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성희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시인 기형도를 찾아서

광명시에 있는 기형도 문학관을 다녀왔다. 수년 전부터 지방에 근무하는 아들을 픽업하러 광명 KTX 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기형도 문학관을 몰랐나 했다. 알고 보니 2017년에 건립되었단다. 문학관은 신식 건물답게 깨끗하고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기형도 시인의 누나가 관장으로 있는데 시인이 살았던 집터에서 조금 비켜지었단다. 원래의 집터 위로는 다리가 놓아지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문학관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기형도 시인의 사진이었다. 우수에 찬 눈빛이 나를 확 끌어들였다. 순수하면서도 어두움이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사실 나는 기형도 시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알고 있다면 그의 시 ‘엄마 걱정’이나 ‘빈집’ 정도였다. 문학관을 둘러보며 그의 삶과 시와 행적을 더듬는다. 1960년생, 한 살 어린 내 남동생과 동갑이니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의 삶은 내 어린 시절과 비슷했다. 시인처럼 서울 근교가 아니라 소읍이었지만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대학교육까지 받은 우리 아버지도 병든 몸으로 방구석에 누워계셨고 엄마가 보따리 행상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시인의 ‘엄마 걱정’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런 추억거리라도 있어 행복하다.

‘나리 나리 개나리’ ‘가을 무덤‘에서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삶을 등진 남동생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 살 차이라고 지지 않고 맞먹으려고 해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지만 서울 살이에서는 서로 의지가 되었던 든든한 동생이었다. 그 일로 우리 가족은 아직도 우울한 집단 최면에 걸려있다.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금기다. 어쩌다 동생의 친구라도 만나면 엄마는 몇날 며칠 식음을 끊고 기도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가족들은 어찌 견뎠을까. 가구나 전자제품은 하나의 선택으로 10년을 좌우한다지만 사람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의 시 ‘위험한 가계’를 읽으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일부러 구겨 넣고 꺼내지 않았던 유년시절의 무의식이 떠올라 버렸다.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던 아픔들이 고백성사처럼 터져 나왔다. 그 시절엔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가난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고 그래도 앞으로의 희망의 끈을 바라보며 살았다. 시인처럼 똑똑한 아이가 아니어서 무뎠는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그 시대 사회라는 것에 눈감아 버려서, 적절히 타협하며 나 편한 대로 살았을 수도 있다. 전시실에 걸려있는 그의 생애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가슴 깊이 상처를 묻어두었지만 공부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모범생으로 살았다. 자신 안에서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음울과 허무가 쑥쑥 자라는 모습을 속수무책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형도 문학관을 다녀온 뒤 그의 시 90여 편을 찾아 읽어 보았다. 거의가 죽음과 허무와 우울로 가득 차있다. 마치 그에게 전염된 듯 나도 그 세계에 빠져들어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29년의 짧은 인생으로 막을 내렸지만 살아있는 우리는 아직도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피우느라 매일이 전쟁터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했지만 그는 죽음으로 자신을 사랑했고 그의 시로 다시 태어났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이제부터 <오래된 서적>그의 검은 페이지를 펼쳐볼 것이다. 우울하지만 묘하게 끌어들이는 그의 문학적 순수함을 배우고 싶어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던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그가 간지 30년이 된 지금 이제 그는 빈집에 홀로 갇혀있지 않았다.

그의 시는 외로운 사람들의 적막한 영혼을 흔들고 문학관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있었다.

한 성희시인 기형도를 찾아서

행복하면 돼지~

1월부터 부천시에서 주관하는 ‘책 쓰기 지도자 양성과정’을 듣게 되었다. 새로운 출발이다.

내겐 배움의 욕심이 많은 가보다. 글쓰기를 좋아해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대학원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적극 지원했지만 경제적 부담으로 포기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사회복지와 상담심리학을 공부했다. 혹시나 하는, 앞으로의 생계를 위한 보험 같은 거였다.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했다. 졸업 한 학기를 남겨 놓고 포기하고 말았다. 공부에 대한 지독한 스트레스로 몸이 망가져버려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능률이 오른다는 걸 뼈아프게 체험한 순간이었다. 설상가상 갱년기까지 겹쳐 삶의 의욕이 시나브로 빠져나갔다. 집에만 있으면 우울증이 심해질까 봐 이런저런 활동을 했지만 즐겁지 않았다. 참 이상했다.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하려 해도 내 맘을 내가 컨트롤할 수 없었다. 고1 때 한 맹장수술(충수염)을 시작으로 암, 대장, 담낭 등 몇 번의 수술로 건강 염려증도 생겨버렸다. 부르시면 언제라도 가겠다고, 마음을 비웠지만 빈말이라도 내가 없으면 자기도 따라가겠다는 남편의 위로가 살아갈 힘이 되었다.

