문과 남문 사이에 광희문, 남문과 서문 사이에 소의문, 서문과 북문 사이에 창의문을 두었다.

 

경복궁에 들어서며 나무가 별로 없는 이유를 묻는다.

자객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며, 지붕에 뭣이 놓여있느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진다.

우리나라 궁에는 문이 2개, 중국은 3개로 차이점은 폐하와 황제로, 중국은 벽돌인 반면 우리나라는 돌과 화강암이 다르다고 했다. 인왕산 북한산도 돌덩이가 많고 성북동, 혜화동도 1970년대에는 주로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경복궁!!!

조선시대 건물로 사적 제 117호인 경복궁은 종로구 1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임금이 살던 궁과 나라의 대신들이 일을 의논하던 건물로 태조 4(1395)에 종묘 사직단과 함께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 때에 불타 273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쇄국정책을 펼치던 대원군이 7년여의 무리한 공사 끝에 다시 지어졌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다는 구실로 근정전 남쪽 전각들이 수난을 겪거나 철거당해 10여 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궐이라고도 불리었다.

 

또 별궁으로, 와룡동에 위치한 창덕궁(155)은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5(1405)에 지어졌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자 3백여 년 간 조선왕실의 궁궐로 쓰이면서 또 다른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국보인 인정전과 보물인 돈화문, 선정전, 대조전 등이 있고 천연기념물인 700년된 향나무와 600년 된 다래나무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궁궐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궁으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드디어 아픔의 역사가 남아 있는 건청궁에 들어섰다.

조선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세웠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일본세력을 배척하자 일본공사 미우라가 주동이 되어 고종 32년(1895) 10월 8일(음력 8월20일)에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사건으로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곤녕합으로 명성황후가 1884년부터 1895년까지 침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잠시 아픔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신무문(神武門)!!! 청와대가 바로 보인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출입하는 문으로 정문격인 광화문이 있다면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이 있다. 현재는 광화문과 신무문을 통해서 경복궁을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신무문은 청와대 정문과 연결되는 문으로 최근에는 개방되고 있다. 공터가 많은 이유를 묻자 이전에는 수도방위사령부, 일명 수방사로 지금은 과천 남태령 고개로 이전했고 참고로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수년전 동생이 수방사에서 군복무를 해서인지 느낌이 달랐다)

(청와대 정문을 뒤로하고 삼청공원 등산길로 이동하며 해설은 다시 시작된다).

횡단보도는 아무나 못 건너가며 직원들만 다니는 곳

고종과 김구가 연결된 백범일지를 읽어보라며 역사가 얽혀 있다고 했다.

 

 

 

삼청공원 등산길로 올라서니 이제 부터는 체력의 안배가 필요했다. 극기!! 그동안 나를 이기지 못해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 극기로 그동안의 어려움을 이겨낼 필요가 있었다.

<삼청공원 등산길-북정마을 사진>

이 코스와 곁들어서 알아야 할 것은

청계천과 혜화동인데 청계천은 광화문에서 우측으로 쭈욱 넘어가면 혜화동이 나오며 경복궁, 창경궁까지 나온다. 혜화동 로타리와 한성대교까지 나오고 한성대 입구부터 성북동이다. 성북동편에서 330번지 교보단지로 문화대기업이 모두 있다고 한다. 여운형이 암살당한 지역이기도 하다.

북정마을을 거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에 머물렀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오셔요 중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 -심우장에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잔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남향하면 바로 돌집*을 바라보는 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다.“ -돌집: 조선총독부

“철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 -벽초 홍명희-”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심우장-

“나는 돌에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

각 민족의 독립 자결은 자존성(自存性)의 본능이요, 세계의 대세이며, 하늘이 찬동하는 바로서 전 인류의 앞날에 올 행복의 근원이다.

누가 이를 억제하고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중

 

학창시절 꼭 외워야 했던 <님의 침묵>중의 한 구절은 생활 속에서도 읇조리던 한마디이기도 했다.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었던 월북작가 이태준의 생가를 찾았다. 상허 이태준이(1933년~ 1946년)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하고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 피는 정원』,『황진이』 『왕자 호동』 등 주옥같은 작품을 저술하였기에, 이곳을 이태준 문학의 산실이라 부른다.

