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기자

오드리

만화, 저널, 시민, 공익, 진실, 전통시장, 청년, 변화, 노인, 장애인, 커피, 가을, 비, 사람, 그리고 부천~ 을 좋아하는 평범한 부천시민 noahne@cartoonfellow.org

원미동카페(2) – 두 개의 이쑤시개

 

 

 

 

 

 

 

원미동카페(2) – 두 개의 이쑤시개

 

이곳은 카페다.

그런데 여기저기 바닥에, 그리고 테이블에

빨대가 아닌 이쑤시개가 굴러다닌다.

 

 

 

어떤 이쑤시개는 두 조각으로 동강이 나 있고

어떤 이쑤시개는 아예 가루가 되어있다.

빗자루로 쓸어도 잘 쓸리지가 않는다.

작지만 보기에도 비위가 상하고 흉하다.

 

카페오기 전 들른 식당에 것을,

그 흉칙한 것을 들고와서는

얼마든지 살짝 버릴 수 있는데도

보란듯이 바닥에 떡~ 하니 대 놓고 버린다.

알 수가 없다.

 

 

이 알 수 없는 것을

매일 뒷처리하는 순간만큼은 정말

세상이(원미동) 한심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세상이란 원미동이다)

 

그 작은 이쑤시개 뒷처리도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쑤시개 하나로 세상까지 논한다.

 

 

 

원미동은 도시재생으로 매우 시끌시끌한 마을 중 하나이다.

어마어마한 국비 예산으로 도시를 재생한다고 한다.

도시재생으로 원미동이 변했으면 좋겠다.

자신의 이쑤시개 정도는 쓰레기통에 살짝 버리는

기본매너를 선택하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이쑤시개의 반전

 

 

 

“어유~~ 사장님, 이거 조금 드셔봐”

“어머~ 뭐예요? 떡이네 맛있겠다. 고맙습니다.”

 

이쑤시개가 하나 꽂힌 떡 작은 세덩이를

접시도 아닌 꾸깃꾸깃 뭔가가 좀 묻은듯한 비닐에 얹어서 주신다.

 

 

평소 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오드리지만

그래도 준 성의가 고마워서

오버액션 잔뜩 취하며 떡비닐을 받는다.

 

떡 세덩이라도 나눠먹고 싶은 마음

꾸깃꾸깃한 비닐이라도 담아서 내는 정성

조금이지만 잡수어보시라는 따뜻한 말투와 눈빛이

함께 전해진 이쑤시개라서 그럴까?

 

 

 

바닥에 굴러다니고 테이블에 날아다니고

의자사이에 숨어있던 아까의 이쑤시개랑은 느낌이 다르다.

아까 그 한심해 보이던 이쑤시개는 간데없고

정겹고 똘똘해 보이는 이쑤시개만 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도 차림에 비해 눈동자가 살아있다.

똘똘한 원미동이다. 살만한 원미동이다.

 

이곳 원미동은

이쑤시개 하나만으로도 이야기거리가 무궁무진한 그런 곳이다.

 

오드리 기자원미동카페(2) – 두 개의 이쑤시개

별주는 오드리(10) – 증인

 

 

 

 

 

           별주는 오드리의 영화편(10)  – 증인

 

2019년 2월 13일 개봉, 한국, 12세 관람가, 감독은 이한

오드리의 별은 반올림해서 별 다섯 개입니다 !

이제 별도 반올림을 해보려고 해요.

과연 올해에는 별 다섯개 영화가 몇 개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증인의 평점은 9.8! 입니다.

 

특성 이미지 제거

 

 

이 영화는 좋은 영화 입니까??

암요 암요~ 정우성이 나오는데 좋은 영화 맞지요.

 

영화 ‘증인’은
유력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 순호 역에 정우성이!

사건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역에 김향기가! 열연은 하겠지만

제목에서부터 예측가능한  스토리라서

사실 저는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냥 정우성이 나오고,

목격자니, 자페아니 하니까

억울하고 슬프지만 따뜻한 영화겠거니 생각하고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처음부터 범인도 알겠더라구요.

착한 듯 보이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모습 속에

범인의 그림자가 있더라구요.

 

 

 

 

그렇게 늘 있었던 영화스토리 배경에

멋진 배우 정우성이 나오는지라 기대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그리고 혹 기대이하라 해도 정우성을 보니까 만족해야지 하는 식의

관람객이었던 저 오드리!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부터

오~ 영화 재미 있겠는걸~ 하며 점점 집중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그렇게 영화를 끝까지 보고는 감동하는 오드리,

공감하는 오드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약간 기대는 했었으나

김향기라는 배우를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화 ‘증인’의 시나리오는

알고보면

제5회 롯데 시나리오 공모대전 대상 수상작에다가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을 감독한

이한 감독이 그 특유의 섬세함으로 연출한 작품이었습니다.

오늘 날짜로(2019. 3. 1)

200만 관객을 넘었다고 하니, 그럴만한 탄탄한 배경이 있었네요.

 

200만이라니, 대단하죠?

하지만 관객 수 200만을 넘긴 영화라는 사실보다

더 더 더 감동적인 공감력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 할 수 없는 공감 100퍼 질문이 하나 생기더군요.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고

또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 속 향기는 질문합니다.

아니, 복잡한 오늘날 삶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잠시 하던 일을 멈추라고 합니다.

그리고 묵직하고 맑은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그 일은 좋은 일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세상사는 우리 모두의

세상사는 정답이고, 바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와 너는 좋은 사람이 되자!

우리 함께 좋은 사람이 되자!

그러면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질 것이다 라는

이 시대의 바램말입니다.

 

저 오드리는 그래서 2019년 영화 중 영화가 될 영화!

증인을 여러분에게 강추드립니다~~~!!

 

 

오드리 기자별주는 오드리(10) – 증인

바리스타 오드리의 원미동카페 (1) – 목소리가 큰 사람들

목소리가 큰 사람들

 

 

 

오늘도 나는 귀가 따갑다.

여기 오신 손님들은 하나같이 목소리가 크다.

 

 

그야말로 내가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자기 집안 얘기를 엄청 크게 떠든다.

 

소송이 어쩌구 저쩌구~

아빠가 바람이 나서 어쩌구 저쩌구~

그눔이 사기를 쳐서 어쩌구 저쩌구~

내가 죽어라 고생을 했잖아 어쩌구 저쩌구~ 등등

 

 

나는 정말 궁금하다.

저들의 이야기 전후사정이 궁금한 게 아니다.

 

왜, 홀에 빈 좌석이 많은데도 내가 있는 카운터 바로 앞 좌석에 앉았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한창 목소리를 키우다가

“저기요, 사장님! 음악 좀 꺼주세요.”

띠옹~~~!!!

 

구석에 앉은 커플을 눈으로 가리키며, 억지 미소와 억지 친절로 나는 말한다.

“영업장이라 끌 수는 없고, 조금 줄여드릴께요.”

