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기자

오드리

만화, 저널, 시민, 공익, 진실, 전통시장, 청년, 변화, 노인, 장애인, 커피, 가을, 비, 사람, 그리고 부천~ 을 좋아하는 평범한 부천시민 noahne@cartoonfellow.org

4차원의 글쓰기 세상, 2018 만저봐

글을 쓴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쓴 글을 누군가에게 읽히기도 하고 어딘가에 게재한다는 것!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그렇다.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어딘가에 게재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읽힐 수도 있다.

새로운 사실을 알릴 수도 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만저봐!

만화 저널 세상을 봐!를 통하여 그렇다.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저봐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국경을 뛰어넘어서, 계절을 뛰어넘어서

직업을 뛰어넘어서, 주제와 권력을 뛰어넘어서

무엇이든 어떻게든

전하고 또 듣고 나눌수 있는 곳.

4차원의 글쓰기 세상이 바로 만저봐다!

 

만. 저. 봐!

만화저널 세상을 봐~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만저봐를 통하여

몇 개의 코너로 글을 썼다.

 

먼저, 오드리의 한술줍쇼!

라는 코너를 통하여 사람냄새나는 100명을 만나봐야지 결심하였다.

물론 1년안에 100명을 만날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는 지난 해 고작 10명도 못 만났다.

만나면 소중한 깨달음을 주었고

명확한 진리와 유쾌한 교훈을 주었으며

매우 감동적인 만남이었지만 소중한 시간을 자주 갖기나 쉽지는 않았다.

또, 별주는 오드리 [영화편]을 통하여 내가 좋아하는 영화,

거의 빠짐없이 보는 영화를

한 번 용감하게 맘대로 별을 주기로 했다.

글이 중간에 끊어졌다.

영화를 보는 것은 쉽지만 평가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평가하는 것은 쉽지만 공평하게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도 했다.

처음에 마음은 그냥 오드리의 입장에서 별을 맘껏 주자였지만

이것 저것 신경쓰이는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별주는 일은 참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일이다.

만저봐가 아니면 어디서 별을 줄 수 있으랴!

 

그래서 신나는 오드리의 별주기!

2018년 개봉영화편은 다음과 같다.

오드리의 별주기 2018 개봉영화편 순위

제목 흥미 감동 교훈 배우 기타 총점 별점
1위 그것만이 내 세상 5 5 5 5 5 25 5
2위 리틀 포레스트 5 5 4.5 5 5 24.5 4.9
3위 보헤미안랩소디 5 5 5 5 4.4 24.4 4.88
4위 국가부도의 날 5 5 5 5 4 24 4.8
5위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5 5 4.5 5 4 23.5 4.7
6위 변산 5 5 4 5 4 23 4.6
7위 맘마미아2 5 5 3 5 4.5 22.5 4.5
8위 명당 5 5 3 5 4.3 22.3 4.46
9위 신과함께 5 4 4 5 4 22 4.4
10위 월요일이 사라졌다 5 4 4 5 3.5 21.5 4.3
11위 서치 5 4 4 4 4 21 4.2
12위 공작 5 4 4 5 2.8 20.8 4.16
13위 성난황소 5 3 3 5 4.5 20.5 4.1
14위 완벽한타인 5 3 3.5 5 3.7 20.2 4.04
15위 쥬만지:새로운세계 5 4 4 4 3.1 20.1 4.02
16위 독전 5 4 3 5 3 20 4
17위 블랙팬서 5 4 3.5 4 3.3 19.8 3.96
18위 조선명탐정:흡혈괴마의 비밀 4 4 4 5 2.5 19.5 3.9
19위 궁합 4 4 3 5 3 19 3.8
20위 지금 만나러 갑니다 4 4 3 5 3 19 3.8
21위 탐정:리턴즈 4 3 3 4 2 16 3.2
21위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 5 4 3 4 2.9 18.9 3.78
22위 레드풀2 5 3 3 5 2 18 3.6

 

2018년을 보내며 돌아보건데,

만저봐는 과연 행운이다. 힐링이고 치유이다.

공감이고 소통이다. 고급정보마당이면서 공유의 도구이다.

 

결심하기는 2019년에는 좀 더 성실히 글을 쓰고 싶다.

과연!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오드리 기자4차원의 글쓰기 세상, 2018 만저봐

입영 편지

 입영 편지

‘대한민국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다 가는 군대~’ 라고 생각했다.

입영하는 날, 부대 강당에서 연병장으로 나타나는 순간까지도

십분만에 어떻게 된건지 군인처럼 걷고, 경례하고, 소리치는 씩씩한 모습에

기특하기만 했다.

그러나 잠시후 생활관 건물 뒤로 눈도 한번 못마주치고

앞만보며 군인처럼 걸으며 아들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나의 아들이 전쟁터에 나간 것마냥 어찌나 슬프고 안타깝던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날부터 매일 매 순간 아들생각을 했다.

눈물이 절로 났다.

생각속에서 ‘아..들..아~’에 ‘아’자만 불러도 철철 눈물이 고이고 줄줄 눈물이 났다.

 

크리스찬인 나는 매일 기도를 했다.

일단은 0주차인 일주일만에 옷상자가 와야지 사람이 오면 안된다는 주변 조언에 따라

아들이 잘 검사받고 잘 적응하도록 기도했다.

0주차가 끝나는 날 문자가 왔다.

5주후에 갈 자대가 정해졌다는 문자였다.

‘아니 벌써~ 정해졌구나’ 그리고 옷이 오겠구나.

일단 감사했다. 그리고 오늘부터 인터넷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좋은 소식에

더캠프 앱을 통하여 편지를 썼다.

 

폰 자판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보고싶구나,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잘 있니?’

마음에서 쓴 편지는 그 말만 100번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씩씩한 아들을 보낸 씩씩한 엄마로서 편지를 썼다.

 

‘잘하리라 믿는다 우리 아들~ 사랑한다.

다치지말고 아프지말고 훈련 잘 받고

14일 수료식날 만나자꾸나‘

 

 

 

 

 

드디어 옷상자가 왔다.

옷상자 안에 아들의 손편지가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어버이날 학교수업시간에 쓴 손편지나 카드이후

처음받는 아들의 손편지가 너무나 소중했다.

 

“제가 김치를 먹게될 줄 몰랐습니다…”라는 내용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아들은 김치를 안먹는다. 김치냄새도 싫어한다.

막 무친 겉저리 말고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던 아들이

김치를 먹는단다.

“14일 수료식에 안오셔도 됩니다. 만약 오신다면 맛집은 알아두었습니다.”

라는 내용에 온 가족은 빵 터졌다.

적당한 유머와 진심이 담겨있었다.

 

 

입영한 아들의 손편지 한 장이 지난 며칠 간 꽉 막혔던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나와 남편은 소중한 아들의 손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다보니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눈은 몹시 피곤했지만 마음은 보약을 먹은듯 쌩쌩했다.

 

온 가족은 아들의 손편지에 응답으로 각자 손편지를 썼다.

그리고 필요한 소소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서 택배를 보내면서

택배상자 안에 손편지를 넣었다.

 

나는 남편과 딸이 그렇게 편지를 잘 쓰는지 몰랐다.

진심이 물씬 담긴 편지내용에 또 눈물이 났다.

아들이 손편지에 담긴 진심을 읽고 힘이 나기를 바랬다.

 

 

 

아들에게 손편지가 또 왔다.

‘훈련병’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써있었다.

얼마나 고되고 서러운지를 알려주는 말이었다.

사회가 궁금하다고 써있었다.

일상적이었던 모든 것이 소중하고 궁금해진 것이다.

 

하늘에 별이 쏟아진다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함께 그 별들을 보자고 써있었다.

별들이 위로와 힘을 주었구나 싶었다.

 

편지 첫 줄마다 있는 “저는 잘 있습니다.”라는 말은

잘 있다는데 왜그리 마음이 절절이 아프고 눈물을 부르는걸까?

 

입영한 아들과 주고받은 손편지, 인터넷편지 5주차를 보내고

훈련병수료식을 하였다.

입영한 아들과 함께 온가족은 손편지 속에 가득담긴 ‘마음편지’를 주고받은만큼

촉촉하고 따스한 눈길과 손길로 서로를 안았다.

 

이제부터 진짜 사나이가 되려고 내일부터는 자대로 갈 아들이다.

이 뜨거운 사랑과 손편지가 2년을 채우고도 남을 듯 하다.

 

입영하는 날, 생활관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순간 나라가 싫었다.

잘 키워 놓은 내 아들을 갑자기 데려가다니 원망스러웠다.

오늘 훈련병 수료식, 참 조석으로 변하는게 사람맘이라지만 나는 나라에 감사했다.

아들을 ‘진짜 사나이’로 만들어 주고, 가족들의 숨은 정을 곁으로 들어내주고

온 가족이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더 돈독해지는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부디 남은 기간도 더욱 그러하자고 다짐하면서

오늘도 엄마인 나는 기도한다.

‘부디 다치지말고, 아프지말고, 좋은 사람들과 잘 지내게 해주세요!

건강하여 군인생활 잘 하고, 남은 인생에 힘이 되는 소중한 2년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수료식날 나는 평생의 소중한 보물이 하나 생겼다.

훈련기간 중 1회 PX를 이용할 수 있었던 아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산

‘한정판 카네이션브롯치’ 선물을 손수 달아주었다.

아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한정판 카네이션 브롯치’에 담겨져 있었다.

 

2018년  11월  14일

대한민국에 씩씩한 군인엄마가 된 오드리 기자

오드리 기자입영 편지

바람쐬듯 살련다

바.람.쐬.듯.살.련.다.

저녁을 먹고나서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시원하던 어느 날,

‘바람이나 쐬러 갈까’ 생각하고는 동네 생태하천을 걸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시처럼 마음에서 읽혀졌다.

바람쐬듯

오드리

바람쐬듯 살자꾸나

바람쐬듯 일하자꾸나

바람쐬듯 걷자꾸나

바람쐬듯 미소짓자꾸나

하하하~ 좀 유치한가? 그러나 참 좋은 시 아닌가.