잠시 고택을 둘러본 후 다음 행선지 길상사로 향해 출발했다.

 

이곳을 찾아 가는데 아슬아슬한 옛날 골목들이 많아 마치 미로 찾는 느낌이고, 한참을 지나서야 끄트머리에 길상사가 있었다.

북악산각, 대원각. 삼청각, 청원각은 요정으로 이중에 대원각이 길상사라고 한다.

1997년 길상사를 창건한 이곳은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법정스님 유골을 모신 진영각이 있고,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김영한 여사가 보리심을 발하여 성북동의 대원각을 조건 없이 기증하였다고 한다.

공덕주 길상화 보살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아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7천여 평의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청하였고, 1997년 대원각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창건되는 아름다운 법석에서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 라는 불명을 받았다고 한다.

 

법정스님의 저서와 역서: <무소유>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화엄경> <숫타니파타) 등 다수

 

 

길상사를 끝으로 둘러본 뒤 터널을 통해 원 위치에 도착한 만저봐 일행은

19254걸음 걷기+달리기 거리 11.9키로미더를 걸었다는 만보기를 보여주는 카툰캠퍼스 조희윤 대표의 한마디에 모두가 힘은 들었지만 알찬 첫 문화탐방을 자축하며 다음 성공을 위해 파이팅을 외쳤다.

고구마작가님,  만저봐와 함께한 생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신 용택톡톡 튀는 성북동의 문화해설 만저봐-이이사의 독특한 문화탐방, 체력과 함께하다

1학년 내 동생

1학년 내 동생

날씨가 오락가락, 바람도 세차게 분다. 바람결에 저 멀리 휩쓸려 등 떠밀려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춥다가 더워지고, 날려가고 휩쓸리고. 그래도 썰렁하니 새봄이 다가오는 길목인 만큼 추워도 견딜만하다.

봄! 봄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내 동생 초등학교 입학하던 시기이다.

70년대라 그 시대에는 ‘국민학교’로, 소학교를 대신하는 교육기관이다. 지금은 1996년 민족정기회복차원에서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여 부른다.

일본에서 1941년의 국민학교령에 의해 성립한 그 때까지의 소학교를 대신하는 초등교육기관이다. 전쟁시기의 국민동원을 지지하는 장치로서 기능하였다. 국가주의와의 단단한 연계를 가짐과 동시에 교과의 통합화와 저학년의 이수과(理數科)의 도입 등 1910년대 이후의 신교육 운동이 제도화된다는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주목된다. 또한 의무교육 기간의 2년 연장이 결정(현실은 그렇지 않음)되는 등 전후(戰後)의 6ㆍ3제와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강점기에 1941년 일본왕의 칙령으로 ‘황국신민의 학교’라는 의미인 ‘국민학교’라는 용어를, 1945년 8ㆍ15광복 이후에도 계속 사용해 오다가, 1996년

민족정기회복차원에서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했다.

[네이버 지식백과]국민학교 [國民學校]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동생과는 다섯 살 차이가 난다. 당시 나는 고학년의 누나였고, 동생은 내가 3학년때 담임이셨던 김연순 선생님이 담임되어 또다시 인연을 맺는다. 이에 엄마는 나와 막내아들의 담임이라는 소식에 보통과 다르게 5남매 중 유일하게 막내 반에 기부한 물건이 있었다.

금붕어 모양의 둥그런 유리어항과 칠판 지우개

밤늦게 누가 볼세라 캄캄한 학교운동장에서 힘겹게 배운 자전거 실력을 토대로, 짐받이에 두터운 방석 깔고 혹여나 어항이 깨질세라 살살 밧줄로 옭아 붙들어 매고는 조심조심 반으로 직배송한 그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소매로 스윽 훔치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선생님 옆자리에 놓인 유리어항

네모반듯하게 건축한 단층의 새로운 교실에 담임선생님 옆자리에 놓인 유리어항, 주홍빛 금붕어가 그 속에서 활발하게 헤엄치는 모습은 지금도 맘속에 남아 노닌다. 어릴 적, 홍역으로 곤욕을 치룬 막내가 건강하게 자라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으니 그 기분이야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리라.