 

그러고는 두어 차례 더 그들은 나를 부른다.

“저기요, 사장님! 얼음물 좀 주세요!”

“저기요, 사장님! 물티슈 없어요?”

 

 

암튼 나는 “저기요~ 사장님!”을 부르면 겁이 난다.

자다가도 들릴듯한 그들의 큰 목소리는

오늘도 ‘부산행’보다 더 나의 심장을 벌떡 거리게 한다.

오드리 기자바리스타 오드리의 원미동카페 (1) – 목소리가 큰 사람들

왤까? 절망을 말하면서 희망이 되는 시

괜찮은 사람기형도

                               오드리

어느 날 나는

괜찮은 사람기형도를 만나다.

그의 시 속에서

 

그의 시 속에서

나는 또한나를 만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삶의 순간을

그는 시로 말하고

나는 마음으로 공감하다.

 

슬프면서도 희락을 느끼다.

아프면서도 치유를 얻다.

들릴듯 말듯 작은 탄식 절로 나와

이내 우렁찬 함성이 되어 우주에 쏟아 붓는다.

 

표정은 여전히 심각한데

속은 시원하구나.

너는 변하지 않았는데

나는 희망이 솟는구나.

 

그가아니 그의 시가

시로 표현된 그의 세상에 대한 공감이

내 일상 속에 부드럽게 다가와

강한 힘을 준다.

 오드리 : “기형도 시인 알아요?”

A : “기형도?” “모르는데요…”

 오드리 : “몰라요유명하다는데…”

A : “뭘로 유명한데요?”

 오드리 : “윤동주 같은 천재 시인이래요근데 천재라 그런지 … 요절했다네요.”

오드리는 평소 유식하고 고상한 A에게 질문을 했다.

A는 기형도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잿빠르게 인터넷 검색을 했다.

 

A : “정말 그러네요윤동주와는 다른 시대사람인데천재시인 맞네요.”

 오드리 : “함께 글쓰는 모임에서 다들 잘 알던데요저만 모르더라고요.

다행이네요. A씨도 모르는 것 보면 저만 모르는게 아니네요.

저만 몰라서 좀 창피했는데 말이죠… 하하하~

A씨에게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하는 오드리,

 오드리 얼마전 그 모임에서 기형도문학관에 갔었어요저는 너무나 감동했어요.

특히어떤 시 앞에서 숨이 멎고 온 몸이 떨렸어요.

심지어 그 시의 제목이 어떤 메모인거 있죠.

메모조차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일으키다니천재시인 맞죠?

A그래요기형도 시가 어땠는데요?

 오드리 슬프면서도 공감을 일으키는 구구절절한 표현들이었어요.

제가 느끼기엔 기형도 시들은 매우 현실성이 강하면서도

가슴 속 깊은 곳에 것을 때로는 수필처럼 묘사하기도 하고

상황표현에 대한 단어가 일으키는 공감력이 대단했어요.

저를 눈물나게 만든 글귀한번 들어보실래요?

A어떤 글인지 궁금하네요

<어떤 메모>

출처 :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놀랍게도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와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 이 글에 가득 들어있다.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고하기 싫고할 수 없는 이야기들

글에서라도 공감하며 나는 웃고 또 울었다.

아직 나는 기형도 시인을 모른다.

그의 시는 어렵다슬프다힘들다아프다어둡다.

그런데 쉽고미소짓게 하고안식과 힐링과 희망을 준다.

왤까?

오드리 기자왤까? 절망을 말하면서 희망이 되는 시

4차원의 글쓰기 세상, 2018 만저봐

글을 쓴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쓴 글을 누군가에게 읽히기도 하고 어딘가에 게재한다는 것!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그렇다.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어딘가에 게재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읽힐 수도 있다.

새로운 사실을 알릴 수도 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만저봐!

만화 저널 세상을 봐!를 통하여 그렇다.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저봐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국경을 뛰어넘어서, 계절을 뛰어넘어서

직업을 뛰어넘어서, 주제와 권력을 뛰어넘어서

무엇이든 어떻게든

전하고 또 듣고 나눌수 있는 곳.

4차원의 글쓰기 세상이 바로 만저봐다!

 

만. 저. 봐!

만화저널 세상을 봐~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만저봐를 통하여

몇 개의 코너로 글을 썼다.

 

먼저, 오드리의 한술줍쇼!

라는 코너를 통하여 사람냄새나는 100명을 만나봐야지 결심하였다.

물론 1년안에 100명을 만날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는 지난 해 고작 10명도 못 만났다.

만나면 소중한 깨달음을 주었고

명확한 진리와 유쾌한 교훈을 주었으며

매우 감동적인 만남이었지만 소중한 시간을 자주 갖기나 쉽지는 않았다.

또, 별주는 오드리 [영화편]을 통하여 내가 좋아하는 영화,

거의 빠짐없이 보는 영화를

한 번 용감하게 맘대로 별을 주기로 했다.

글이 중간에 끊어졌다.

영화를 보는 것은 쉽지만 평가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평가하는 것은 쉽지만 공평하게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도 했다.

처음에 마음은 그냥 오드리의 입장에서 별을 맘껏 주자였지만

이것 저것 신경쓰이는 부분이 생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별주는 일은 참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일이다.

만저봐가 아니면 어디서 별을 줄 수 있으랴!

 

그래서 신나는 오드리의 별주기!

2018년 개봉영화편은 다음과 같다.

오드리의 별주기 2018 개봉영화편 순위

제목 흥미 감동 교훈 배우 기타 총점 별점
1위 그것만이 내 세상 5 5 5 5 5 25 5
2위 리틀 포레스트 5 5 4.5 5 5 24.5 4.9
3위 보헤미안랩소디 5 5 5 5 4.4 24.4 4.88
4위 국가부도의 날 5 5 5 5 4 24 4.8
5위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5 5 4.5 5 4 23.5 4.7
6위 변산 5 5 4 5 4 23 4.6
7위 맘마미아2 5 5 3 5 4.5 22.5 4.5
8위 명당 5 5 3 5 4.3 22.3 4.46
9위 신과함께 5 4 4 5 4 22 4.4
10위 월요일이 사라졌다 5 4 4 5 3.5 21.5 4.3
11위 서치 5 4 4 4 4 21 4.2
12위 공작 5 4 4 5 2.8 20.8 4.16
13위 성난황소 5 3 3 5 4.5 20.5 4.1
14위 완벽한타인 5 3 3.5 5 3.7 20.2 4.04
15위 쥬만지:새로운세계 5 4 4 4 3.1 20.1 4.02
16위 독전 5 4 3 5 3 20 4
17위 블랙팬서 5 4 3.5 4 3.3 19.8 3.96
18위 조선명탐정:흡혈괴마의 비밀 4 4 4 5 2.5 19.5 3.9
19위 궁합 4 4 3 5 3 19 3.8
20위 지금 만나러 갑니다 4 4 3 5 3 19 3.8
21위 탐정:리턴즈 4 3 3 4 2 16 3.2
21위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 5 4 3 4 2.9 18.9 3.78
22위 레드풀2 5 3 3 5 2 18 3.6

 

2018년을 보내며 돌아보건데,

만저봐는 과연 행운이다. 힐링이고 치유이다.