바람을 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사전적의미가 이렇게 나왔다.

 

바람(을) 쐬다 :

  1. 기분 전환을 위하여 바깥이나 딴 곳을 거닐거나 다니다.

예) 공부를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1. 다른 곳의 분위기나 생활을 보고 듣고 하다.

예) 그는 외국 바람을 쐬기 위해 여권 신청을 했다.

또한 관련 어휘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단어가 있었다.

야망, 유행, 기운, 허풍, 공기, 기세 등등

우리는 흔히 바람 쐬기 좋은 날, 바람쐬기 좋은 곳, 바람쐬기 좋은 때 등

이런 말도 많이 쓰기도 한다.

아무튼 ‘바람을 쐰다’는 것은

좀 여유롭고 상쾌하고 기분전환을 주는 의미이다.

 

‘만약에 인생을 바람쐬듯 산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무언가 열정과 치열함과 최선이라는 단어와는 멀어지는 것 같다.

성공이라는 단어와도 거리가 있게 느껴진다.

바람쐬듯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어감에서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공이라는 것이 꼭 행복을 주는 건 아니다.

성공하고나서 그때서야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는 이들도 종종 보았다.

가령 가족이나 건강 등이 그러하다.

 

또한 내가 의미하는 바람쐬듯 산다는 것은

좀더 여유롭고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보겠다는 의미이다.

최근에 나는 비영리단체 일을 시작한지 2년쯤 되었다.

‘비영리’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이 비영리단체 일이란게 물질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비영리영역을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살아오면서 사람이 좋고, 일이 좋고, 사회적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고,

도우며 함께사는 것이 좋았던 나, 그리고 내가 했던 봉사나 단체 일들이

비영리영역이었던 것 같다.

내가 믿고 확신하는 기독교 또한 비영리영역이었다.

 

암튼 일로서는 초보자가 되어 비영리단체를 운영해보니

참 고맙고 힘이 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의예로 섭섭하게 하고 오히려 방해를 하는 이들도 만났다.

앞뒤없는 오해도 받고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를 일들도 겪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좁아지고 치열해지고 안간힘을 쓰고

각박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요즘이다.

사람이 살면서 불쾌하거나 억울하거나 하는 일을 당할 수는 있다.

예전에는 불쾌한 일도 너그럽게 이해하거나 쿨하게 잊어버리거나

의사전달하고 잊어주거나 했는데,

요즘은 왠지 그런 일들이 잊어버려지거나 용서되지않거나

두고두고 마음 한 켠에 두곤 한다.

 

가을 그리고 바람

그 속에서 다시 ‘나’ 그리고 소중한 ‘인생’을 제자리 놓아 보련다.

끙끙 앓지 말자.

등지지도 말자. 그러나 참지만도 말자.

넘 너그럽지도 말자. 넘 옹졸하지도 말자.

바람 쐬듯 살련다.

 

오드리 기자바람쐬듯 살련다

오드리의 한 술 줍쇼 – 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평소 지역에서 존경받고 있는 정인조 이사장님을 만났다.

어려운 마음과 기대 가득한 마음을 갖고 뵈었는데, 기업리더로서의 카리스마와 인

심 후한 옆집아저씨같은 다정함을 동시에 품고 계셨다.

부천희망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 직을 맞고 계신 정인조 이사장님은

한국지역재단 협의회 모금위원장 겸 이사로 계시면서 부천을 넘어

우리나라 전역에 지역재단을 세우고 선한 힘을 모으고 잘 사용하는데 앞장서고 계신 분이다.

오드리의 한 술 줍쇼는 사람여행이다.

어디한번 정.인.조 사람여행 떠나볼까요?

 

 

 

the 사람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성함은 정.인.조,  그럼 띠는 어떻게 되셔요?

 용띠예요~

 아하~ 그렇군요.  사시는 곳은 요?

 중동 은하마을이요.

 언제부터 사셨어요?

 심곡동 살다가 중동으로 93년인가 이사왔어요.

 네 그리고 이사장님, 교회 다니시죠? 어느 교회 다니셔요?

 처음 부천와서는 기장 부천교회 다녔어요.

기독교 장로회 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에요.

한국 기독교 장로회, 문익환 목사님을 배출한, 문익환 목사님이 교사로 계셨던.

장준하, 문익환 이런 분들이 다 계셨고, 가장 진보적이고

한국 민주화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그런 교단의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와우~~~~~~)

 

 와우~~ 그렇군요.

옛날에 중동신도시가 처움 세워질 무렵, 은하마을에 작은 교회 하나 있었죠?  혹시 아셔요?

 그런데는 사실 관심없었지. 교회가 워낙 많으니까.

상가에 하나 있다가 지금은 없지 않나?

 네, 거기 상가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제가 서울에 좀 큰 교회 다니다가 부천에 이사와서 그 교회다녔었어요. 참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교단에 대해 좀 아시겠네요?

통합,기장,합동,고신 등…. 그런 전통이랄까~ 그런게 있잖아요.

지금 지평교회는 기장이예요.

 

 네, 교단 알죠. 아~ 지평교회가 기장이군요.

이사장님은 부천에 얼마나 사셨어요?

 하~내가 등본 떼봐야 알겠는데

82년도 가을인지 81년도 가을인지 내가 그걸 기억을 잘 못하겠네

초본을 떼봐야 그걸 알거든. 하하하~

 하하하~~

 인터뷰할 때 초본도 필요해요. 그죠? ㅋㅋ

오래 됬지~어쨌든~ 내 인생의 절반 이상 부천서 산거지.

 

 

 

 

 

 

 

 본인소개를 셀프로~  나는 OO다~라고 한다면요?

 나는 00다?~ 딱 막혔네. (하하하~)

(다시금 진지하게 말씀하시기를)

큰 틀에서는 나는 크리스천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그건 사실은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네 멋지세요. 되게 멋지시네요

 뭐 내일이면 또 다를지 모르겠는데………

 

 

 

the 부천

 

 부천에서 36년을 사셨는데 부천 어때요 살기가?

 이제는 부천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지

 부천을 왜 사랑하셔요?

 결과적으로는 사람을 만나게 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람 답게 사는 삶!! 그런 걸 고민하는 사람들을 좀 만난거지

제가 인천 살다가 여기 왔거든.

67년도에 군대 마치고 첫 직장이 인천에 대우중공업이었거든요.

그때 총각때 기숙사에 지내면서 인천에서 첫 발 딛고 있다가 80년도에 첫 직장 사표 내고

두 번째 직장으로 입사했는데, 그 회사가 서울 퇴계로에 있었어요

명동 지나서 퇴계로에 있는 그 당시에 호남 00에 다녔는데

그 사이에 결혼도 했고 80년도에 첫 딸이 태어났지.

 

집이 연안부두였는데, 거기서 충무로까지 출퇴근을 하면 편도 2시간 가까이 걸리지.

직장이 인천에 있을 때야 좋았는데 출퇴근이 넘 지치고해서

무조건 동쪽으로 가야 된다, 그걸 ‘동진정책’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정인조의 동진정책’에 따라서 서울방향으로 더 가까이 가려고 알아봤지.

그 ywca 시흥버들연수원 알아요?  거기 연수원에 갈 일이 있었어.

그래서, 부천 남부역에서 내려서 슬슬 걸어가 보았는데,

야~ 너무너무 좋은거야.

극동아파트가 있었는데, 완전 숲속에 있고 “이 아파트가 좋겠다!” 한눈에 반한거지.

연수마치고 전세 알아봐서 바로 이사 왔지요.

어차피 직장 가까운 데로 와야 되니까. 한마디로 코가 끼게 된 거야~ 하하하~

 

돈 조금 더 벌면 오류동으로 가든지, 암튼 서울로 가려고 생각중이었는데

거기서 주저앉았네. 하하하~

하나님이 내게 부천에서 사명을 주셨나 봐.

암튼 내가 서울로 가려다 그렇게 부천에 자리잡은 거 보면

해석하건데 사명이고 또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부천에 자리잡았다 해도 이렇게 정들고 오래 사시게 된데는

특별히 또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

 

 87년도에 우연하게 동아일보를 구독했는데

동아일보 안 간지에 ymca에서 하는 시민대학이라는 찌라시가 들어있는거야

그래서 야~강사진을 보니 너무너무 좋은거야. 그래서 그걸 신청해서 들었어

 

87년도에 근데 거기서 만난 분들이 지금 부천희망재단 상임이사 김범용씨도 만났고,

박종훈 원장도 거기서 만났고, 오경석 대표도 거기서 만났고

이희병이라는 명성치과 원장도 만났고, ymca의 역사라 할 수 있는 황주석씨

강희대… 그 친구되시는 김관식씨 등 그런 분들을 알게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 된 거예요.

 

87년 민주항쟁 시절에 움텄으니까, 그때 시민대학도 있었고

서울로 못 갔네. 결국.

 

나 고향이 합천인데, 서울간다 서울간다 했었는데 말이야

서울에다 주민세를 한번 못냈네.

 

 부천이 그렇게 인연이 맺어져서

y 활동 오래 했고, y 이사로도 오래 있었고

그 뒤에 강희대 시민상이 만들어지고, 그 뒤에 부천희망재단을 만들고

이런 과정 속에서 있게 된 거에요.

여기저기 꿰어 가지고 지금까지 쉴 수 없게 만드네. 하하하~

 

 

 

 

 

 

the 일

 

 

 부천 얘기하다 보니 일 얘기가 참 많이 나왔는데요

일이 참 궁금해요.

지역재단, 지금 하시는 사업, 교회든…

펼치신 일에 대해 편안하게 말씀해주세요.

 

 지금 가장 비중 있게 현실적으로 부천희망재단이

시민 속으로 들어가고, 진정하게 부천시민들이 믿고 사랑하고

부천시민들의 기부 마인드를 일깨워주고, “기부” 하면 부천희망재단을 찾아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예요.