취학 통지서를 받고 입학식에 들고 갈 책가방을 챙기는 마음은 또 어땠을까

책가방 안에는 동네 문구점에서 구입한 필통과 줄 없는 종합장과 색연필 두 자루(보통 빨강과 파랑색이다)가 전부다. 그리고 입학식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는 일도 흔했다. 대부분 가족구성원은 5,6남매, 7,8남매가 기본으로 중년의 부모님은 새벽부터 가정생계를 위해 농사일에 바빴기 때문이다.

드디어 운동장 한가운데 줄지어 선 입학식

할아버지처럼 인자하신 교장선생님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모습도 1학년이다.

왼쪽 가슴에는 직사각형으로 길쭉하게 접은 손수건 위에 명찰과 리본을 옷핀으로 고정시켜 달았다. 가슴에 달았던 손수건은 코흘리개가 많던 시절에 바로 닦아내는 용도로도 사용했다.

바로 내동생도 이러한 코흘리개 경험이 있다

어느 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숨 가쁘게 달려와 “학교 다녀왔습니다.” 급히 인사를 하더니 자랑할게 있다고 했다. 혹시나 담임이셨기에 어떤 일인지 기대감으로 귀를 쫑긋했는데~ 아뿔사~ 엄마랑 난 웃음이 세차게 터져 나와 한참을 참고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흔히 황금색이나 누렁 색에 비유하는 말로 부자 된다는 속말이 있었다. 아마 그때 동생은 누렁코를 흘렸나보다. 이에 선생님이 자주 쓰던 속말로 부자 되겠다고 건넸는데 뜻을 모른 동생은 관심표현으로 생각해 정신없이 달려와 자랑을 했던 것이다.

그 이후 동생은 학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신 용택1학년 내 동생

이 노래 찡허지예~

우아~ 이 노래 신곡인데,

우리 배워봅시다 찡~허지예

자~자~ 제목은 <백년의 길>입니다. 시~~작~

 

어느 누가 인생을 꺼져가는 등불이라 했나~

아직도 내 청춘은 그대로인데 백년 가는 이 길에

무정한 세월에 내 청춘 모두 다 쓰고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세월에 밀리는데

잃어버린 내 청춘은 석양에 노을만 붉게 타누나.

 

 

노래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찡~하다.

가사처럼 인생이 꺼져가는 등불처럼, 내 청춘 다 쓰고, 흘러간 청춘을 그리며 사는 게 과연 우리네 인생일까?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주된 농업 일을 하면서 애환을 달래던 모습을 많이 봐 왔다.

주로 아낙들이 고된 삶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즐겨 부르던 노래들~

그 옛날 노래들을 이곳 경로당에서 다시 들을 수 있어 만감이 새롭다.

 

아주 어릴 때 비 오는 날,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 들으며 터진 옷가지를 꿰매며 부르던 엄마의 노래들.

그 품에서 자장가처럼 들었던 주옥같은 그 노래를 다시 듣게 된다면 한마디로 기분은 짱이렷다.

 

가끔은 이미자의 노래로, 가끔은 조미미의 노래로,

가끔은 색다른 신곡까지 부른다 하면 그 기분이야말로 노래방이 따로 없다.

언제나 라이브로, 이래서 인기 만점 경로당이 아니던가.

건강 100세 시대, 평균나이 70~80세가 훌쩍 뛰어넘는 연령이지만, 모진세월 서로간의 맘들을 충분히 아는바 위로하며 작은 네모 동양화로 짝 맞춰 내기 한다.

오늘은 착착 붙어서 한곡 조 뽑고, 다른 날은 착착 안 붙어서 에라이~ 한곡 조 다시 뽑는다.

이 모습은 수십 년 지난날과 어쩌면 이리도 똑같은지~. 좋아도 흥이요~ 슬퍼도 흥~이다.

 

즐거운 하루 다시 보내며 내일도 락(樂을) 찾는 이곳은 거점 둥지방,

셩님~ 아우로 감싸며 내 나이가 어때서 를 씩씩하게 부르며,

온몸을 샤~르~르 한바퀴 휘둘러대니 주변에 만발한 웃음꽃들~ 화들짝 피는구나.