공감이고 소통이다. 고급정보마당이면서 공유의 도구이다.

 

결심하기는 2019년에는 좀 더 성실히 글을 쓰고 싶다.

과연!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오드리 기자4차원의 글쓰기 세상, 2018 만저봐

입영 편지

 입영 편지

‘대한민국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다 가는 군대~’ 라고 생각했다.

입영하는 날, 부대 강당에서 연병장으로 나타나는 순간까지도

십분만에 어떻게 된건지 군인처럼 걷고, 경례하고, 소리치는 씩씩한 모습에

기특하기만 했다.

그러나 잠시후 생활관 건물 뒤로 눈도 한번 못마주치고

앞만보며 군인처럼 걸으며 아들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나의 아들이 전쟁터에 나간 것마냥 어찌나 슬프고 안타깝던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날부터 매일 매 순간 아들생각을 했다.

눈물이 절로 났다.

생각속에서 ‘아..들..아~’에 ‘아’자만 불러도 철철 눈물이 고이고 줄줄 눈물이 났다.

 

크리스찬인 나는 매일 기도를 했다.

일단은 0주차인 일주일만에 옷상자가 와야지 사람이 오면 안된다는 주변 조언에 따라

아들이 잘 검사받고 잘 적응하도록 기도했다.

0주차가 끝나는 날 문자가 왔다.

5주후에 갈 자대가 정해졌다는 문자였다.

‘아니 벌써~ 정해졌구나’ 그리고 옷이 오겠구나.

일단 감사했다. 그리고 오늘부터 인터넷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좋은 소식에

더캠프 앱을 통하여 편지를 썼다.

 

폰 자판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보고싶구나,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잘 있니?’

마음에서 쓴 편지는 그 말만 100번 쓰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씩씩한 아들을 보낸 씩씩한 엄마로서 편지를 썼다.

 

‘잘하리라 믿는다 우리 아들~ 사랑한다.

다치지말고 아프지말고 훈련 잘 받고

14일 수료식날 만나자꾸나‘

 

 

 

 

 

드디어 옷상자가 왔다.

옷상자 안에 아들의 손편지가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어버이날 학교수업시간에 쓴 손편지나 카드이후

처음받는 아들의 손편지가 너무나 소중했다.

 

“제가 김치를 먹게될 줄 몰랐습니다…”라는 내용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아들은 김치를 안먹는다. 김치냄새도 싫어한다.

막 무친 겉저리 말고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던 아들이

김치를 먹는단다.

“14일 수료식에 안오셔도 됩니다. 만약 오신다면 맛집은 알아두었습니다.”

라는 내용에 온 가족은 빵 터졌다.

적당한 유머와 진심이 담겨있었다.

 

 

입영한 아들의 손편지 한 장이 지난 며칠 간 꽉 막혔던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나와 남편은 소중한 아들의 손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다보니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눈은 몹시 피곤했지만 마음은 보약을 먹은듯 쌩쌩했다.

 

온 가족은 아들의 손편지에 응답으로 각자 손편지를 썼다.

그리고 필요한 소소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서 택배를 보내면서

택배상자 안에 손편지를 넣었다.

 

나는 남편과 딸이 그렇게 편지를 잘 쓰는지 몰랐다.

진심이 물씬 담긴 편지내용에 또 눈물이 났다.

아들이 손편지에 담긴 진심을 읽고 힘이 나기를 바랬다.

 

 

 

아들에게 손편지가 또 왔다.

‘훈련병’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써있었다.

얼마나 고되고 서러운지를 알려주는 말이었다.

사회가 궁금하다고 써있었다.

일상적이었던 모든 것이 소중하고 궁금해진 것이다.

 

하늘에 별이 쏟아진다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함께 그 별들을 보자고 써있었다.

별들이 위로와 힘을 주었구나 싶었다.

 

편지 첫 줄마다 있는 “저는 잘 있습니다.”라는 말은

잘 있다는데 왜그리 마음이 절절이 아프고 눈물을 부르는걸까?

 

입영한 아들과 주고받은 손편지, 인터넷편지 5주차를 보내고

훈련병수료식을 하였다.

입영한 아들과 함께 온가족은 손편지 속에 가득담긴 ‘마음편지’를 주고받은만큼

촉촉하고 따스한 눈길과 손길로 서로를 안았다.

 

이제부터 진짜 사나이가 되려고 내일부터는 자대로 갈 아들이다.

이 뜨거운 사랑과 손편지가 2년을 채우고도 남을 듯 하다.

 

입영하는 날, 생활관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순간 나라가 싫었다.

잘 키워 놓은 내 아들을 갑자기 데려가다니 원망스러웠다.

오늘 훈련병 수료식, 참 조석으로 변하는게 사람맘이라지만 나는 나라에 감사했다.

아들을 ‘진짜 사나이’로 만들어 주고, 가족들의 숨은 정을 곁으로 들어내주고

온 가족이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더 돈독해지는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부디 남은 기간도 더욱 그러하자고 다짐하면서

오늘도 엄마인 나는 기도한다.

‘부디 다치지말고, 아프지말고, 좋은 사람들과 잘 지내게 해주세요!

건강하여 군인생활 잘 하고, 남은 인생에 힘이 되는 소중한 2년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수료식날 나는 평생의 소중한 보물이 하나 생겼다.

훈련기간 중 1회 PX를 이용할 수 있었던 아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산

‘한정판 카네이션브롯치’ 선물을 손수 달아주었다.

아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한정판 카네이션 브롯치’에 담겨져 있었다.

 

2018년  11월  14일

대한민국에 씩씩한 군인엄마가 된 오드리 기자

오드리 기자입영 편지

바람쐬듯 살련다

바.람.쐬.듯.살.련.다.

저녁을 먹고나서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시원하던 어느 날,

‘바람이나 쐬러 갈까’ 생각하고는 동네 생태하천을 걸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시처럼 마음에서 읽혀졌다.

바람쐬듯

오드리

바람쐬듯 살자꾸나

바람쐬듯 일하자꾸나

바람쐬듯 걷자꾸나

바람쐬듯 미소짓자꾸나

하하하~ 좀 유치한가? 그러나 참 좋은 시 아닌가.

바람을 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사전적의미가 이렇게 나왔다.

 

바람(을) 쐬다 :

  1. 기분 전환을 위하여 바깥이나 딴 곳을 거닐거나 다니다.

예) 공부를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

  1. 다른 곳의 분위기나 생활을 보고 듣고 하다.

예) 그는 외국 바람을 쐬기 위해 여권 신청을 했다.

또한 관련 어휘로는 다음과 같이 다양한 단어가 있었다.