한마디로 부천 시민 90만의 쌈짓돈부터~ 고액까지

부천희망재단! 여기에 갖다 드리면 이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 기관이다~ 인정받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1의 현재 과제에요

부천희망재단이 딱 7년이 되었어요

올해 8년째이고, 올해는 1년동안  홍보위주의 캠페인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통계로 보면,

한번이라도 기부한 사람을 세어보니 5,000명이 되어요

올해 10,000명 만들어보아서

부천희망재단을 알고, 금액 상관없이 기부하게 된다면

거의 우리 꿈이 이루어지는 원년이 되지 않겠나 싶어요.

 

그거 외에도 교단 활동, 기장이라 했는데

기장에서 운영하는 한신대학 법인 이사를 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공익활동을 일부 하고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들이라서 부천희망재단이랑 같이 잘 되기 바래요.

 

지역재단협의회라고,

한국의 11개 지역재단 합쳐져서 지역재단협의회 가 작년에 정부허가를 얻었어요.

그 지역재단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길 바랍니다.

지역재단이 전국 곳곳에 기초지자체에 설립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여러분과 같은 분이 전국에 막 있을 거 아녜요?

그런 뜻 같은 사람을 모아서 지역재단이 되고,

지역재단 모아서 지역재단협의회가 순수하게 그런 분들과 단체를 서포트 하겠다는 거죠.

 

모금이 잘되면 인건비 지원까지도 해보려고 해요.

지역재단협의회에서 나는 모금 위원장이야.

상당한 금액으로 모금을 해가지고 이것을 어디든지 퍼뜨리고 싶어.

 

 전국 지자체가 243개고 현재 지역재단이 11개예요.

5년 안에 50개, 10년 안에 100개

매년매년 달라진다는걸 실제로 느끼고 있어요.

 

지역재단이 없는 곳에 자원을 발굴해서 그러니까 꿈을 가진 분들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 지역재단을 만들겠다는 프레젠테이션도 할것이고,

그런 관심있는 분들을 만나 후원회도 만들고, 부천희망재단과 같은 지역재단이 창립되기를 바랍니다.

음. 아직 서울에도 없으니, 할 일이 많지요.

 

 

 

 

 실제로 직업적으로 하시는 일은?

 인천서 살다가 충무로로 직장 옮겼잖아요

호남정유로, 지금은 gs칼텍스 이지.

 

2001년도에 나와서 창업을 했어요.

창업을 해서 지금까지 17년 회사를 운영하는건데, 회사가 하는 일은 쉽게 말하면

플랜트(대규모 공장) 정유와 석유화학 회사. 이런쪽에 들어가는 소위 말해서 용역, 검사, 감리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대표이사야, 회사이름은 global21 이고요.

나이가 들어가니까 다음세대한테 물려줘야지 생각이 되요

 

  와~ 이사장님은 전문기업인들에게도 멋진 롤모델이 되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보람된 일이 있다면요?

 참 어째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런 기부와 모금 이런 쪽으로 어쩌다보니 하게 됐네.

난 처음에는 이런 사업도 하고 그러니까, 기부만 하고 그걸로 끝내는 것이 내 본연의 의무랄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기부자가 아니고 모금가가 된거지.

그 길이 쉽진 않아요.  실패가 굉장히 큰 자산이 되는 것 같더라고.

어쨌든 나는 지역에서 돈을 좀 모아야해..

캠페인을 해야해.. 누군가는 계속 뛰어야하거든요.

 

 

 

 

 

 

the 인생

 

 내 인생의 3막의 목표야

  1. 직장

2. 회사운영

3. 모금가

 

3가지의 고비가 있었고, 그렇게 구분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

 인생은 OO다 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요?

 인생은 [ 이타심을 키워가는 과정 ] 이다.

그러면 어떻겠느냐~~~

 오~~~ 이타심이요?

  원혜영 의원 왈,

가족의 범위를 넓혀가서 이웃에 관심을 갖게 하는 그런 얘길 하시던데

우리 마음속에 이기와 이타가 섞여있는데, 그 중에서 이기심이 없어져서

이타심만 있으면, 예수나 석가 등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되겠지,

우리가 성인 반열로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보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내는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것이 안된다고 처음부터 포기해버리면 정말 안되고,

뭔가 닮아가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맞아요. 해보는 거죠~~

 네~ 제가 43살 때 인생목표를 정한 게 있어요

그거 보여드릴까?

 와~~ 네네~

 

 

 가족의 범위를 키워나가라!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야 되거든요.

누구나 한계는 있는데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될 것 인가의 숙제가 남아 있는 거지요.

 

 

정인조 이사장님이 43세에 세운 목표를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성실하고 계획적이고 실천하는 사람, 그리고 이타심을 갖고 있는 사람, 

계획하고 평가하는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존경하지만, 앞으로는 더더더~~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이면서 참 좋은 사람,

정.인.조 이사장님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 일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일을 했을까요?

 나의 어릴적 꿈?

이 일이 아니였으면 다른 것 뭘 했을 것 같아요?

하~, 나는 사실 의사가 되려 했어요.

어머니가 내가 어릴 때부터 병을 앓으셨거든.

그당시에는 거의 불치에 가까운 척추결핵이라는 병인데,

허리에서 냄새가 나고, 고름이 계속 몇 십 년 동안 났지.

하루종인 찬 복대에서 피고름이 났어.

 

그때 나는, 내가 크면 우리 엄마부터 고쳐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

근데 막상 의사가 되어야 하는데 의사공부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

빨리 돈버는 공대를 갔어. 그래서 엔지니어가 된거죠.

 

엔지니어가 되고 대학 과정속에서도 한 때는 대학을 마치고 신학대학을 갈까 생각했어.

신앙생활을 하는 동료 중에서 신학대 총장이나 교수도 나오고, 그런쪽으로 많이 있었고

그 사람들과 교제를 많이 하면서 나도 한번 대학졸업하고

엔지니어지만 목회의 길로 가면 안될까..  생각했었어.

 

암튼 그래서, 이 길이 아니였다면 의사를 하지 않았겠나

의사로 가다가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젊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그랬군요. 이사장님은 효자시네요.

효자시면서, 하나님도 잘 믿으시고, 또 지금은 훌륭한 엔지니어시구요.

인생의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가 있다면 뭘까요?

 

 하…

삶이 뭔지 생각하면서 살아라!

존재이유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살아라!

하하하~ 근데, 존재이유와 성찰 그런 걸 찾으며 살면 재미있을까요?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거기론 갈 수 없는데말이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하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건 진짜 배부른 돼지의 삶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은 그런 분이 많지만, 워낙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어있으니까

거기서부터 자유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큰사위도 엔지니어예요.

그래서 나는 손주가 인문학쪽으로 꿈을 키웠으면 좋겠는데

부모들은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먹고 사냐….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여전히 내가 엔지니어의 삶을 살다 보니, 손주는 인문학관련으로 갔음 좋겠고 하지.

암튼 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그 일이 즐거운 사람은 행복하겠죠 하하하~

 

 저도 제가 하는 일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요.

그래서 저희 단체 정관에, 핵심가치로

-재미있는가? / 의미있는가? / 지속가능한가?

를 물으며 단체 일을 하도록 넣어놓았어요.

 

 네~ 그게 중요해요.

우리 이거 해서 의미만 있고, 재미만 있다,

재미만 있고 의미만 있다,

그렇지 않도록 성찰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간은 시간 속에 존재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가?에 대한 질문은

수시로 해야 된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달라질 수 있고, 그때는 과감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가야 해요.

체면보다는 잘 체크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세요.

 

 

 네~ 귀한 말씀, 잘 새겨놓을게요.

이사장님, 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기억 1>

내가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학교 때

선배의 소개로 진짜 스승 목사님을 만나게 된 거고,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살게 된 것도 이분의 덕이예요.

어떻게 보면 길잡이고이시고, 나침반이 되어주셨지.

돌아가셨지만.

 

고 3때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가정교사 하면서 내 공부도 해야 하는데,

그때가 가장 민감한 시기였는데 어떻게 잘 넘겼어요.

재수도 안 했고..

그 시기, 내 공부하기도 바쁜 때에 돈 때문에 남의 집 입주해서 학생을 가르치는

나 자신, 내 인생이 답답하다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모든 것이 잘 풀렸지.

 

기억 2>

하나 더 있어요. 어머님이 결혼하고, 외갓집이 바로 만주로 이사를 갔어요.

해방되니까 연결이 끊어졌고, 당시 이산가족찾기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70년대 초 쯤에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 육성녹음을 가지고

방송국을 가서 만주에 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가족을 찾았죠.

방송 탓인지 어쨌는지 만주에서 편지가 왔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어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외삼촌 외숙모가 다 돌아가신 상태에서

사촌들하고만 연락이 되었지.

편지 왕래 하다가 우리 어머님을 모시고(79세) 만주로 가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한번 했지.

거기 갔다가 북경까지 들러가지고 만리장성 가고, 그때 어머니 기력이 없어서 내가 업고 만리장성을 갔지.

그것도 기억에 남네.

 

 어머니를 업고 만리장성을요?  정말 정말 사랑스럽고 듬직한 효자셨네요.

 어머님이 15살에 시집을 왔는데 외갓집이 한 2년인가 있다가 만주로 가버렸고.

나를 34살에 낳았거든. 그 뒤로 아파서 지내시면서

아프면 항상 하는 말씀이 “죽기 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 였거든.

그 소원 한번 들어드리려고 늘 생각했었지.

 

어머니는 늘 “내가 쟤 중학생 때까진 살아야겠다”,

“고등학생 때까진 살아야겠다”

그러셨는데….

동네사람들도

“인천댁이 오늘 밤은 넘기나?” 이런 소리 하는 걸 많이 들었거든. 어렸을때…

 

좋은 약이 나와서 나았어.

울어머니가 환갑 될 때 결혼했는데, 나 결혼하고도 24년을 더 사셨지

 

 아~ 그러셨군요. 감사하네요. 건강은 회복하셨구요?

 그 때는 내 마누라가 약사였거든. 돈만 주면 약은 사지.

시골에 계셨지만 며느리가 잘 공급해줘서 어떻게 보면 84세까지 사신 거지.

 

 어머님 신앙심이 깊으셨나요?