앗~샤~ 인생~ 뭐~ 별거 있다더냐 즐기며 사는 거지~

신 용택이 노래 찡허지예~

명절이 다가오는 풍경

새 하얀 눈이 내 키 만큼 높이 쌓인 적이 있었다면 그때 내 나이는 몇 살쯤 되었을까?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어린 시절이었다.

 

명절이라~ 특히 설날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이날은 으례 목욕과 단정하게 머리 자르기. 세배, 그리고 길다란 가래떡 만들어 온 방에 채 썬 떡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이웃집 굴뚝에선 하이얀 연기가 뭉개 구름마냥 모락모락 날아오를 때

유독 바빠지는 엄마의 손길, 붉은 팥죽색의 둥그런 다라이도 여러 개가 보인다.

얕으막한 통에는 가래떡을 만들, 쌀을 씻어 불려놓을 통이요, 또 다른 높다란 통은 우리 오남매 중 세 명이 함께 들어갈 목간통이었다. 나와 내동생.

 

높이가 제법 높았던 목간통은 가마솥에 군불을 때서 준비한 약간 뜨거웠던 물로, 추울까봐 방 한가운데 들여다 놓고는 세숫대야로 여러 번 들락날락 부었다. 그리고 나와 내 동생은 한통에 들어가 엄마의 손길, 차례를 기다리며 온몸을 맡겨야 했다.

아파도 참아야 하는, 아프다고 소리칠 땐 참으라는 엄마의 엄포에 우린 끽소리 못하고 대기하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또한 엄마의 이발 솜씨는 동네에서 인정한 손재주 능한 한 사람이었다.

이웃집 이발사 할아버지의 이발 기술을 기웃하며 배운 기술로, 우리는 엄마의 아바타로 비뚤기는 하지만 단발과 상고머리는 엄마의 작품.

 

세월이 흘러 가끔 흉내라도 내려고 내 자식에게 가위질을 해 봤으나, 아니 이렇게 어려울 수가 미끌미끌, 미끄러워 자르기가 힘들었다. 재능 많은 울 엄마는 어찌 오남매를 이리 키우셨을까~

 

그래서 울 엄마는 목욕비와 이발비는 무일푼, 그래서 부자가 되었는가보다. 알뜰살뜰 맘부자.

 

반면에 울 아부지, 마찬가지 어둑어둑 할 때,

옥수수 말린 긴 푸대 자루를 들고 동네 어귀 아랫마을로 가신다.

마당이 있고 한쪽에는 둥그런, 길죽하고 길다란 통 바로 아래에 불을 때듯 살살 지핀다.

그 옆에는 촘촘한 그물망이 뻥소리와 함께 할 대기 망도 있고.

 

 

얼마간 불을 지폈을까~ 잠깐 옆으로 불을 빼더니 갑자기 뻥이요~ 툭! 하며 소리치는 아저씨!!

그러자 새하얀 연기가 하늘 향해 한웅큼 올라간다.

마치 선녀님, 도사님이 뻥하고 나타나듯 안개 자욱한 주변으로 순식간에 변해 버린다.

 

이 모든 사전 행사가 끝나고 나면 명절날, 우리 오남매는 나란히 세배를 다닌다.

윗마을 아랫마을 지정해주는 집이면 빠짐없이 모조리 다녀야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어른을 공경하고 인성을 중시하는 교육열이 높았던 우리 부모님

지금은 우리가 대를 이어 그 일을 이어가고 있지만 보고 싶다~

아~~ 울 엄마 아부지~여

신 용택명절이 다가오는 풍경

사람같은 개, 개같은 사람

왈왈~ 왈왈왈~ 왈~

밖이 차암 마니 요란스럽습니다. 현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계속 왕왕거리며 시끌벅적 떠듬 속에서도 그 집주인은 그림자 한 꼭지도 뵈지않습니다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궁금 하시죠~

다음 기회가 되면 찬찬히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 저희 집에 새 식구가 늘었습니다.

일명 강아쥐 새끼들이죠.