2년 전 카툰에서 실시하는 시민만화기자단 수업을 듣게 되었다. 9개월간의 교육을 수료하고 ‘만저봐(만화저널 세상을 봐)’ 기자로 거듭났다. 처음엔 그냥 그냥 그랬다. 뭘 해야 할지 확실한 주제도 없이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2년이 흐른 지금 체계가 잡히고 점점 의욕이 생기고 삶이 즐거워지고 있다. 이제 ‘만저봐’는 내 힐링의 공간이 되었다.

책 쓰기 지도자 과정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36주의 심화과정을 거치고 나면 뭔가 달라진 내가 되어 있을 것 같다. 만저봐 처럼….

‘돈 같은 보상보다 자기만족을 위해 일해야 성과가 더 좋다.’ 신문에서 우연히 읽게 된 글귀인데 내 마음에 쏙 든다. 보수 같은 외부적 보상과 상관없이 자신의 흥미나 만족감을 위하여 일할 때 더 즐겁고 성과도 좋다는 것은 내 평생의 체험으로 잘 안다. 이제까지 돈을 위해 일해본 적은 학교 졸업 후 1년이 전부다.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30년을 넘게 살았다. 그렇다고 집에서 무위도식한 건 아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봉사하며 활발하게 살았다. 보수가 없었을 뿐이다. 남편은 그런 노력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으면 자기보다 연봉이 훨씬 많았을 거라고 농담을 해댔다.

동양철학을 공부한 지인이 내 사주를 봐준 적이 있는데 ‘아름다운 정원에 잘 가꾸어진 작은 나무’라 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보여질 때 행복하단다.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언변이 좋거나 특출나게 잘나지 못해 사람들 앞에 나서진 못하지만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할 때 즐겁고 생기가 돈다.

이제 나쁜 기운은 다 떨쳐버리고 올해는 일상이 즐겁고 에너지가 넘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재적 동기에 따라 새롭게 시작하는 작은 도전을 위하여~~~ 힘차게 파이팅이다!!!

한 성희행복하면 돼지~

<한성희의 작가 산책> 시인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 천양희, 오래된 가을

 

 

시인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렵게 강연을 부탁하자 그녀는 선뜻 수락하셨습니다. 건강은 좋지 않지만 노력해 보겠다면서요.

그녀의 건강이 좋아 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쓴 여러 권의 시집과 최근 출간한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학나들이에서 만난 그녀는 시 만큼이나 감성적이고 우아했습니다.

1942년 부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그녀는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박두진 선생님의 추천으로〈현대문학〉으로 등단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1980년까지 시집을 한 권도 내지 못하고 작품도 발표하지 않고 문단활동도 하지 않으며 숨어 살았답니다. 그 공백기는 이혼 이후 의상실을 운영하며 지낸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걸린 결핵에 심장병까지 겹친 냉혹한 현실 앞에 몇 번이나 죽기를 시도하고 현실적 어려움과 정신적 갈등으로 좌절해야 했던 참혹한 시기였답니다. 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견디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표현대로 ‘숨어서 피는 꽃’처럼 꾸준히 시를 써왔답니다.

죽기 위해 찾아간 고창 선운사 직소폭포에서 오히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시를 하나 건져 오기도 했습니다. 처절한 고통과 절망을 딛고 시적 성숙을 이룩한 그녀는 시인은 ‘무엇을 쓸 것인가’ 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하답니다. 경험과 상상력과 새로운 인식이나 발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기만의 체험이 시의 씨앗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20년의 긴 공백 기간을 깬 그녀는 그 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오래된 골목’,  ‘사람 그리운 도시’,  ‘너무 많은 입’, ‘마음의 수수밭’ 등 주옥같은 시를 발표했습니다.