야망, 유행, 기운, 허풍, 공기, 기세 등등

우리는 흔히 바람 쐬기 좋은 날, 바람쐬기 좋은 곳, 바람쐬기 좋은 때 등

이런 말도 많이 쓰기도 한다.

아무튼 ‘바람을 쐰다’는 것은

좀 여유롭고 상쾌하고 기분전환을 주는 의미이다.

 

‘만약에 인생을 바람쐬듯 산다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무언가 열정과 치열함과 최선이라는 단어와는 멀어지는 것 같다.

성공이라는 단어와도 거리가 있게 느껴진다.

바람쐬듯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어감에서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공이라는 것이 꼭 행복을 주는 건 아니다.

성공하고나서 그때서야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찾는 이들도 종종 보았다.

가령 가족이나 건강 등이 그러하다.

 

또한 내가 의미하는 바람쐬듯 산다는 것은

좀더 여유롭고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보겠다는 의미이다.

최근에 나는 비영리단체 일을 시작한지 2년쯤 되었다.

‘비영리’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이 비영리단체 일이란게 물질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비영리영역을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살아오면서 사람이 좋고, 일이 좋고, 사회적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고,

도우며 함께사는 것이 좋았던 나, 그리고 내가 했던 봉사나 단체 일들이

비영리영역이었던 것 같다.

내가 믿고 확신하는 기독교 또한 비영리영역이었다.

 

암튼 일로서는 초보자가 되어 비영리단체를 운영해보니

참 고맙고 힘이 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의예로 섭섭하게 하고 오히려 방해를 하는 이들도 만났다.

앞뒤없는 오해도 받고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를 일들도 겪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좁아지고 치열해지고 안간힘을 쓰고

각박해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요즘이다.

사람이 살면서 불쾌하거나 억울하거나 하는 일을 당할 수는 있다.

예전에는 불쾌한 일도 너그럽게 이해하거나 쿨하게 잊어버리거나

의사전달하고 잊어주거나 했는데,

요즘은 왠지 그런 일들이 잊어버려지거나 용서되지않거나

두고두고 마음 한 켠에 두곤 한다.

 

가을 그리고 바람

그 속에서 다시 ‘나’ 그리고 소중한 ‘인생’을 제자리 놓아 보련다.

끙끙 앓지 말자.

등지지도 말자. 그러나 참지만도 말자.

넘 너그럽지도 말자. 넘 옹졸하지도 말자.

바람 쐬듯 살련다.

 

오드리 기자바람쐬듯 살련다

오드리의 한 술 줍쇼 – 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평소 지역에서 존경받고 있는 정인조 이사장님을 만났다.

어려운 마음과 기대 가득한 마음을 갖고 뵈었는데, 기업리더로서의 카리스마와 인

심 후한 옆집아저씨같은 다정함을 동시에 품고 계셨다.

부천희망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 직을 맞고 계신 정인조 이사장님은

한국지역재단 협의회 모금위원장 겸 이사로 계시면서 부천을 넘어

우리나라 전역에 지역재단을 세우고 선한 힘을 모으고 잘 사용하는데 앞장서고 계신 분이다.

오드리의 한 술 줍쇼는 사람여행이다.

어디한번 정.인.조 사람여행 떠나볼까요?

 

 

 

the 사람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성함은 정.인.조,  그럼 띠는 어떻게 되셔요?

 용띠예요~

 아하~ 그렇군요.  사시는 곳은 요?

 중동 은하마을이요.

 언제부터 사셨어요?

 심곡동 살다가 중동으로 93년인가 이사왔어요.

 네 그리고 이사장님, 교회 다니시죠? 어느 교회 다니셔요?

 처음 부천와서는 기장 부천교회 다녔어요.

기독교 장로회 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에요.

한국 기독교 장로회, 문익환 목사님을 배출한, 문익환 목사님이 교사로 계셨던.

장준하, 문익환 이런 분들이 다 계셨고, 가장 진보적이고

한국 민주화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그런 교단의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와우~~~~~~)

 

 와우~~ 그렇군요.

옛날에 중동신도시가 처움 세워질 무렵, 은하마을에 작은 교회 하나 있었죠?  혹시 아셔요?

 그런데는 사실 관심없었지. 교회가 워낙 많으니까.

상가에 하나 있다가 지금은 없지 않나?

 네, 거기 상가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제가 서울에 좀 큰 교회 다니다가 부천에 이사와서 그 교회다녔었어요. 참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교단에 대해 좀 아시겠네요?

통합,기장,합동,고신 등…. 그런 전통이랄까~ 그런게 있잖아요.

지금 지평교회는 기장이예요.

 

 네, 교단 알죠. 아~ 지평교회가 기장이군요.

이사장님은 부천에 얼마나 사셨어요?

 하~내가 등본 떼봐야 알겠는데

82년도 가을인지 81년도 가을인지 내가 그걸 기억을 잘 못하겠네

초본을 떼봐야 그걸 알거든. 하하하~

 하하하~~

 인터뷰할 때 초본도 필요해요. 그죠? ㅋㅋ

오래 됬지~어쨌든~ 내 인생의 절반 이상 부천서 산거지.

 

 

 

 

 

 

 

 본인소개를 셀프로~  나는 OO다~라고 한다면요?

 나는 00다?~ 딱 막혔네. (하하하~)

(다시금 진지하게 말씀하시기를)

큰 틀에서는 나는 크리스천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그건 사실은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네 멋지세요. 되게 멋지시네요

 뭐 내일이면 또 다를지 모르겠는데………

 

 

 

the 부천

 

 부천에서 36년을 사셨는데 부천 어때요 살기가?

 이제는 부천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지

 부천을 왜 사랑하셔요?

 결과적으로는 사람을 만나게 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람 답게 사는 삶!! 그런 걸 고민하는 사람들을 좀 만난거지

제가 인천 살다가 여기 왔거든.

67년도에 군대 마치고 첫 직장이 인천에 대우중공업이었거든요.

그때 총각때 기숙사에 지내면서 인천에서 첫 발 딛고 있다가 80년도에 첫 직장 사표 내고

두 번째 직장으로 입사했는데, 그 회사가 서울 퇴계로에 있었어요

명동 지나서 퇴계로에 있는 그 당시에 호남 00에 다녔는데

그 사이에 결혼도 했고 80년도에 첫 딸이 태어났지.

 

집이 연안부두였는데, 거기서 충무로까지 출퇴근을 하면 편도 2시간 가까이 걸리지.

직장이 인천에 있을 때야 좋았는데 출퇴근이 넘 지치고해서

무조건 동쪽으로 가야 된다, 그걸 ‘동진정책’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정인조의 동진정책’에 따라서 서울방향으로 더 가까이 가려고 알아봤지.

그 ywca 시흥버들연수원 알아요?  거기 연수원에 갈 일이 있었어.

그래서, 부천 남부역에서 내려서 슬슬 걸어가 보았는데,

야~ 너무너무 좋은거야.