아 이눔 강아쥐 새끼들이 집안에 들어오는 순간, 서열상 상전이 바뀌었습죠.

모든 일상생활들이 이 강아쥐 새끼들로 하여금 뒤죽박죽, 범인은 바로 나, 나란 말입네다요. 나이기에 어쩔 수 없이 자책만 열심히 하고는 있습죠.

이 강아쥐 새끼들이 들어오게 된 동기는

아 글쎄 아주 큰 곰돌이만한 누렁개를 우연히 봤는데 지가 날 언제 봤다고 꽁지가 빠져라 흔들어댑디다.

움찔하는 내게 안아달라는지 앞다리를 번쩍 들어 내 가슴에 댑디다.

그리고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꼬리를 흔들어대는데 아 이눔이 물까봐 무서워 슬그머니 손 내밀어 엉덩이는 뒤로 쓰윽 빼고 만져 주었죠.

그럼에도 좋다고 흔들어대는데 정말 저 굵다란 꽁지가 빠질 것 같았어요.

이때부터 빠졌습니다. 쏘~옥~ 그 개새끼한테!!!

아 아니아니 밖에서 짖어 댄 그 개같은 개새끼가 아니라

내게 꽁지가 빠져라 흔들어대는 그 사람같은 개새끼한테.

암튼 오늘은 바빠서 다음시간에 만나지용~~ 안뇽~~~~

신 용택사람같은 개, 개같은 사람

출판만화 씬에서 1차로 선정한 젊은 작가 신지수(수신지)!!

출판만화 씬에서 1차로 선정한 젊은 작가 신지수(수신지)!!

제9회 대한민국창작만화공모전에서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라는 만화로 대상을 받은 작가 신지수, 그는 누구일까? 독립만화세상에서 신지수 작품의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라는 2011년 작품을 리뷰하기로 했다.
1980년생으로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주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렸다.

2011년 대한민국창작만화공모전에서 단편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대상을 수상하며 만화작품을 시작한다. 단편인 이 작품의 만화는 수업시간 선생님의 부재 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전개한 만화로 반 친구들의 여러 모습을 상세하게 그린 작품으로 일상의 일들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반장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질까?

학교생활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책임감과 의무감의 역할을 해야 하고 떠드는 자의 이름을 적어내야 하는 불편함도 있겠지만, 반대로 각자 떠드는 이야기 속에 직통 sos를 받아 만화로의 작품으로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나름 재미도 있었을 거란 느낌도 든다. 마치 강력 안테나를 이용해 이웃의 전파를 몽땅 당겨와 자연스레 엿듣는 즐김도 은근 있었을 것 같다.

이처럼 부정적인 면에서 떠드는 친구의 이름을 적어 보고하는 것은 반 친구들에게 적이 되어 버린다는 생각과 경쟁자의 열공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가의 편치 않는 마음도 전해진다..

결국 떠든 사람 이름을 묻지 않는 선생님, 자신이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 했다는 만족감보다는 시간 내내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서일까 ‘아… 공부하고 싶다’라는 외마디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회가 되면 들어보고 싶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2012년 <3그램>이 있다. 3그램은 떼어낸 난소의 무게라고 한다. 불과 3그램에 불과하지만, 20대 여성이 난소암 선고와 수술과 치료를 통해 겪어야 하는 마음의 무게는 그 보다도 훨씬 더 무겁다는 걸 은유적으로 알려주는 내용이다. 형식도 실험도 과하면 부담스럽지만 수위 적절하게 담아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고 하니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서 기회가 되면 이 책도 읽어봐야겠다. 또한 2016년 발간한 저자의 미대 시절이 고스란히 반영된 작품인 <스트리트 페인터>도 읽어봐야겠다. 미메시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두권의 책도 의미가 있을듯 하지만 저자가 처음 독립출판으로 출판한 <반장으로써의 책임과 의무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책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독립출판 책은 시간이 지나면 구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지금은 구할 수 없다는 점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3그램(미메시스 2012년 발행 178page) / 스트리트 페인터(미메시스 2016년 발행 532page)

신 용택출판만화 씬에서 1차로 선정한 젊은 작가 신지수(수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