‘문학의 숲에서 하루를 너끈히 보낼 그대여, 이제는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울지 말기를, 어떻게 살지 하며 묵은 울음을 참던 친구여, 이제는 문학의 숲에서 시의 세례를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기를… ’ 

한 달 내내 그녀의 시의 숲을 거닐며 마냥 행복했습니다.

한 성희<한성희의 작가 산책> 시인 천양희의 『시의 숲을 거닐다』

2018년 즐겁게 걸었던 어슬렁 만저봐路드 (성북동, 청계천, 강릉, 부천)

즐겁게 걸었던 어슬렁 만저봐路드 (성북동, 청계천, 강릉, 부천)

시민만화기자단 수업을 받고 매주 수요일 모임을 가지기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처음 1년은 로드맵도 정하지 못한 채 어설프게 지나가버렸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마음만 앞섰지 눈에 확 잡히는 게 없어 무척 마음 졸였습니다. 그래도 참 열심히 모였지요. 웃고 떠들고 얼렁뚱땅 시간만 죽인 것 같았는데도 뭔가 틀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카툰 작가들을 초대해 작품을 전시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런 만남들을 모아 ‘만저봐’ 창간호를 만들게 되고부터 한 달에 한 권씩 ‘만저봐’가 탄생했습니다. 열한권의 ‘만저봐’를 쭉 늘어놓고 바라봅니다. 참 감개무량합니다. 매 호마다 주제를 정해 그 주제에 맞게 열심히 집필하신 만저봐 기자님들의 열정적인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특히 이원영 이사님이 기획하신 ‘만저봐路드’ ‘어슬렁 성북동’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요.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하~ 역시 기획의 천재셨습니다.

광화문에서 만나 경복궁, 청와대를 지나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 한양도성을 넘어 심우장, 북정마을, 수연산방, 길상사를 둘러보고 다시 안국동으로 내려오는 코스였지요. 우리는 그 길에서 민비의 죽음과 조선 말기의 슬픈 역사를 바라보고 만해 한용운과 상허 이태준, 백석과 자야, 시인 정지용, 김광섭, 소설가 김유정 박태원 등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예술인들과 만났습니다. 어슬렁어슬렁, 알맞게 기분 좋은 정말 멋진 로드였습니다. 성북동의 성공에 힘입어 이사님은 이번엔 청계천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어슬렁 청계천은 왕십리에서 출발해 청계천을 통해 중명전까지 가는 코스입니다. 상왕십리에서 만나 청계천 박물관과 동대문 역사공원, 광장시장, 광통교, 배재학당에 중명전까지….

그날따라 날씨가 우리를 너무 반겨주었습니다. 햇빛 쨍쨍, 그늘도 없는 청계천변을 현기증이 날 만큼 많이 걸었지요. 청계천 박물관에서 50년대 청계천의 역사와 복원까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의 청계천 이야기까지요. 더위에 지쳐 있을 땐 뭐니 뭐니 해도 먹는 게 최고지요. 광장시장에 들러 육회와 낙지 탕탕이로 맛난 점심을 먹었습니다. 먹고 나니 힘이 나 광화문을 지나 덕수궁 뒤편에 있는 중명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어슬렁 청계천은 5-60년대 대한민국이 헤쳐 나온 역사만큼이나 복잡하고 힘들었지만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소중한 추억이었습니다.

세 번째 路드는 카페인 강릉입니다. 강릉은 카페 테라로사와 함께 커피로 유명해졌지요. 만저봐 강릉 지부장이신 카투니스트 이현정 작가가 계시는 곳이죠. 현정 작가가 보내오는 그림과 카페이야기에 푹 빠져 강릉 갈 날만 고대했습니다. 현정 작가의 카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곳에서 전해지는 커피 향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몽환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아련한 카페들을 다 가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현정작가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카페 <게락>에서 이제까지 맛보지 못했던 커피 최고의 풍미를 느꼈습니다. 밤에 잠을 못 자든 말든, 속이 쓰려 아프든 말든 종류별로 다 마셔봤습니다. 그리고 카페인에 취해 명주동 골목투어를 하고 청탑 다방과 봉봉 방앗간을 기분 좋게 둘러보았습니다. 오후엔 카페 <웨이브라운지>에서 경성현 선생님의 커피강의를 들으며 커피를 또 마셨지요. 밤새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지만 그 시간만큼은 행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원주 뮤지엄 산은 또 얼마나 신비롭고 아늑하던지요. 1박 2일이 꿈처럼 지나가버렸습니다.