이사장님이 어머님의 신앙심을 영향 받으신건 아닌지요?

 신앙심은 무속 열심히 믿으셨지

그것도 신앙심이야~

때가 되면 손 비는 것도 하고

 

죽는다, 산다 할 때는

우리 집에서 굿을 얼마나 했는가 몰라

용하다는 점쟁이 다 데려와서 또 굿을 하곤 했지.

 

 

냉수 떠 놓고 손 비비며 빌던 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어린 정인조.

치열하게 살면서 신앙과 성실로 바르게 자라서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참 어른 정인조.

눈물나게 하는 고생과 난관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세상과 함께한 그 분의 삶은 뭉클한 감동 그 이상의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었다. 

 

 

the 인생

 

 

 현재 이사장님의 행복지수를 점수로 말한다면요?

 한 90점은 되지 않겠나

 

 10점은 왜 모자른 걸까요?

 세상에 대한 걱정, 회사에 대한 걱정, 시집간 딸에 대한 걱정 등등 때문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앞날은 모르잖아요. 그래서 걱정을 하지.

 

살면서 내가 너무너무 행복하다 느낄 때가 한번은 있었어요.

아무 걱정이 없었을 때가 있었어.

하나님이 시기하면 어떡하지 싶을 때가 있었지.

그게 애들이 시집 가기 전,

애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다 건강하고 걱정 없고

여러 여건들이 교회, 회사, 하는 일들이 잘 되었고

잠깐 그런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도 사람은 약간의 두려움? 그런 게 있더라구.

때로는 무인도 가서 있고싶은 생각도 있지.

 

 무인도요?  와~~ 굉장히 기대되네요.

10년 후 인터뷰 다시 해주세요.

 그래요. 아직도 마음은 청년 같은데. 하하하~

 하하하~ 너무 즐거운 인터뷰였고, 뭐가 뭉클한 감동과 깨달음이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한 장소는 글로벌21이 있고,

정인조 이사장님의 헌금으로 지평교회가 세워진 건물 옥상이었다.

옥상에는 작은 텃밭이 아기자기 있었고 야채보다는 봄꽃이 가득했다. 

차가운 봄바람에 인터뷰 도중 다시 글로벌21 사무실로 옮기기도 했는데

그 곳에서 ‘플랜트’라는 기업전문 용어를 들었다. 신기하고 존경스러웠다.

 

결코 한 사람의 인생이나 업적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던한 노력과 성실!!

정.인.조 라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로 얻은 많은 것들은 세상과 나누기 하는 통 큰 선택!!

그 값진 선택이

그가 믿는 이세상 너머 있을(있다면, 오드리는 믿는) 저세상에서도 부요하고 존귀한 자리로

그를 인도하리라 생각되었다. 

 

 

오드리 기자오드리의 한 술 줍쇼 – 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커피와 정치가 있던 청탑다방에 다녀오다

강릉, 명주동 뒷골목에서 청탑다방을 만났다.
간판도 맘에 들었고, 강릉 정치 일 번지였다는 점이
더욱 나의 발목을 잡았고, 시선을 모았다.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굳게 닫혀있어서 몹시 아쉬웠다.

커피숍의 역사와 유래를 공부할 때
역사 속 카페들이 의식있는 시민들의
정치, 예술, 문화, 사회의 공론장이 되거나
토론, 담소의 장이었다고 배운 것도 생각이 났다.

청탑다방!
1959년 개점이후 지역의 정,관, 언론계 인사들의
단골집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강릉정치 일 번지를 자랑하였던 곳,
강릉시와 명주군에 시장과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반드시 들러 인사를 했을 정도였고,
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도 명절에 들려서
시민을 만나 담소를 나누던 곳이었다.
단골손님중에 애국지사 김삼 선생도 있었고,
최각규, 김진선 전 지사 등 강릉을 거쳐간
굵직한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호돈 전 강릉문화원장도
1989년 강릉부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청탑다방에 들려
부임인사를 했을 정도로
강릉의 주요 인사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곳으로
오랫동안 단 돈 천원으로 커피를 팔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단 돈 천원에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신문을 읽고,
당시의 정치를 담소하였던 것이다.

청탑다방의 대표였던 전영자씨는
단골 손님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집도 너무 낡아서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고 커피숍을 좋아한다.
그 맛과 향에도 반했지만,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체가 좋다.
그리고 또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마신
커피 그 자체가 좋기도 하다.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것이 좋고
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도 좋다.

커피의 역사에서 커피하우스는
꽤 오랫동안 사회활동과 의사소통의 중심지였으며,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혁명의 근거지였다.

미국 독립혁명의 시발점이 된 보스톤차 사건은
‘그린 드래곤 인 태번 앤드 커피하우스(Green Dragon Inn, Tavern and Coffeehouse)’에서
모의되었고,
미국의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dence)이
최초로 일반 대중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된 곳은
필라델피아의 상인들이 만든
‘머천트 커피하우스(Merchant Coffeehouse)’가
이름을 바꾼 ‘시티 태번(City Tavern)’이었다.
시티 태번은
지금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발전한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의
공동회의장이기도 하였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적인 대화와 마음을 터놓는 교류”를 나눈다는
명목으로 드나든 커피하우스였다.
미국의 독립과 건국은
커피하우스에서 볶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초창기 미국의 커피하우스는
사람들의 의사소통과 토론과 공론이
모이는 장소였다.
커피하우스가 생겨나자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체스와 같은 게임을 즐기고
그날의 뉴스를 논하고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다.

커피하우스가 자연스럽게
교양있는 사람들이 모여
공론의 장을 제공하자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한
토론과 함께 통치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커피점은
1554년에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던 시절의
콘스탄티노플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물론 그 전에도 메카나 카이로 등
이슬람 지역 여기저기에
커피하우스는 많이 있었으나
일반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50년 영국에서 생겼는데
곧 커피하우스는 전염병처럼
나라 전역에 전파되어 없어서는 안될
만남의 장소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처음 나타날 때는
고등교육을 받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보이던
부르조아 집단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계층으로
부상하던 때였다.
커피하우스는 주로 부르주아 상인과
지식인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고
곧바로 공개적인 토론으로 이어져
순식간에 각종 경제와 정치 문제로 확대되었다.

1페니만 내고 커피 한잔을 사서
하루 종일 커피하우스에 앉아 남들이 나누는
이와 같은 토론과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교(One penny university)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들은
저마다 단골손님의 유형이 달랐다.
작가들이 즐겨찾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던 반면,
의사, 정치가, 상인, 변호사, 성직자, 무역업자,
뱃사람들이 즐겨찾는 커피하우스가 따로 있었다.

주간지 ‘태틀러(The Tatler)’와 ‘스펙테이터(Spectator)’ 같은
언론지도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당시 태틀러의 편집자였던
리차드 스틸(Richard Steele)은
태틀러의 주소를 주로 과학자들의
정보교환의 장소였던
‘그레시안 커피하우스 (Grecian Coffee House)’로 기재하고
그 곳에서 기사를 쓰고 편집했다고 한다.

특정 고객층이 단골 커피하우스에 모여
자유롭게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게 되자
곧 커피하우스는 우체국 역할도 하게 되었다.
즉 특정 고객들이 출입하는 커피하우스를 기반으로
편지나 신문의 발송과 배달을 조직화한 것이다.

커피하우스에 자루를 걸어놓으면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그 자루에 편지를 넣고,
어느 정도 편지가 모이면 배달하는 시스템이었다.
국가에서도 1683년에
이러한 방식의 우편제도를 도입하였는데
당시 우체국뿐 아니라
커피하우스도 편지를 모으는 장소로 지정했다.
1710년대 파리에는 300여 곳이 넘는 카페에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고
보르도, 낭트, 리옹 마르세유 등
프랑스의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맹이어서
사람들은 뉴스를 입소문으로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파리의 카페에서는
마치 영국의 1페니 대학교처럼
글을 읽지 못하였더라도
신문지면을 가득 채운 뉴스를 들을 수 있었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도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마침내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카페 ‘드 포아(de Foy)’에서
“가자 바스티유”라는 외침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대서막이 오르게 되었고,
커피하우스는 사회의 대변혁을 이끄는
혁명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커피를 마실 때
맥주나 물처럼 후루룩 마시지 않는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커피하우스의 역할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고 있다.
오늘날의 커피점은
더 이상 사회와 정치활동의 중심이 아니다.

예전의 커피하우스가 네트워크의 장소라면
요즘은 오히려 고립의 장소이기도 한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의 이념을 소통하는 곳에서
단순히 커피라는 상품판매점으로 전락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화장실을 찾거나,
와이파이를 이용하기 위해서
커피숍을 이용하기도 한다.

나는 부천에 청탑다방 하나 있었으면 한다.
시민들이 모여 자신이 사는 도시의 성장을 위하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이슈문제를 공론화하여
더 좋은 방향을 찾아보기도 하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작품과 멋을 만날 수 있는
부천만의 청탑다방,
1년 8개월전 시민공익을 위하여
우리가 만든 공간
시민공익플랫폼 채움이 만들어가고 싶다.

시민들의 속삭임이 살아서 정계를 흔들고, 바로잡고,
도시가 함께 성장하는 꿈틀꿈틀되는
부천의 청탑다방이고 싶다.
오드리와 서블리가 만든
우리 채움이.

(돕는 글 : 채움 단체는 의정모니터링을 하는 시민공익활동 단체이며
시민활동을 위하여 열린 공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
운영을 돕고자 자체수익활동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판매하고 공간대관 사업을 하기도 함. )

아무튼 강릉에도 또다른 청탑다방이 다시 문을 열기를 바래본다.

오드리 기자커피와 정치가 있던 청탑다방에 다녀오다

오드리의 사람여행 – 동네삼춘 신명철 편집디자이너를 만나다

 

 

the 사람

 

지역에서 마을활동을 하시는 신명철 샘은

개인적으로는 오드리와 서블리가

삼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다정다감함 그리고 호탕한 웃음 등

편안한 삼촌같아서 그리된 것인지

언제부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신~삼촌~~~이라고 부른답니다.