극동아파트가 있었는데, 완전 숲속에 있고 “이 아파트가 좋겠다!” 한눈에 반한거지.

연수마치고 전세 알아봐서 바로 이사 왔지요.

어차피 직장 가까운 데로 와야 되니까. 한마디로 코가 끼게 된 거야~ 하하하~

 

돈 조금 더 벌면 오류동으로 가든지, 암튼 서울로 가려고 생각중이었는데

거기서 주저앉았네. 하하하~

하나님이 내게 부천에서 사명을 주셨나 봐.

암튼 내가 서울로 가려다 그렇게 부천에 자리잡은 거 보면

해석하건데 사명이고 또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부천에 자리잡았다 해도 이렇게 정들고 오래 사시게 된데는

특별히 또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

 

 87년도에 우연하게 동아일보를 구독했는데

동아일보 안 간지에 ymca에서 하는 시민대학이라는 찌라시가 들어있는거야

그래서 야~강사진을 보니 너무너무 좋은거야. 그래서 그걸 신청해서 들었어

 

87년도에 근데 거기서 만난 분들이 지금 부천희망재단 상임이사 김범용씨도 만났고,

박종훈 원장도 거기서 만났고, 오경석 대표도 거기서 만났고

이희병이라는 명성치과 원장도 만났고, ymca의 역사라 할 수 있는 황주석씨

강희대… 그 친구되시는 김관식씨 등 그런 분들을 알게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 된 거예요.

 

87년 민주항쟁 시절에 움텄으니까, 그때 시민대학도 있었고

서울로 못 갔네. 결국.

 

나 고향이 합천인데, 서울간다 서울간다 했었는데 말이야

서울에다 주민세를 한번 못냈네.

 

 부천이 그렇게 인연이 맺어져서

y 활동 오래 했고, y 이사로도 오래 있었고

그 뒤에 강희대 시민상이 만들어지고, 그 뒤에 부천희망재단을 만들고

이런 과정 속에서 있게 된 거에요.

여기저기 꿰어 가지고 지금까지 쉴 수 없게 만드네. 하하하~

 

 

 

 

 

 

the 일

 

 

 부천 얘기하다 보니 일 얘기가 참 많이 나왔는데요

일이 참 궁금해요.

지역재단, 지금 하시는 사업, 교회든…

펼치신 일에 대해 편안하게 말씀해주세요.

 

 지금 가장 비중 있게 현실적으로 부천희망재단이

시민 속으로 들어가고, 진정하게 부천시민들이 믿고 사랑하고

부천시민들의 기부 마인드를 일깨워주고, “기부” 하면 부천희망재단을 찾아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예요.

한마디로 부천 시민 90만의 쌈짓돈부터~ 고액까지

부천희망재단! 여기에 갖다 드리면 이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 기관이다~ 인정받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1의 현재 과제에요

부천희망재단이 딱 7년이 되었어요

올해 8년째이고, 올해는 1년동안  홍보위주의 캠페인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통계로 보면,

한번이라도 기부한 사람을 세어보니 5,000명이 되어요

올해 10,000명 만들어보아서

부천희망재단을 알고, 금액 상관없이 기부하게 된다면

거의 우리 꿈이 이루어지는 원년이 되지 않겠나 싶어요.

 

그거 외에도 교단 활동, 기장이라 했는데

기장에서 운영하는 한신대학 법인 이사를 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공익활동을 일부 하고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들이라서 부천희망재단이랑 같이 잘 되기 바래요.

 

지역재단협의회라고,

한국의 11개 지역재단 합쳐져서 지역재단협의회 가 작년에 정부허가를 얻었어요.

그 지역재단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길 바랍니다.

지역재단이 전국 곳곳에 기초지자체에 설립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여러분과 같은 분이 전국에 막 있을 거 아녜요?

그런 뜻 같은 사람을 모아서 지역재단이 되고,

지역재단 모아서 지역재단협의회가 순수하게 그런 분들과 단체를 서포트 하겠다는 거죠.

 

모금이 잘되면 인건비 지원까지도 해보려고 해요.

지역재단협의회에서 나는 모금 위원장이야.

상당한 금액으로 모금을 해가지고 이것을 어디든지 퍼뜨리고 싶어.

 

 전국 지자체가 243개고 현재 지역재단이 11개예요.

5년 안에 50개, 10년 안에 100개

매년매년 달라진다는걸 실제로 느끼고 있어요.

 

지역재단이 없는 곳에 자원을 발굴해서 그러니까 꿈을 가진 분들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 지역재단을 만들겠다는 프레젠테이션도 할것이고,

그런 관심있는 분들을 만나 후원회도 만들고, 부천희망재단과 같은 지역재단이 창립되기를 바랍니다.

음. 아직 서울에도 없으니, 할 일이 많지요.

 

 

 

 

 실제로 직업적으로 하시는 일은?

 인천서 살다가 충무로로 직장 옮겼잖아요

호남정유로, 지금은 gs칼텍스 이지.

 

2001년도에 나와서 창업을 했어요.

창업을 해서 지금까지 17년 회사를 운영하는건데, 회사가 하는 일은 쉽게 말하면

플랜트(대규모 공장) 정유와 석유화학 회사. 이런쪽에 들어가는 소위 말해서 용역, 검사, 감리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대표이사야, 회사이름은 global21 이고요.

나이가 들어가니까 다음세대한테 물려줘야지 생각이 되요

 

  와~ 이사장님은 전문기업인들에게도 멋진 롤모델이 되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보람된 일이 있다면요?

 참 어째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런 기부와 모금 이런 쪽으로 어쩌다보니 하게 됐네.

난 처음에는 이런 사업도 하고 그러니까, 기부만 하고 그걸로 끝내는 것이 내 본연의 의무랄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기부자가 아니고 모금가가 된거지.

그 길이 쉽진 않아요.  실패가 굉장히 큰 자산이 되는 것 같더라고.

어쨌든 나는 지역에서 돈을 좀 모아야해..

캠페인을 해야해.. 누군가는 계속 뛰어야하거든요.

 

 

 

 

 

 

the 인생

 

 내 인생의 3막의 목표야

  1. 직장

2. 회사운영

3. 모금가

 

3가지의 고비가 있었고, 그렇게 구분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

 인생은 OO다 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요?

 인생은 [ 이타심을 키워가는 과정 ] 이다.

그러면 어떻겠느냐~~~

 오~~~ 이타심이요?

  원혜영 의원 왈,

가족의 범위를 넓혀가서 이웃에 관심을 갖게 하는 그런 얘길 하시던데

우리 마음속에 이기와 이타가 섞여있는데, 그 중에서 이기심이 없어져서

이타심만 있으면, 예수나 석가 등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되겠지,

우리가 성인 반열로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보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내는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것이 안된다고 처음부터 포기해버리면 정말 안되고,

뭔가 닮아가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맞아요. 해보는 거죠~~

 네~ 제가 43살 때 인생목표를 정한 게 있어요

그거 보여드릴까?