인문 로드의 대미는 바로 ‘어슬렁 부천’입니다. 이 길을 위해 성북동과 청계천, 강릉을 다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고 보니 부천도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답게 구석구석 다녀볼 길이 많았습니다. 수주 변영로 시인과 양귀자 소설가, 정지용 시인, 펄벅, 아동문학가 목일신 등등….

이런 알짜들을 이원영 이사님과 카툰 식구들이 놓칠 리 없지요. 그분들이 살았던 곳과 걸었던 길을 몇 번이고 답사하며 로드맵과 매핑을 제작했습니다. 이제 그 일부 길을 따라가 봅니다. 오전 10시, 부천시청(현 원미구청)을 출발해 8년 여 동안 원미동에 거주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던 양귀자 소설가의 ‘원미동 사람들’ 배경지에 도착했습니다. 소설의 주 무대였던 원미동 23통의 옛 전경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아귀다툼을 하면서도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던 주민들의 따뜻한 정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듯 했습니다. 소설 속 밤무대 가수 은자가 불렀다는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을 들으면서 원미산 둘레길을 지나 정지용 시인이 3년 동안 살았던 소사동 집터까지 총 3구간을 걸었습니다. 걷는 중간중간 이벤트도 있었지요. 양귀자, 정지용의 시와 소설을 카툰으로 보여주고 시민이 직접 참여해 시와 소설 중 일부를 목소리로 담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음악과 이야기에 취해 지루할 틈이 없었지요.

2018년은 만저봐路드가 있어 정말 즐거웠던 한 해였습니다. 내년엔 또 다른 볼거리 더 풍성한 프로젝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기대되는 새해입니다.

한 성희2018년 즐겁게 걸었던 어슬렁 만저봐路드 (성북동, 청계천, 강릉, 부천)

<한성희의 작가 산책> 시인 함민복의『미안한 마음』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강화도 시인 함민복. 그의 고향은 강화도가 아니었습니다. 1962년 충북 중원 산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읽을거리도 마땅치 않은 시골이었기에 문학은 그저 꿈만 꿀뿐이었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동안 발전소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하지만 시에 대한 열정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그는 다시 서울예대 문창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때부터 가난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답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시를 쓸 수 있고, 시가 있어 행복하답니다.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로 등단도 했습니다. 마음을 가장 많이 움직이는 순간에 대한 기록이 글쓰기인 것처럼, 시란 ‘자기반성’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강화도 남쪽 끝자락 동막리에 있는 버려진 농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익숙해져 버려 자본주의에 관한 욕망을 잊어버린 지 오래랍니다. 욕심이 없으니 부러운 게 없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도 많다는 생각을 할 때, 자신의 소유에 대해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도 든답니다.

10년을 계획하고 들어간 강화도에서 그는 석양주 한 잔에 취해 뻘에 발을 담그고 낙지 잡고 망둥어 잡는 재미에 푹 빠져 사는 강화도 어민이 다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가 저절로 그를 찾아왔습니다. 강화도의 삶 자체가 시랍니다. 등단 후, 「우울氏의 一日」,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미안한 마음」 등 정말 말랑말랑한 시집과 산문집을 냈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 문학상>, <박용래 문학상> 등 상복도 터졌지요.

강의가 끝나고 몇몇 열성팬들은 그를 강화도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며 따라나섰답니다. 서툰 강화도 길을 헤매며 더위에 그를 기다리게 했지만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기다려준 시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강화도 갯벌 어디선가 부르면 돌아볼 것 같은 수줍고 편안했던 함민복 시인.

소박한 그의 삶만큼 소박한 시어로 우리 앞에 또 나타나겠지요.