 

신~삼촌은 한번씩 힘을 내라며 찾아와 주시고

또 밥을 사주시곤 한답니다.

 

꽁자 밥을 얻어 먹을 순 없지싶어

밥 한 술의 인터뷰를 진행,

신삼촌 이야기를 온 세상에 알려봅니다.

 

 

이름은?

신명철 (45세/ 범띠)

별명은 호빵맨

오~ 왜 호빵맨?

잘 웃어서

댁은 어디셔요?

여월동 (닭띠~ 그럼 몇살일까요?)

언제부터?

고2때부터 부모님은 부천에 계셔서 왔다갔다 하다가

졸업하고부터 쭉~ 살았어요.

고향이?

부산이요

오!! 부산~ 좋다요

부산에서 한 곳을 추천하면 어디예요?

저는 집 학교 교회 만 다녀서 잘 몰라요

기껏해야 해운대정도

아하~~교회 다니셨어요?

네, 교회오빠 딱~ 그 스타일이었어요. 그때. 하하하

하하하

 

 

 

부천 어때요?

그땐 그냥 살았어요. 지금은 좋아요

그러나 나중에는 공기좋은 곳으로 갈거예요

부천~ 하면 딱? ( )

 

 

공기좋은 곳이라면?

동해, 제주, 강원도 등등 있잖아요.

오~ 동해… 자주 가셔요?

네, 자주 가요

땅도 사놓으셨나요?

하하하~ 차차 사놓아야죠.

오모나~ 친하게 지내자구요 하하하~

 

 

the 일

 

하시는 일은요?

편집디자이너

회사이름이?

아이에디트

오~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이름이네요

언제부터 하셨어요?

3년전 개업을 했지만

실제 그 전에 직장생활은 18년했죠.

 

한가지로 오래하셨네요.

직장생활에서 에피소드 하나?

직장생활할 때 거래처에 와이프가 다녔어요.

키도 크고 예뻐서 우리 직원 7명 모두가 호감이 가득했었죠. 그러던 어느날, 와이프가 콜라를 사갖고 왔는데

다른사람들은 작은 용량의 콜라를 주고

저에게만은 1.5리터 큰병을 주었어요. 그때 딱~ 알았죠. 와이프도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제겐 와이프가 첫번째 여자예요.

3년사귀고 결혼했어요.

 

그렇게 해서 지성이가 태어났군요

네, 지성이는 결혼하고 6년째 태어났어요.

인공수정으로요

그때 참 노력많이 했어요

술도 끊고 운동도 많이 하고 살도 빼고

특히 수영을 많이 했어요.

요즘 살이 쪄서 다시 수영을 시작했어요.

오~ 수영,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오리발끼고 연수반인가 그거 하고 싶어요.

하하하~ 저도 그거했었어요.

요즘 수영도 열심히 하고

사업도 확장하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 어떤 확장일까요?

간판업을 겸업으로 하려구요

오~ 간판업 좋네요.. 요즘같은 불경기에 그나마 간판업은 불경기는 아닐거예요. 저도 관심있는데 크크크~

나중에 언니네식빵가게 같은 빵가게도 하고싶어요

오~ 빵가게요

네~ 먹거리사업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농부)다

나는 농부다

3년전 농사를 지었는데 참 열심히 지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농사를 지으면 보람도 있고요

요즘 바빠서 자주 못갔더니 밭이 엉망이예요.

잠시 올해는 쉬려구요

그러나 죽을 때까지 농사는 짓고 싶어요

오~~ 진정 (농부) 맞네요.

 

 

 

 

인생은 ( ) 다

선택

제가 별로 화를 안내는 사람인데 가끔 화를 낼때가 있어요.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해야 되는데

누군가가 선택하게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정말 화가 나요.

그래서 회사두 고만두게 되었거든요.

 

네 맞는 말씀 같아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해야하고

또 하고싶은 것을 해야겠지요.

저처럼요~~~하하하~~~

 

 

 

 

 

행복지수 1부터 10중에?

0 또는 10

어느때는 0 어느때는 10인것 같아요

늘 넘나들죠.

10처럼 되고 싶은 거라고 해야겠죠?

아~ 그런 뜻이^^

 

 

 

동네삼춘처럼 채움을 챙겨주고

오며가며 밥 한번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분이

제 주변에 계셔서 참 좋습니다.

다음에도 맛있는거 사주세요~~ 삼춘~~~!!! 하하하

<끝>

 

 

 

 

 

오드리 기자오드리의 사람여행 – 동네삼춘 신명철 편집디자이너를 만나다

오드리의 사람여행 –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회농부 김기현 YMCA사무총장을 만나다

오드리의 사람여행 –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회농부

           김기현  YMCA사무총장을 만나다

 

 

 

년 전 부천시민참여예산 위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위원장 투표를 하는데, 무슨 대통령 선거를 방불케 할만큼 열광적이었다.

그날 압도적인 표로 위원장이 된 사람이 바로 김기현 위원장이었다.

부천에서 오래 살았지만 처음 뵙는 분이었다. 

차분하고 명철하고 너그러운 이미지로 위원장된 소감을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적당한 카리스마와 적당한 인자함을 동시에 갖추신 김기현 위원장님은

현재 부천시 YMCA 사무총장이셨다.

 

 

 

 

 

the 사람

 

 성함은 어떻게 되셔요?

 김기현 (소띠)   *몇 년생은 안 밝히고 띠만 밝히는 이유는 한번 맞춰보시라는 의미도 있어요. 재미있잖아요.

 댁은 어디셔요?

 광명이예요

집사람이 광명 Y에서 일했었고, 지금은 볍씨 대안학교 교사로 있구요.

 

 그럼 혹시 cc셨나요?

 하~ 네 캠퍼스커플이었어요.

그 때는 학생운동이죠. 같이 학생운동하다 만났고

그 후 노동운동 그리고 그 후 같이 Y(Y.M.C.A)일했어요.

 

 결혼하신지는요?

 94년이요

 늦게 하신거죠?

 그렇죠. 당시 노동운동을 했는데, 87년에 합법화되기까지

운동을 한다는게 미래도 불확실하고,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까지 되던 때라

결혼을 할 생각을 못했죠.

그러다가 93년 Y에서 일하면서 94년에 결혼을 한거죠.

 

 그렇군요. 총장님은 언제부터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90년대 초반 경실련에 들어가 일하다가

92년 경실련 정농 생협쪽 실무를 하면서

정농의 농민을 만나고 그때 유기농을 알게 되었죠.

당시가 유기농 1세대예요.

아무튼 그러다 부천 Y에 와서 담배자판기추방운동을 통하여

사회변화와 시민참여, 그리고 Y의 신앙 등이

제 스타일에 맞았어요.

 

 

 

 

 

the 나

 

 총장님은 자신을 나는 (           )이다 라고

한마디로 하신다면요?

 나는 (씨앗) 이다.

Y에서 원칭이라고 해서 원하는 이름을 정하는데요

제 원칭이 씨앗이예요.

 

씨앗에는 무한잠재가능성이 들어있잖아요.

원래 형태를 살려나가는 것이 과제인데요

그게 쉽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저’ 라는 씨앗의 좋은 것들도 잘 살리고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고 살자는 뜻에서

원칭을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우와~~ 작은 씨앗 하나에 깊은 의미가 있네요.

 

 

the 부천

 

 총장님은 부천에서 꾀 오래 일을 하셨는데요

부천을 한마디로 (            )다 라고 말하시겠어요

 부천은 ( 양면성의 도시 )다.

 

 아~ 양면성이요?  어떤 의미에서요?

 부천은 장단점을 다 갖고 있는 도시인데요

먼저 장점으로 문화, 편의, 생활 기반이 잘 되어 있어요.

인적자원도 많고요. 사람들도 다양해요.

한 마디로 맨파워가 강한 도시죠.

 

단점도 있어요.

환경적으로 인구밀도가 높고 녹지율은 낮아요.

그러므로 발생하는 문제가 많아요.

 

그래서 부천을 미래지향적,

지속가능적 도시로 만드는 게 큰 과제예요.

 

밀집도시지만

에너지효율, 대중교통효율,

녹지효율 가능성을 네트워킹한 시민들과 함께 높이면

얼마든지 부천은 미래지향적, 지속가능적 도시가 될 수 있어요.

 

세상은 변합니다.

그 세상의 변화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시민)는 사회를 이끌고

이 시대는 나(시민)를 주체자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시스템화, 제도화하여 지지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선진국은 지방자치단체가 권위주의가 없습니다.

유럽도 규모도 작고 특권 이런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굉장히 권위적이고 관료적입니다.

 

지역의 현안 문제들을 공론장을 만들어서

시민참여와 토론을 통하여 이루어가야 합니다.

대장들녁도 그런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을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걱정하는 어른이 계시다는게 

지역주민으로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온 일생을 자신 뿐 아닌 다른 사람들과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사시는 모습

그리고 그 일에 만족해하는 모습이

나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살면서 보람이 있었다면?

 Y에서 일하면서

시민운동하는 사람이지만

주민자치, 시민교육 영역, 시민자치 영역 공부와 네트워킹을 해오면서

두 가지 관심이 생겼었어요.

  •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가?
  • 사회가 어떻게 변하는가?

 

Y의 로고에 영,지,체 전인성이 있거든요.

균형잡힌 사회를 만드는 것,

즉 생활자치, 주민자치, 시민들의 자치역량을 키워나가는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한 측면에서

스스로 시민학습을 통하여 사람이 성장하고

사회가 변화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변화는 ‘등대활동’인데요

여성중심의 소모임을 ‘등대’라고 합니다.

 

등대활동을 통하여 그저 착한 딸로서 살던 한 분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사회를 알게 되고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되는,

그래서 다시 Y에 열정을 쏟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양 Y에서 기억에 남는게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라는

안양천살리기 시민운동이 있었는데,

전국 최초로 ‘천’살리기 운동을 했었지요.

 

Y연맹에서는 민주시민교육 강사로 활동했었는데

의미있고 보람도 있는 일이었어요.

 

Y와 함께 시민, 그리고 사회변화에 참여하고 또 주도하면서

보람을 느끼신 이야기를 하시는데 

소중하게 이야기를 하신다.