 와~~ 네네~

 

 

 가족의 범위를 키워나가라!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야 되거든요.

누구나 한계는 있는데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될 것 인가의 숙제가 남아 있는 거지요.

 

 

정인조 이사장님이 43세에 세운 목표를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성실하고 계획적이고 실천하는 사람, 그리고 이타심을 갖고 있는 사람, 

계획하고 평가하는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존경하지만, 앞으로는 더더더~~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이면서 참 좋은 사람,

정.인.조 이사장님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 일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일을 했을까요?

 나의 어릴적 꿈?

이 일이 아니였으면 다른 것 뭘 했을 것 같아요?

하~, 나는 사실 의사가 되려 했어요.

어머니가 내가 어릴 때부터 병을 앓으셨거든.

그당시에는 거의 불치에 가까운 척추결핵이라는 병인데,

허리에서 냄새가 나고, 고름이 계속 몇 십 년 동안 났지.

하루종인 찬 복대에서 피고름이 났어.

 

그때 나는, 내가 크면 우리 엄마부터 고쳐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

근데 막상 의사가 되어야 하는데 의사공부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

빨리 돈버는 공대를 갔어. 그래서 엔지니어가 된거죠.

 

엔지니어가 되고 대학 과정속에서도 한 때는 대학을 마치고 신학대학을 갈까 생각했어.

신앙생활을 하는 동료 중에서 신학대 총장이나 교수도 나오고, 그런쪽으로 많이 있었고

그 사람들과 교제를 많이 하면서 나도 한번 대학졸업하고

엔지니어지만 목회의 길로 가면 안될까..  생각했었어.

 

암튼 그래서, 이 길이 아니였다면 의사를 하지 않았겠나

의사로 가다가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젊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그랬군요. 이사장님은 효자시네요.

효자시면서, 하나님도 잘 믿으시고, 또 지금은 훌륭한 엔지니어시구요.

인생의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가 있다면 뭘까요?

 

 하…

삶이 뭔지 생각하면서 살아라!

존재이유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살아라!

하하하~ 근데, 존재이유와 성찰 그런 걸 찾으며 살면 재미있을까요?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거기론 갈 수 없는데말이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하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건 진짜 배부른 돼지의 삶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은 그런 분이 많지만, 워낙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어있으니까

거기서부터 자유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큰사위도 엔지니어예요.

그래서 나는 손주가 인문학쪽으로 꿈을 키웠으면 좋겠는데

부모들은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먹고 사냐….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여전히 내가 엔지니어의 삶을 살다 보니, 손주는 인문학관련으로 갔음 좋겠고 하지.

암튼 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그 일이 즐거운 사람은 행복하겠죠 하하하~

 

 저도 제가 하는 일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요.

그래서 저희 단체 정관에, 핵심가치로

-재미있는가? / 의미있는가? / 지속가능한가?

를 물으며 단체 일을 하도록 넣어놓았어요.

 

 네~ 그게 중요해요.

우리 이거 해서 의미만 있고, 재미만 있다,

재미만 있고 의미만 있다,

그렇지 않도록 성찰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간은 시간 속에 존재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가?에 대한 질문은

수시로 해야 된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달라질 수 있고, 그때는 과감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가야 해요.

체면보다는 잘 체크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세요.

 

 

 네~ 귀한 말씀, 잘 새겨놓을게요.

이사장님, 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기억 1>

내가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학교 때

선배의 소개로 진짜 스승 목사님을 만나게 된 거고,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살게 된 것도 이분의 덕이예요.

어떻게 보면 길잡이고이시고, 나침반이 되어주셨지.

돌아가셨지만.

 

고 3때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가정교사 하면서 내 공부도 해야 하는데,

그때가 가장 민감한 시기였는데 어떻게 잘 넘겼어요.

재수도 안 했고..

그 시기, 내 공부하기도 바쁜 때에 돈 때문에 남의 집 입주해서 학생을 가르치는

나 자신, 내 인생이 답답하다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모든 것이 잘 풀렸지.

 

기억 2>

하나 더 있어요. 어머님이 결혼하고, 외갓집이 바로 만주로 이사를 갔어요.

해방되니까 연결이 끊어졌고, 당시 이산가족찾기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70년대 초 쯤에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 육성녹음을 가지고

방송국을 가서 만주에 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가족을 찾았죠.

방송 탓인지 어쨌는지 만주에서 편지가 왔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어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외삼촌 외숙모가 다 돌아가신 상태에서

사촌들하고만 연락이 되었지.

편지 왕래 하다가 우리 어머님을 모시고(79세) 만주로 가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한번 했지.

거기 갔다가 북경까지 들러가지고 만리장성 가고, 그때 어머니 기력이 없어서 내가 업고 만리장성을 갔지.

그것도 기억에 남네.

 

 어머니를 업고 만리장성을요?  정말 정말 사랑스럽고 듬직한 효자셨네요.

 어머님이 15살에 시집을 왔는데 외갓집이 한 2년인가 있다가 만주로 가버렸고.

나를 34살에 낳았거든. 그 뒤로 아파서 지내시면서

아프면 항상 하는 말씀이 “죽기 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 였거든.

그 소원 한번 들어드리려고 늘 생각했었지.

 

어머니는 늘 “내가 쟤 중학생 때까진 살아야겠다”,

“고등학생 때까진 살아야겠다”

그러셨는데….

동네사람들도

“인천댁이 오늘 밤은 넘기나?” 이런 소리 하는 걸 많이 들었거든. 어렸을때…

 

좋은 약이 나와서 나았어.

울어머니가 환갑 될 때 결혼했는데, 나 결혼하고도 24년을 더 사셨지

 

 아~ 그러셨군요. 감사하네요. 건강은 회복하셨구요?

 그 때는 내 마누라가 약사였거든. 돈만 주면 약은 사지.

시골에 계셨지만 며느리가 잘 공급해줘서 어떻게 보면 84세까지 사신 거지.

 

 어머님 신앙심이 깊으셨나요?

이사장님이 어머님의 신앙심을 영향 받으신건 아닌지요?

 신앙심은 무속 열심히 믿으셨지

그것도 신앙심이야~

때가 되면 손 비는 것도 하고

 

죽는다, 산다 할 때는

우리 집에서 굿을 얼마나 했는가 몰라

용하다는 점쟁이 다 데려와서 또 굿을 하곤 했지.

 

 

냉수 떠 놓고 손 비비며 빌던 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어린 정인조.

치열하게 살면서 신앙과 성실로 바르게 자라서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참 어른 정인조.

눈물나게 하는 고생과 난관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세상과 함께한 그 분의 삶은 뭉클한 감동 그 이상의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었다. 

 

 

the 인생

 

 

 현재 이사장님의 행복지수를 점수로 말한다면요?

 한 90점은 되지 않겠나

 

 10점은 왜 모자른 걸까요?