한 성희<한성희의 작가 산책> 시인 함민복의『미안한 마음』

홍임 모(母) 전상서

 

 

813년 8월 다산 정약용이 그린 또다른 매조도. 시집 간 딸에게 결혼선물로 주기 위해 같은 해
7월에 그린 매조도와 구도가 비슷하지만, 이 그림에는 새가 한마리만 있다.
강진에서 얻은 딸 홍임을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이 매조도는 2009년 처음 공개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산초당

 

홍임 모() 전상서

홍임 모, 안녕하신지라? 갈바람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던 날 초당에 갔었지요. 원래 목적은 김영랑 시인 문학제에 갔던 길인데 그래도 다산초당에는 한번 들려야하지 않겠냐는 동인들의 의견에 휘적휘적 초당에 올랐지요.

그때까지도 <목민심서>나 <흠흠신서>를 쓴 실학의 대부 다산만 알았지 홍임 모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답니다. 어메는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산의 숨겨진 여인으로 어둔 초당에서 뱅뱅 돌고 있었지요. 250년이 지난 후에 어느 소설가가 쓴 ‘다산의 사랑’이라는 책을 통해서 홍임이와 홍임 모를 알게 되었어요.

18년 동안 유배생활하면서 아무리 학식이 많은 선비라도 남자 아닌감요? 아녀자 없이 끼니때마다 음식하고 빨래하고 집안을 건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홍임 모가 없었다면 아마도 다산은 풍으로 팔다리가 마비되었을 때 이 세상을 하직하고 그 많은 저술도 하지도 못했을 것이구먼요. 지극정성으로 모신 남당네 덕분에 다산이 75세까지 장수했을 것이고요. 청상과부가 된 홍임 모를 다들 남당네라 불렀다지요.

초당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습디다. 집터만 그대로지 지붕은 기와로 이고 마루랑 토방은 보수공사를 한다고 새끼줄을 처 놔 제대로 보지도 못했네요. 그래도 제자들이 고아 드시라고 가져온 잉어를 놓아준 연못은 그대롭디다. 거기서 남당네가 차를 덖고 마루에 걸레질 하고, 제자들 밥해 먹이고 다산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시중을 드는 모습만 상상하며 둘러보았답니다. 울울한 대숲과 차나무 밭을 지나 백련사 가는 길목, 굽이굽이 선상님을 위해 종종걸음치며 오르내렸을 오솔길을 나도 따라가 보았네요. 백련사 공양주로 있으면서 절 일하랴 초당에 와 살림하랴 하루도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지만 그래도 어메의 마음은 참 행복했겠어요. 게다가 홍임이까지 낳고 얼마나 알근달근 살았을까. 일찍이 청상되어 이집 저집 허드렛일 하며 몸 붙일 곳 없이 살다가 비록 귀양살이는 하고 있지만 한양에서 큰 벼슬을 하던 명망 높은 분의 소실도 들어갔으니 말이에요. 그래도 홍임 모로 본다면 다산이 해배 되지 않는 게 더 행복했을 텐데. 마음속으로는 선상님이 평생 강진 초당에서 어메랑 홍임이랑 같이 살았으면 하고 바랬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세상일이 고러코롬 마음대로 되던가요?

어린나이에 시집와 하늘같은 지아비만 바라보며 늙어가는 본부인이 있고, 대나무처럼 곧게 자라는 아들들이 있는데 말이에요.

아들 학유에게서 남당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집올 때 입었던 다섯 폭 붉은 치마를 강진으로 보냈다지요. 그것을 보고 본가에 살고 있는 부인을 생각해 달라는 그 애처로운 맴을 저도 알 것 같아요.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데 좋은 시절 청상 아닌 청상처럼 외롭게 살고 있는데 귀양살이 간 지아비가 젊은 여인네 수발을 받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편했겠어요? 여성 상위시대라는 오늘날에도 남편이 딴 여자를 보면 화병이 도저 죽어뿔 것 같은데. 그 맴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상님은 홍씨 부인의 빛바랜 치마폭을 싹둑 잘라 거기다 자식들 일깨우는 글을 썼다니, 같은 여자 맘으로 쪼가 거시기 했겠어요. 아무리 학식이 많아도 남자는 남자지요. 단순한 남정네들이 요로코롬 복잡 미묘한 여자 맴을 어찌 알겠어요.

그러니 선상님이 유배에서 풀려나 홍임 모녀를 불러들였지만 홍씨 마님이 당차게 밀어낸 거지요. 십여 년을 유배지에서 마나님 대신 지극정성으로 지아비를 모셨다면 고맙다고 품어 주어야 마땅한데. 양반가문에서 질투는 ‘칠거지악’이라 했지만 그래도 소실을 보면 속에서 불덩어리가 확 치밀어 오르는 여자의 본심을 어떻게 가리겠어요.