참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

미래를 진중히 여기시는 분이라고 느꼈다.

 

 

 이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했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요?

 어렸을 때 교사가 꿈이었어요.

어머니는 제가 목사되는게 꿈이셨구요.

사실 Y에서 일하는게 목사 비슷하기도 해요. 하하하~

 

제가 교사였다면 참 답답했을 것 같아요.

저는 생명의 먹거리 중시, 환경친화적 삶, 대안적인 삶의 스타일이라서

Y의 새사회 새인간이라는 표현이 참 맘에 들어요.

그래서 즐겁고 보람 되게 일할 수 있는 것 같아요.

 

 

the 인생

 

 그렇군요.

총장님이 생각하시는 인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일까요?

 인생이란 ( 참 신비로운거 ) 다

사람이라면, 인생의 신비를 느끼면서 살아야하는데

저는 사람들이 그 신비를 느끼게 하는 ‘가교역활’을 하고싶어요.

 

우리 지역에도 그런 역활을 하시는 훌륭한 분들이 많아요.

김종해 교수님(가톨릭대 교수), 정인조 이사장님(부천희망재단 이사장)님,

박종훈 원장님(삼화한의원 원장) 등등이 그런 분들이지요.

 

 총장님도 지역에서 훌륭한 일을 해내고 계신 분 중에 한 분이신데요.

인생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요?

 Y의 교육목표이기도 한데요

나답게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이죠

 

우리는 인생을 살 때 나답게 살아야하는데

즉 ‘나’라는 씨앗답게 자라고 꽃피고 열매맺어야 하잖아요.

그러나 또한 함께, 더불어 가야지요.

그것이 바로 관계지요.

이런 모든게 마음먹는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구요

그래서 역량훈련이 필요한 거지요.

그런 훈련을 저희 Y하고 있구요. ^^

 

 

the 행복

 

 네~ 훌륭한 일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총장님의 행복지수는

0부터 10까지에서 몇 점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셔요?

 

 저는 9예요.

부족한 1은 너무 바쁜거!

너무 바빠서 혼자 책을 본 다든지

혼자 사색 할 중요한 시간들이 많이 부족해요.

 

 요즘은 누구나 너무 바쁜 세상을 살고 있지요. 에고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처음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하고 만든게 있는데요,

저도 불러서 참가했거든요 ‘쓴소리단’이라고요

두 달에 한번 저녁에 만나서

무엇이든 쓴소리를 달게 듣고 말하고 포용하는 시간인데요,

그래서 박원순 시장이 이만큼 서울시를 잘 이끌어가는 것 같아요.

 

누구든지 그런 포용력이 필요해요. 특히 리더자라면!

부천시장이라면 더욱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고로

총장님이 편저한 책과 그 소개글

그리고 Y 10주년 행사때 소감문을 올려봅니다.

오드리의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 . .

 

<우리시대의 커뮤빌더>를 쓴 김기현(부천YMCA 총장)은

여전히 시민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시민운동을 이끌어 온 전업활동가가 아닌

회원운동에 뿌리를 둔 생활인 시민운동가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의 단서를 찾아내고,

대중들 속에서 시민운동의 희망을 일구는

이 사람들을 ‘커뮤빌더’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삶의 터전에서 일상의 문제를 중심으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반 발 앞서 실천하는 사람들이며

삶의 현장에서 인간다운 사회, 공동체적인 사회,

자연친화적인 사회, 공익적인 목표를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시대의 커뮤빌더>는 평범한 생활인이었던 주인공들이

지역운동과 시민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출처: http://www.ymca.pe.kr/1526 [세상 읽기, 책 읽기, 사람살이])

 

 

 

 

                          다시 첫 자리에서

김기현(부천YMCA 사무총장)

 

바람이 찹니다. 눈발이 날립니다.

스산한 마음이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들판을 쳐다봅니다.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는 헐벗었지만 당당하게 서있습니다.

저 멀리 굴뚝에는 따뜻한 연기가 솟아오릅니다.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살아가는 삶의 냄새가 하얀 연기와 함께 마을을 덮습니다.

 

10년을 걸어온 걸음.

당당하고 힘찼습니다.

때로는 벽에 부딪히고, 좌절하고,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올곧게 길을 개척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다시 겨울을 맞이합니다.

봄을 살짝 맛보았기 때문일까?

이번 겨울은 유난히 깁니다.

하지만 겨울에도 수많은 생명은, 조용한 아우성으로 자기를 드러냅니다.

저 연약해 보이는 작은 새도, 산과 들의 어디선가 겨울을 살아갑니다.

그리고…..겨울을 진하게 이겨낸 생명은

더 강하게, 새롭게, 찬란하게 움터서 올라옵니다.

 

10년의 발자취

이제 첫 자리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첫 자리는 훨씬 깊고, 크고, 넓습니다.

10년의 믿음이 바닥을 버티고 있습니다.

 

20년을 향한 첫 걸음.

그 걸음에 마음 설렙니다.

그 걸음을 같이 가겠습니다.

 

<끝>

 

 

 

오드리 기자오드리의 사람여행 –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회농부 김기현 YMCA사무총장을 만나다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여행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여행

 

 

 

 

#여행전

 

젊어서는 무엇을 적고 체크하고

지워나가고 성취해나가는 것에

희열을 느낄만큼

치열하게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제부터일까.

그런 쫓고 쫓기는 치열함이

허무하더라.

 

계획하여도 안되어서?

예상치 못한 변수발생 때문에?

성취해도 별거 없어서?

좀 더 누리면서 살고 싶어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딱 하나다!

눈이다.

 

노안이 오면서부터

무엇을 적고, 보고 하는 것이

큰 노동이 되었다.

쉽게 피곤하고

또 짜증이 난다.

 

하도 안 보여서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는지

인상이 변한 듯 하다.

 

가만이 있으면

기분이 나쁘거나 무서워 보인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렇다고 헬렐레~

계속 웃을 수도 없고

참, 어렵다.

 

나의 눈이여~ 오라

젊음이여~ 오라

그래도 웃자!! 하하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버킷리스트 라는 말이 있다.

나도 너무 많이 해봤으니까.

이젠 별로 관심 없었다.

 

내가 우리 신랑을 만나기 위해

20세 때, 내가 바라는 나의 배우자 이상형에 대하여

100개의 항목을 썼었다.

젊었을 때는 그랬다.

다 적어보고 성취해 보고…

 

이젠 머리에서 미리 이건 아니지, 안되지,

내가 원해도, 내가 노력해도

되는 건 되고, 안되는 건 안되지

라고 판단하여서 적당히 걸러진다.

 

그.러.나.

요즘들어 한 번은

그래도 써보고 싶어졌다.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그래서 버킷리스트 작성을 위한

고요하고 평화로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와 대화를 하기 위하여 말이다.

 

 

 

 

먼저 버킷리스트 작성을 위한 여행을 계획해보면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 공부도 해본다.

 

준비물 : 노트북, 공책(참~ 정감있는 단어다 하하하~),

펜, 예쁜 옷, 모자, 세면도구,

좋은음악(내 폰에 있다), 블루투스 스피커 등

 

장소 : 바닷가의 이쁜 카페

 

먼저 버킷리스트를 쓰기 전에

-버킷리스트란 무엇인지

-버킷리스트의 종류는 어떠한지

-버킷리스트 항목은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이루고싶은지 생각을 정리해 보자.

 

버킷리스트(Bucket list)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목록이다.

‘죽다’라는 뜻인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할 때

올가미를 목에 건 후,

밟고 올라섰던 양동이를 발로 차버리는 방법으로

목을 맸는데 ,거기서부터 유래된 말이라는 것이다.

 

꿈을 담는 양동이라는

낭만적인 표현으로 많이 썼는데,

그 유래는 살짝 소름이 끼친다. 오들오들~

 

버킷리스트라는 용어가 유행하게 된 것은

2007년 <버킷리스트>라는 영화가 개봉되면서다.

 

 

 

 

 

버킷리스트의 종류도 다양하다.

– 먼저 새해가 되어 한 해 씩 목표를 세울 수도 있고

– 죽을 때까지 꼭 해보고싶은 목표를 세울 수도 있다

– 또한 커플 버킷리스트, 연령대별,

– 낭만적인 내 삶을 위한 버킷리스트 등 테마가 있는 버킷리스트 등등도 있다.

 

 

버킷리스트의 항목은 

하고싶은 것, 갖고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등이 있다.

 

작성시 참고할 사항은

현실적인 목표만 세우려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을 이루기 힘들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적어놓고 실천해보려고 하는 동안

즐거울 뿐만 아니라

성취감도 함께 얻을 수 있으니까.

 

 

 

 

버킷리스트의 목표를

-마음에 새기는 것

-입밖으로 꺼내서 한번 더 말로 하는 것

-손으로 쓰는 것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계속 자극을 준다면

그 결과는 더욱 목표에 가까울 수 있겠다.

 

오늘부터 버킷리스트와 연애를 시작해 보아야겠다.

버킷리스트 여행을 통한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는 과연? 기대가 된다.

 

 

 

 

 

#여행

 

단체모임 취소로 더 수월하게 단촐한 여행을 가게 되었다.

물론 혼가 가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친구와 함께 간다. 그것 역쉬 참,참,참 좋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어떤 여인의 말을 잘 들으며(T맵 네비 안내음성)

새로 난 도로 등 시키는대로 가다보면

춘천막국수도 먹을 수 있고

동해 바닷가 맛난 커피도 마실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강원도 막걸리,

원래 술을 좋아하지도, 즐겨 먹지도 않지만

지망에 오면 그 지방의 막걸리만큼은 맛을 보고싶다.

어렸을 때 소화가 잘 된다며 할머니가 막걸리를 주시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막걸리는 친밀하다.

그 지방의 특산물도 알 수 있다.

강원도는 옥수수다.

 

고작 1박에,

무슨 내인생을, 앞으로의 내인생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일주일, 아니 한 달은 살아보면 좋겠다.

 

그러나, 한 달 같은 마음으로 진지하게

펜을 들어본다.