 세상에 대한 걱정, 회사에 대한 걱정, 시집간 딸에 대한 걱정 등등 때문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앞날은 모르잖아요. 그래서 걱정을 하지.

 

살면서 내가 너무너무 행복하다 느낄 때가 한번은 있었어요.

아무 걱정이 없었을 때가 있었어.

하나님이 시기하면 어떡하지 싶을 때가 있었지.

그게 애들이 시집 가기 전,

애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다 건강하고 걱정 없고

여러 여건들이 교회, 회사, 하는 일들이 잘 되었고

잠깐 그런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도 사람은 약간의 두려움? 그런 게 있더라구.

때로는 무인도 가서 있고싶은 생각도 있지.

 

 무인도요?  와~~ 굉장히 기대되네요.

10년 후 인터뷰 다시 해주세요.

 그래요. 아직도 마음은 청년 같은데. 하하하~

 하하하~ 너무 즐거운 인터뷰였고, 뭐가 뭉클한 감동과 깨달음이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한 장소는 글로벌21이 있고,

정인조 이사장님의 헌금으로 지평교회가 세워진 건물 옥상이었다.

옥상에는 작은 텃밭이 아기자기 있었고 야채보다는 봄꽃이 가득했다. 

차가운 봄바람에 인터뷰 도중 다시 글로벌21 사무실로 옮기기도 했는데

그 곳에서 ‘플랜트’라는 기업전문 용어를 들었다. 신기하고 존경스러웠다.

 

결코 한 사람의 인생이나 업적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던한 노력과 성실!!

정.인.조 라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로 얻은 많은 것들은 세상과 나누기 하는 통 큰 선택!!

그 값진 선택이

그가 믿는 이세상 너머 있을(있다면, 오드리는 믿는) 저세상에서도 부요하고 존귀한 자리로

그를 인도하리라 생각되었다. 

 

 

오드리 기자오드리의 한 술 줍쇼 – 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커피와 정치가 있던 청탑다방에 다녀오다

강릉, 명주동 뒷골목에서 청탑다방을 만났다.
간판도 맘에 들었고, 강릉 정치 일 번지였다는 점이
더욱 나의 발목을 잡았고, 시선을 모았다.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굳게 닫혀있어서 몹시 아쉬웠다.

커피숍의 역사와 유래를 공부할 때
역사 속 카페들이 의식있는 시민들의
정치, 예술, 문화, 사회의 공론장이 되거나
토론, 담소의 장이었다고 배운 것도 생각이 났다.

청탑다방!
1959년 개점이후 지역의 정,관, 언론계 인사들의
단골집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강릉정치 일 번지를 자랑하였던 곳,
강릉시와 명주군에 시장과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반드시 들러 인사를 했을 정도였고,
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도 명절에 들려서
시민을 만나 담소를 나누던 곳이었다.
단골손님중에 애국지사 김삼 선생도 있었고,
최각규, 김진선 전 지사 등 강릉을 거쳐간
굵직한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호돈 전 강릉문화원장도
1989년 강릉부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청탑다방에 들려
부임인사를 했을 정도로
강릉의 주요 인사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곳으로
오랫동안 단 돈 천원으로 커피를 팔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단 돈 천원에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신문을 읽고,
당시의 정치를 담소하였던 것이다.

청탑다방의 대표였던 전영자씨는
단골 손님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집도 너무 낡아서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고 커피숍을 좋아한다.
그 맛과 향에도 반했지만,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체가 좋다.
그리고 또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마신
커피 그 자체가 좋기도 하다.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것이 좋고
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도 좋다.

커피의 역사에서 커피하우스는
꽤 오랫동안 사회활동과 의사소통의 중심지였으며,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혁명의 근거지였다.

미국 독립혁명의 시발점이 된 보스톤차 사건은
‘그린 드래곤 인 태번 앤드 커피하우스(Green Dragon Inn, Tavern and Coffeehouse)’에서
모의되었고,
미국의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dence)이
최초로 일반 대중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된 곳은
필라델피아의 상인들이 만든
‘머천트 커피하우스(Merchant Coffeehouse)’가
이름을 바꾼 ‘시티 태번(City Tavern)’이었다.
시티 태번은
지금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발전한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의
공동회의장이기도 하였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적인 대화와 마음을 터놓는 교류”를 나눈다는
명목으로 드나든 커피하우스였다.
미국의 독립과 건국은
커피하우스에서 볶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초창기 미국의 커피하우스는
사람들의 의사소통과 토론과 공론이
모이는 장소였다.
커피하우스가 생겨나자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체스와 같은 게임을 즐기고
그날의 뉴스를 논하고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다.

커피하우스가 자연스럽게
교양있는 사람들이 모여
공론의 장을 제공하자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한
토론과 함께 통치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커피점은
1554년에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던 시절의
콘스탄티노플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물론 그 전에도 메카나 카이로 등
이슬람 지역 여기저기에
커피하우스는 많이 있었으나
일반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50년 영국에서 생겼는데
곧 커피하우스는 전염병처럼
나라 전역에 전파되어 없어서는 안될
만남의 장소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처음 나타날 때는
고등교육을 받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보이던
부르조아 집단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계층으로
부상하던 때였다.
커피하우스는 주로 부르주아 상인과
지식인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고
곧바로 공개적인 토론으로 이어져
순식간에 각종 경제와 정치 문제로 확대되었다.

1페니만 내고 커피 한잔을 사서
하루 종일 커피하우스에 앉아 남들이 나누는
이와 같은 토론과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교(One penny university)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들은
저마다 단골손님의 유형이 달랐다.
작가들이 즐겨찾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던 반면,
의사, 정치가, 상인, 변호사, 성직자, 무역업자,
뱃사람들이 즐겨찾는 커피하우스가 따로 있었다.

주간지 ‘태틀러(The Tatler)’와 ‘스펙테이터(Spectator)’ 같은
언론지도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당시 태틀러의 편집자였던
리차드 스틸(Richard Steele)은
태틀러의 주소를 주로 과학자들의
정보교환의 장소였던
‘그레시안 커피하우스 (Grecian Coffee House)’로 기재하고
그 곳에서 기사를 쓰고 편집했다고 한다.

특정 고객층이 단골 커피하우스에 모여
자유롭게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게 되자
곧 커피하우스는 우체국 역할도 하게 되었다.
즉 특정 고객들이 출입하는 커피하우스를 기반으로
편지나 신문의 발송과 배달을 조직화한 것이다.