그것도 모르고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면 돛배 한 척 사들여 거기에 방을 내고 홍임이와 홍임 모와 유유자적 살겠다던 선상님의 말씀만 믿고 좋아라 한양으로 올라왔지요. 본가 문간방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형네 집 옆 오두막에서 갖은 설움 다 겪으면서 고생고생하며 살아가는 홍임 모를 보며 맴이 쓰려 혼났다니까요. 자식은 내리 사랑이라고 비록 신분이 낮은 어미의 몸에서 낳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이쁜 딸인데 을매나 보고잡었겠어요. 마음은 왼통 홍임이네 식구에게 가 있으면서도 부인과 아들들의 눈치가 무서워 근처도 얼씬하지 않는 선상님이 야속했구만요.

그래도 어메는 참 착한 사람이요. 한 번도 선상님을 원망하지 않고 선상님 맘을 헤아렸으니 말이요. 아니 마음을 비웠는지도 모르지요. 젤 좋은 시절을 선상님 모시고 살았으니 이젠 내어줄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이치를 깨달아 버렸나요?

2년 동안 맘고생만하다가 쫓겨나다시피 다시 강진 초당으로 내려와서도 한 잎 한 잎 찻잎을 따서 정성스레 차를 맹글어 선상님께 올려 보내는 어메의 그 마음에 내도 가슴이 찡하니 목울대로 뜨거운 것이 확 올라오더라고요.

그 심정을 선상님이 아시고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리 밖, 해마다 오는 소식 한 봉지 차로구나’ 라는 시로 홍임 모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지요.

지아비 한 분으로 두 여인네의 삶이 외롭고 고독했지만 그 여인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다산이 저렇듯 높은 경지에까지 올랐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으셔요.

소식도 없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출가를 결심한 홍임이가 사람덜은 뭐든지 가질라고 허고 중은 뭐든지 버릴라고 해서 비구니가 되겠다는 말을 듣고 어메도 시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절로 들어가 공양주가 되었는감요?

모녀의 애달픈 삶이 배어 있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산등성을 넘으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살아라.’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떠오릅디다.

이제 편히 쉬시시오.

2018년 11월

 

한 성희홍임 모(母) 전상서

[한성희의 작가 산책] 시인 김남조의 ‘가난한 이름에게’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祝願).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 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시집 『가난한 이름에게』, 「너를 위하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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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문학나들이를 며칠 앞두고 시인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몇 달 전 미국에 다녀오시면서 다리를 다쳤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아직도 불편하시다 했습니다.
“나이가 많으니까 뼈도 늙어서 빨리 낫질 않네요. 그래도 약속은 지키겠습니다.”하시더니 시인은 휠체어를 타고 오셨습니다.
걱정이 되어 앉아서 말씀하시라고 의자를 권했지만 서서 하는게 편하다며 지팡이를 짚고, 2시간 내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강의실을 가득 채운 독자들을 바라보며 꿈꾸는 듯 깊은 머루 빛 눈동자에선 사랑의 기(氣)가 가득 퍼져 나왔습니다.

1927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시인은 일제 강점기와 6.25등 고통스러운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질곡의 시대를 살아온 산 증인이었습니다.
그런 시인에게 문학은 숙명이었겠지요. 해방과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폐결핵이 악화되어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는 등. 그의 젊은 날은 그야 말고 고통의 나날이었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민족적 비극 앞에,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말살된 상태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시를 토해내는 것이었답니다.

시인은 첫 시집 ‘목숨’이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면 전쟁 속에서 보는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죽음 밭에서 보는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절감했습니다. 그때는 인격이 없더라도 좋으니 심장 하나만 남은 생명이라도 허락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을 찾게 되고 가톨릭에 귀의해 신앙 속에서 은총과 구원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답니다. 시인이라는 존재는 그 시대의 깨어있는 지성이어야 하며, 시대의 불행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답니다. 하지만 독선에 빠지는 우(遇)를 범하지 말고 진실을 표현하고자 애쓰라고 했습니다.