 

 

 

 

매일 하고픈 일

매주 해야 하는 일

매월 해야 하는 일

1년동안 이루고픈 일

평생 꼭 하고픈 일

 

꼭 가고픈 곳

꼭 되고픈 것

꼭 이루고픈 것

간절히 원하는 것들…

 

쓰다보니

진솔한 내 마음의 바램이 보인다.

에고. 나만 알고 싶은 것들이 많다.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고

다만 꼭 이루고 싶은 것들!!

 

그래서 이번 버킷리스트는 비공개로 할 수 밖에 없다.

뭐 별로 궁금해 할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여행후

 

다시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다.

바쁘기 싫다.

실수하기 싫다.

뛰기 싫다.

아프기도 싫다.

 

숨을 쉬고 싶다.

웃고 싶다.

천천히 가고싶다.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나의 버킷리스트를 새기며 살 것이다.

그리고 이룰 것이다.

 

나와의 약속과 다짐을

세상이 아닌 나를 위해 지킬 것이다.

 

한 달후~

일 년후~

십년후~

세상에 보여지는 내 모습이

세상에게 나의 버킷리스트를 보여주겠지.

훗~ 오늘부터 잘 살아보겠습니다!!!

내가 나에게 꼭꼭 약속하며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시작한다.

 

 

 

 

 

 

오드리 기자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여행

오드리의 한술줍쇼 – 부천시평생학습센터 이소연 소장을 만나다

 

 

<오드리의 한 술 줍쇼> 부천시평생학습센터 이소연 소장을 만나다

그대를 평생학습의 전도사!  평생학습의 퀸! 이라 부르겠소.

 

평소 꼭 한번은 만나서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었던 이소연 소장님을 드디어 만났다.

한 술 줍쇼 인터뷰를 요청하였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일정을 잡으셨다.

역쉬~ 쿨~하시다!! 

평소 소장님을 바라보던 나는,

‘그대를 평생학습의 퀸이라 부르노라~’  라고 말하고 싶었던 분이다.

인터뷰가 마치고, 역쉬~ 오드리는 사람을 참 잘 본다.

하하하~ 바로 그렇게! 느꼈던 자리였다.

 

 

 

 

the 사람

 

 성함이 어떻게 되셔요?

 이소연 이예요(잔나비띠~)

 사시는 곳은요?

 잠실이요.

상동에서 17~18년 살다가 잠실로 이사갔어요.

이사 후 평생학습센터장을 제안받고 1년 고민 후

하게 되었어요.

지역사회교육협의회에서 한창 도서관 동아리 붐이 일때 공부하다 박사학위도 받게 되었네요.

 

 박사학위라면 전공은요?

 교육학이구요 평생교육으로 박사학위 받았죠

 우와~ 멋지시네요.

음~~~ 그래서 평생학습센터 일을 열정적으로 하시는군요^^

 

 

 

 

 소장님은 나는  (               )다 라고 한다면요?

 음… 나는 (고민하는 사람)이다!

  아~  고민이라!   그 간 살면서 주요고민 세가지가 있었다면요?

 네~

 

고민 1>

 

아빠가 사업을 ~ 계속 국수말듯 말고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엄마는 남자케어 없이 자립하도록 딸들을 가르쳤죠.

그래서 딸들이 교사도 되고, 약사도 됐어요.

제가 1987년 대학교 1학년 때 이한열열사 사건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저는 제 고민이 너무 컸어요.

엄마가 너무 고생하셨거든요.  그래서 빨리 공부마치고 자립할 생각밖에는 못했어요.

 아~ 그러셨군요. 충분히 이해되요.

자제분은 어떻게 되셔요?

 

 

고민 2>

 

 결혼 후 어렵게 어렵게 병원다니며 딸 하나를 얻었어요.

3명은 낳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입양도 하고싶었지만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말리기도 하고해서

딸 하나 온전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어요.

딸 하나를 공주나 외동딸이 아닌

자립적인 한 인격체로 잘 키워보고 싶었어요.

 

그 쯤 들어간데가 비영리 ‘부천지역사회협의체’인데요

지금의 롯데백화점이 그때는 LG백화점이었구요 거기서 문화센터 강좌가 많았어요.

사람들도 많이 이용했었는데요 “어떻게 아이를 잘 키울까?”에 대한 강의는 없더라구요

 

그 당시 부천지역사회협의체에서 부모교육 프로그램이 마침 있었는데 그걸 들으러 갔죠

지금도 생각이 나요.. 비오는 날 추적추적 비가오는데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컴컴하고 저는 속으로 다단곈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하~

프로그램 설명을 해주시는데, 내 딸만 잘 키우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지역아이가 함께 잘커야된다는 깨달음을 하게 되었어요.

 

그것이 게기가 되어서 13~14년도에 학습동아리, 작은도서관 운동이 일어나서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동아리에서 서로 성장하는 법을 배웠어요.

함께 성장해야지 홀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죠.

 

제가 40세에 혼자 여행하기로 하고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았었는데요

막상 공부가 하고싶더라구요. 그래서 욕심에 40세에 대학원에 갔어요.

중앙대 평생교육 정책에 최고권위자 이OO교수가 면접을 보았는데요

그 날 수첩에 낙서했어요. “떨어지면 논다”

그 날도 비가 추적추적 왔어요. 여러가지 묻더라고요. 그리고 붙었어요.

 

이론을 배우면서 실천을 통해 활동이 이어지고 연결되고

부천에서 더 성장하는 법을 고민도 하다가

딸 교육 문제 등 고민하면서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거죠. 덕분에 더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고민이 오히려 좋은 길로 안내를 해주었네요.

 네~ 그랬어요. 하하하~

 

고민 3>

 

그리고 저는 어떻게 하면 내가 공부한 것과 관심하는 것들을 가지고

지역과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공공영역에서 처음 구조를 이해하고 행정과 예산을 잘 사용하여

진정한 민관 거버넌스를 이루고픈 열정으로

아침 7시 집을 나서 2시간을 출근하면서 혼신을 다했어요.

 

좀 발맞추고 고민하며 이제 좀 된다싶으면 행정의 파트너가 계속 바뀌니까

탄력을 받던 걸음이 다시 뒷걸음을 치거나 왔다갔다하곤 했어요.

 

많은 성과는 있지만, 포지션에서 “짜증”이 나고 다시 설득하고 다시 돌아가는 걸음을 반복하게 되었죠.

그럼에도 그 와중에 참 감사한 것이 있었어요. 딸이었어요.

총무도 하면서 동아리활동을 열심히 하였는데 소신껏 사교육을 안시켰어요.

딸에게 여행이나 영어외에는 학습지도 하나 안시켰죠.

그래서 그런지 딸은 꿈을 위하여 영국에서 혼자 홈스테이 하면서 준비한 대학에 갔어요.

 

 우와~~ 대단하셔요.  소신껏 하고 싶지만 주변을 보면 그런 용기가 사라지던데요.

따님은 전공이 뭐예요?

 공간디자인과예요.

암튼 요즘, 그렇게 사랑하는 딸 서원이는 공부하러 떠나고

남편은 너무 너무 바쁘고 오히려 이런 환경이 자연스럽게 저를 공부하게 했고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박사학위까지 따게 된거죠. 하~~~

 우와 축하드려요 박사님~~!!

 

 

 

the 부천

 

 소장님은 한마디로 부천을 (             )다~ 라고 말할 수 있으셔요?

 부천은  (보글보글 끓는 남비) 다

누가 불을 지피는 건 아니지만, 에너지와 하고픈 욕구가 무지 많은 도시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좋은 점도 … 있고… 지역사회가 전쟁터를 방불케 하기도 하는데

콩 한쪽을 나눠 먹기 보다는 우리 마을, 우리 활동만이 최고로 여기는 경향도 있는 듯 해요.

 

소장님은 열정을 다해 인터뷰에 답을 주셨고

나도 모르게 쏘~~옥~~ 빠져들었다. 

그 진정성있고 애정있는 이야기여행 속으로!!

 

 

 

 

리더가 떠나면 구조, 시스템이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각각 잘하는 포지션에 집중하면서 행정은 실무자와 함께가야 하죠.

일하는 사람에게 권한을 줘야지…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비영리 영역에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고 있어요.

 

 우와~ 역쉬!   하고싶은 일이라 하면 뭘까요?

 네~ 공적시스템이 아닌 자유로운 공간에서 즐겁고 의미있는 일을 하고싶어요.

153개 도시 중에 광명시와 부천시만이 소장이 있거든요.

비슷한 고민하는 사람들의 스페이스에서 고민하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다해보고 있어요.

물론 쉽지 않지만요. 하~

 

 

 

the 인생

 

 

 소장님은 인생은 (           )다 라고 말할 수 있으신가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다!

 정말 멋진 말이네요. 무슨 의미일까요?

 예를 들면, 자기주도학습 같은 곳이지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목표를 정하고 실행하는 것, 실패하면 일어나야 하고

성취가 아니고 과정이고, 속도는 좀 느려도 괜찮지 않겠어요?

 맞아요. 좋은 말씀이셔요.

 자기주도학습이란, 원래 성인교육에서 나온 말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가장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요?

 여자로 태어난 것?

 하~~그래요?

 딸 넷 중에 태어나 살다 보니 그런가? 새로운 것에 두려움이 없고 주저함도 없어요.

새로운 곳에 가면 또 거기에 맞는 에너지가 나오더라구요. 생활력이 강하셨던 어머니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인생후배들에게 한말씀 하신다면

 환기하며 살아라!  경험하며 살아라!

공간 / 시간 / 사람 모두 환기하며 살기를!!  모든 경험이 선물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the 행복

 

 지금 현재 소장님의 행복지수를  0부터 10까지 숫자 중 말한다면요?

 

 음, 행복지수는 9요

 부족한 1은 왤까요??

 자만하지 말자는 뜻에서요.  해보고 싶은 일을 해보고 있어서 감사해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

 건~배~!!