커피하우스에 자루를 걸어놓으면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그 자루에 편지를 넣고,
어느 정도 편지가 모이면 배달하는 시스템이었다.
국가에서도 1683년에
이러한 방식의 우편제도를 도입하였는데
당시 우체국뿐 아니라
커피하우스도 편지를 모으는 장소로 지정했다.
1710년대 파리에는 300여 곳이 넘는 카페에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고
보르도, 낭트, 리옹 마르세유 등
프랑스의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맹이어서
사람들은 뉴스를 입소문으로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파리의 카페에서는
마치 영국의 1페니 대학교처럼
글을 읽지 못하였더라도
신문지면을 가득 채운 뉴스를 들을 수 있었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도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마침내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카페 ‘드 포아(de Foy)’에서
“가자 바스티유”라는 외침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대서막이 오르게 되었고,
커피하우스는 사회의 대변혁을 이끄는
혁명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커피를 마실 때
맥주나 물처럼 후루룩 마시지 않는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커피하우스의 역할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고 있다.
오늘날의 커피점은
더 이상 사회와 정치활동의 중심이 아니다.

예전의 커피하우스가 네트워크의 장소라면
요즘은 오히려 고립의 장소이기도 한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의 이념을 소통하는 곳에서
단순히 커피라는 상품판매점으로 전락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화장실을 찾거나,
와이파이를 이용하기 위해서
커피숍을 이용하기도 한다.

나는 부천에 청탑다방 하나 있었으면 한다.
시민들이 모여 자신이 사는 도시의 성장을 위하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이슈문제를 공론화하여
더 좋은 방향을 찾아보기도 하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작품과 멋을 만날 수 있는
부천만의 청탑다방,
1년 8개월전 시민공익을 위하여
우리가 만든 공간
시민공익플랫폼 채움이 만들어가고 싶다.

시민들의 속삭임이 살아서 정계를 흔들고, 바로잡고,
도시가 함께 성장하는 꿈틀꿈틀되는
부천의 청탑다방이고 싶다.
오드리와 서블리가 만든
우리 채움이.

(돕는 글 : 채움 단체는 의정모니터링을 하는 시민공익활동 단체이며
시민활동을 위하여 열린 공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
운영을 돕고자 자체수익활동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판매하고 공간대관 사업을 하기도 함. )

아무튼 강릉에도 또다른 청탑다방이 다시 문을 열기를 바래본다.

오드리 기자커피와 정치가 있던 청탑다방에 다녀오다

오드리의 사람여행 – 동네삼춘 신명철 편집디자이너를 만나다

 

 

the 사람

 

지역에서 마을활동을 하시는 신명철 샘은

개인적으로는 오드리와 서블리가

삼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다정다감함 그리고 호탕한 웃음 등

편안한 삼촌같아서 그리된 것인지

언제부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신~삼촌~~~이라고 부른답니다.

 

신~삼촌은 한번씩 힘을 내라며 찾아와 주시고

또 밥을 사주시곤 한답니다.

 

꽁자 밥을 얻어 먹을 순 없지싶어

밥 한 술의 인터뷰를 진행,

신삼촌 이야기를 온 세상에 알려봅니다.

 

 

이름은?

신명철 (45세/ 범띠)

별명은 호빵맨

오~ 왜 호빵맨?

잘 웃어서

댁은 어디셔요?

여월동 (닭띠~ 그럼 몇살일까요?)

언제부터?

고2때부터 부모님은 부천에 계셔서 왔다갔다 하다가

졸업하고부터 쭉~ 살았어요.

고향이?

부산이요

오!! 부산~ 좋다요

부산에서 한 곳을 추천하면 어디예요?

저는 집 학교 교회 만 다녀서 잘 몰라요

기껏해야 해운대정도

아하~~교회 다니셨어요?

네, 교회오빠 딱~ 그 스타일이었어요. 그때. 하하하

하하하

 

 

 

부천 어때요?

그땐 그냥 살았어요. 지금은 좋아요

그러나 나중에는 공기좋은 곳으로 갈거예요

부천~ 하면 딱? ( )

 

 

공기좋은 곳이라면?

동해, 제주, 강원도 등등 있잖아요.

오~ 동해… 자주 가셔요?

네, 자주 가요

땅도 사놓으셨나요?

하하하~ 차차 사놓아야죠.

오모나~ 친하게 지내자구요 하하하~

 

 

the 일

 

하시는 일은요?

편집디자이너

회사이름이?

아이에디트

오~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이름이네요

언제부터 하셨어요?

3년전 개업을 했지만

실제 그 전에 직장생활은 18년했죠.

 

한가지로 오래하셨네요.

직장생활에서 에피소드 하나?

직장생활할 때 거래처에 와이프가 다녔어요.

키도 크고 예뻐서 우리 직원 7명 모두가 호감이 가득했었죠. 그러던 어느날, 와이프가 콜라를 사갖고 왔는데

다른사람들은 작은 용량의 콜라를 주고

저에게만은 1.5리터 큰병을 주었어요. 그때 딱~ 알았죠. 와이프도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제겐 와이프가 첫번째 여자예요.

3년사귀고 결혼했어요.

 

그렇게 해서 지성이가 태어났군요

네, 지성이는 결혼하고 6년째 태어났어요.

인공수정으로요

그때 참 노력많이 했어요

술도 끊고 운동도 많이 하고 살도 빼고

특히 수영을 많이 했어요.

요즘 살이 쪄서 다시 수영을 시작했어요.

오~ 수영,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오리발끼고 연수반인가 그거 하고 싶어요.

하하하~ 저도 그거했었어요.

요즘 수영도 열심히 하고

사업도 확장하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 어떤 확장일까요?

간판업을 겸업으로 하려구요

오~ 간판업 좋네요.. 요즘같은 불경기에 그나마 간판업은 불경기는 아닐거예요. 저도 관심있는데 크크크~

나중에 언니네식빵가게 같은 빵가게도 하고싶어요

오~ 빵가게요

네~ 먹거리사업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농부)다

나는 농부다

3년전 농사를 지었는데 참 열심히 지었어요

땀을 뻘뻘~ 흘리며 농사를 지으면 보람도 있고요

요즘 바빠서 자주 못갔더니 밭이 엉망이예요.

잠시 올해는 쉬려구요

그러나 죽을 때까지 농사는 짓고 싶어요

오~~ 진정 (농부) 맞네요.

 

 

 

 

인생은 ( ) 다

선택

제가 별로 화를 안내는 사람인데 가끔 화를 낼때가 있어요.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해야 되는데

누군가가 선택하게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정말 화가 나요.

그래서 회사두 고만두게 되었거든요.

 

네 맞는 말씀 같아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선택해야하고

또 하고싶은 것을 해야겠지요.

저처럼요~~~하하하~~~

 

 

 

 

 

행복지수 1부터 10중에?

0 또는 10

어느때는 0 어느때는 10인것 같아요

늘 넘나들죠.

10처럼 되고 싶은 거라고 해야겠죠?

아~ 그런 뜻이^^

 

 

 

동네삼춘처럼 채움을 챙겨주고

오며가며 밥 한번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분이

제 주변에 계셔서 참 좋습니다.

다음에도 맛있는거 사주세요~~ 삼춘~~~!!! 하하하

<끝>

 

 

 

 

 

오드리 기자오드리의 사람여행 – 동네삼춘 신명철 편집디자이너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