 

신중동역 우리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 스파지오라는 멋진 파스타집에서

참 멋진 소장님을 만나서 그 뜨거운 열정과 열림의 마인드를 들으며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중간 중간 와인 잔도 부딪치며

그 부딪친 와인의 향과 함께 

부천에 퍼지는 희망의 향을 흠뻑~ 맡았습니다.

 

저 오드리의 오늘 인터뷰 행복지수는 딱  10이었다는 것,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하하하~~

 

 

 

 

#오드리 #이소연 #한술줍쇼 #부천시평생학습센터 #라스파지오 #와인 #향이나는사람 #평생학습 #부천 #시민카페채움 #시민공익플랫폼 #채움 #인생은속도가아니라방향이다

오드리 기자오드리의 한술줍쇼 – 부천시평생학습센터 이소연 소장을 만나다

오드리의 한술줍쇼 – 전용한 부천시 보건소장을 만나다


 

 

 

the 사람

 

* 보건 :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일

* 보건소 [保健所] : 전염병 등 질병을 예방하거나 진료하고 공중보건을 향상하는 일을 담당하기 위하여
  각 구, 시, 군에 설치한 공공의료기관

 

부천시민의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전반적인 업무을 관리하시는 분,

전용한 부천시보건소장님을 만났다.

직책이 그러해서일까 소장님은 인터뷰를 위하여 30분 가량 걸어서

인터뷰 현장에 찾아오셨고 매우 건강해 보이셨다.

 

 소장님 안녕하세요?   이름은? 하하하(이미 알지만)

 전용한 (돼지띠- 몇 셀까요? 하하하)

 댁은 어디셔요?

 부천 상동. 시흥살다 군포살다 90년도에 부천에 왔어요.

 고향은요?

 예산이지요.

아~ 사과요? 어쩐지 피부가 좋으셔요^^ 하~

 

 

 

the 부천

 

  소장님은 부천 어때요?

 좋지요.

 부천을 (       )다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요?

 부천은 (역동적)이다

 

 아~ 왜요?

 젊은이들이 많고 그래서 젊은 도시다 싶어요

 

 

 

 

the 일

 

 하시는 일은요?

 하, 오드리 기자님이 잘 아시듯 저는 부천시 보건소장입니다.

부천에 특히, 건강관리를 책임지고 있구요

그래서 매우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보람 있으셨어요?

 주로 보건기관을 확충하고 건강버스도 운영하면서

더 시민들과 가까워지는 보건소가 되고자 하구요

시민들이 건강관리를 잘 할 수 있도록 100세건강센터도 열었는데

시민들이 많이 이용해주시고 참 보람이 있어요.

 

 

 

 

 이 일을 한지 낼 모레면(내년) 40년이 되네요

우와~~~ 정말요?

정말 우직하게 한가지 분야에서 오래하셨네요.

일하시면서 보람이 있으시다고 하셨는데요 예를 들면요?

 

 생각한 것들을 다 한 것 같아요.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보건사업이 되게 하려고 이런 저런 새로운 사업들을 많이 했는데요

일을 하는데 있어서 김만수 부천시장님과 코드가 맞았어요.

특히 보건사업에 있어서 거의 생각한 대로 다 한 것 같아요.

물론, 앞으로도 할 일이 더 많지만요.

 

 예를 든다면요?

 치매관리 등은 좀 더 확충해야 하고

부천시가 출산최저잖아요, 그래서

1. 출산장려지원센터도 만들어 출산율도 높이고

  1. 소외계층(장애인 등) 재활시설도 더 확충하고 싶어요.

보편적 건강관리 보다는 선택적 건강관리를 해야 해요.

국가가 나서야 하는 일들이죠.

내 남은 임기 마지막까지 그 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어린이 건강
어르신 행복
건강한 도시 부천“을 위하여

 

 

 

비 오는 날 술터뷰라서 막걸리 집에서 하였는데 

소장님이 주문하신 메뉴도 보건소장님답게 건강식이었다. 

두부김치가 담백하였다.

 

 

 만약, 이 일이 아니면 어떤 일을 하셨을 것 같아요?

 원래 꿈은 교사였어요.

 아~ 선생님이셨다면 엄청 인기많으셨을 것 같아요

 하, 왜요?

 멋있으시잖아요.하하하

 하하하~

곧 퇴직이라, 퇴직 후를 준비하고 있어요. 보건위생 업무와 관련해서요.

 아~ 역쉬~!

 저는 인생은 5막이라고 생각해요

1막은 학창시절

2막은 직장생활

3막은 퇴직 후

4막은 노후

5막은 마지막 정리를 해야죠

 

 아~ 5막이요.

 인생 2막에서는 주어진 것에 열심히 살다가

3막에서는 사회공헌을 하고

4막에서는 건강하게 보내다가

5막,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야죠.

 

 오~~ 준비와 계획이 완벽하신데요.

일이 철저하신만큼 재미있게 사실 것 같아요.

노래 잘하시죠? 18번은 뭐예요?

 김정호 노래는 다 좋아해요. 하얀나비 등

그리고 나훈아 노래도 다 좋아해요. 사내 등

 

 음식은 뭐를 좋아하셔요?

 안가리고 다 잘 먹지만, 날 음식은 안좋아하고 잘 안먹어요.

 

 그래서 항상 건강하시고 그대로 이신 것 같아요.

 네, 맞아요. 몸무게도 항상 똑같아요.

 

 

더덕막걸리와 꼬막이 이야기를 무르익게 하였다.

 

the 인생

 

 소장님은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뭐라고 생각하셔요?

 인생은 (롤러코스터) 다

인생에는 많은 길이 있잖아요. 가시밭길, 신작로, 언덕길, 흙길, 아스팔트 길

그러나 마지막에는 다 똑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길을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만큼 즐기느냐, 긍정적으로 재미있게 사느냐

또한 최선을 다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무서워하는 순간 인생은 무너져요.

 

최선을 다해서 살되, 소신껏 즐겁게 살아야해요.

 

또 중요한 것은

내가 편하면 누군가가 힘들어지니까

주변, 동료 등을 생각하면서

같이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함께 즐겁게 사는게 중요해요.

 

그래서 그런지 주변에 오랜 인연들이 많아요.

대학원이 가고싶다고 했더니 고등학교 절친이

그 다음날 등록금을 보내줘서 친구덕분에

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 보건행정학 공부를 했어요.

지금도 그 친구와 부부동반 모임을 하고 있어요.

 

한 마을 초등학교에 16명이었는데

지금도 모임을 하고 있고 암튼 제가 정도 많고 사람도 좋아해요.

 

인간관계나 모임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인간관계를 중요시 여기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해요.

또한 모임을 중요시 여기고 조직을 저버리거나 배신하거나 하지 않아요.

항상 패밀리같은 마음으로 대하려고 해요.

 

 

 와~~ 정말 진정성 있으시고 훌륭하셔요.

그래서 그런지 저도 소장님과 업무상 만 1년 일을 했었잖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오랫동안 함께 조직에 있었던 것 같고, 정말 패밀리 같아요.

 

 음… ‘보시’라고 하죠? 베푼다

기분대로 하면 보시는 끊어져요.

저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마음과 몸으로 베풀려고 하는 게

제일 큰 보시라고 생각해요.

 

 

 인생 후배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요?

 긍정적으로 살자.

딴 거 없죠. 한마디로 웃구 살자.

내 얼굴은 내꺼지만 표정은 상대방꺼라고 생각하고 웃어야해요.

찡그리믄 긍정적인 사고가 날아가고 그때부터 불행해져요.

 

 아~ 그래서 그런지 소장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셨군요.

 네~ 그래요. 인생 살다 보면 화날 때도 있지.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빨리 풀어야해요. 마음에 갖고 있으면 독이 되요.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친구와 술 한잔 하면서

수다도 떨고 웃으면서 풀면서 살면 몸도 건강해요.

 

the 행복

 

 소장님의 지금 현재 행복지수는  1부터 10중에 몇 점일까요?

 9.9

 

 우와~~~!!!  9.9라니 대단한 점수네요.

부족한 0.1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0.1을 남겨둔 것은 여운이죠.

채워가려는 비움이랄까 하하하

 

가정적으로도 어머니도 건강하시고

자녀들고 다 행복하고

손자손녀들만 보면 너무 감사해요.

 

테니스를 30년 쳤고,

암벽등반, 등산, 자전거라이딩도 즐겨했요.

 

 

 

 오~~ 페이스북에서 많이 봤어요. 자전거라이딩을 거의 매주 하시던데요.

 네, 바쁘다면 아무것도 못해요. 바쁘다는 것은 다 핑계예요.

그 시간들을 잘 쪼개서 하는 거죠.

그러려면 불필요한 일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해요.

생활습관병, 안주하지 말고 아무튼 움직여야 해요.

그래서 저는 항상 걸어다녀요.

아까도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와서 걸어온거예요.

 

어릴 때 좌우명이

“과거를 돌아다보고 슬퍼하거나 괴로워 말자.

그때의 일은 돌아오지 아니할지라

오직 현실을 믿고

미래를 성실하게 살아가자“

 

서산대사의 한시에 보면,

“눈 덮힌 들판을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걷는 길은 후세의 사람들이 따라오는 길이다.”

라고 했어요.

 

신중하게, 그만큼 모든 일을 결정하다보면

최선을 길을 가게 되지 않겠어요?

 

 짝짝짝~~~~ 너무 멋진 말씀을 가득 듣고 담아갑니다.

저도 이제부터 더 신중하게 더 긍정적으로 웃으며

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겠어요.^^

 

소장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페이스북에서 본 소장님의 사진이 생각나네요.

무척 잘 어울렸던 복장이었는데요, 바로 산타복장이었죠.

소장님은 진정 부천시민 모두에게 ‘건강’을 선물해주고 싶어하는

산타할아버지 같았습니다.

 

 

 

 

저 오드리는 이날,

모습과 마음이 너무나 건강한 전용한 소장님의 귀한 말씀 들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구요

제가 좋아하는 부천 맛집 심마니에서 더덕막걸리에 두부김치까지 맛나게 먹은

참 행복한 날이였네요.

 

오드리 기자오드리의 한술줍쇼 – 전용한 부천시 보건소장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