“문학은 참다운 넋을 찾기 위해 밝은 쪽으로 창문 하나를 열어두는 것”이라는 시인의 열강에 모두들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한 성희[한성희의 작가 산책] 시인 김남조의 ‘가난한 이름에게’

고마운 당신에게

그리도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무성하던 나뭇잎도 우수수 낙엽으로 내려앉은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당신이 온전히 가정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9개월이 지났네요. 그동안 마음의 준비는 했었지만 막상 퇴직을 하고 보니 적응이 쉽지 않았겠지요. 출근시간만 되면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당신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궁리만 하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시간만 흘렀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하루 종일 함께하면서도 서로 얼굴 보며 이야기할 시간이 별로 없었네요. 당신은 집에 있는 것에 적응이 안 되는지 인터넷과 바둑에 빠져 서재에서 나오질 않더군요. 그런 당신을 보며 저 역시 힘들었어요. 혼자 외출할 때도 친구와의 수다로 전화통화가 길어질 때도 당신 눈치가 보여 무척 조심스러웠답니다. 몸은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만 혼자이고 싶어 안달을 했지요. 그렇게 조금씩 지쳐갈 무렵 무심코 책장을 바라보다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당신 회사 동기들의 회고록이었지요. 주로 당사자들이 30년을 회고하는 글을 올렸는데 당신만 아내의 편지를 올려 화제가 되었던 글. 그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당신이 입사한 지가 30년이 되었다구요! 입사하고 1년 후에 결혼했으니 우리가 함께한 지도 벌써 29년이 되었네요. 영등포 한 커피숍에서 처음 만나 시작된 당신과의 인연으로 예쁜 딸이 생기고 듬직한 아들도 생기고… 이제 딸은 시집가서 귀염둥이 손자까지 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강물처럼 부드럽게 흘러간 세월에 감사해야 하나요? 아니지, 30년 세월을 아무 탈 없이 직장을 다녀 준 당신께 감사해야겠지요.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한 길만 달려온 당신 덕분에 나와 아이들은 편안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당신의 회사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대단했지요. 생각나요? 1983년 일요일이었을 거예요. 이웅평 소령이 비행기를 몰고 귀순했을 때 우리나라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었지요. 어느 선수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권투 중계 중이었어요. TV를 보면서 백일을 갓 넘긴 딸을 목욕시키고 있는데 뉴스 속보가 계속 흘러나왔죠. 당신은 아기를 목욕시키다 말고 예비군복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어요. 회사로 가봐야 한다면서요. 순간 집안에 긴장감이 돌았죠. 만약 무슨 일이 터져 우리가 헤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당신을 붙잡고 싶었지만 당신의 표정은 비장했어요. 가지 말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냥 침만 꿀꺽 삼켰어요. 다행히 집 밖으로 나가기 전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지요.

남북 이산가족 찾기 방송 때는 또 어땠나요? 생방송이라 밤새 일을 하고도 집에 와 제대로 쉬지 못하고 또 일터로 나갔어요. 이산가족들의 애끓는 사연을 들으면서 당신은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하면서 안타까움에 술잔을 기울였어요. 어쩌면 당신은 아버지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고통의 세월을 보내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그렇게라도 풀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언제나 가족보다 회사가 더 우선이었지요. 전 그게 불만이었고요. 가족과 함께 있어줄 만도 한데 당신은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툭하면 귀가 시간이 늦었지요. 소래송신소 근무 때는 사택 생활의 단조로움 때문에 아주 힘들어했던 거 기억나요?

집과 직장이 한 곳에 있다 보니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에 싫증이 난댔어요. 그 답답함을 풀려고 늘 밖으로 돌았지요. 가족 역시 사택에서 외로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그때 당신은 가족이 보이지 않았나 봐요. 우리 그때 많이도 다퉜지요.

안동방송국에 근무할 때는 참 좋았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올라오니 신혼시절처럼 새롭고 신선했지요. 잠시 왔다가 또 내려가야 하니 부부싸움 할일도 없었고요. 처음으로 내 생일날 꽃을 사들고 들어오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해요. 쑥스럽게 꽃을 내밀던 그 표정과 손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요. 돌이켜보면 별로 자상하지 못한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해요. 표현은 잘 못하지만 늘 한결같잖아요. 직장에서도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30년을 보냈으리라 생각해요. 30년, 정말 오랫동안 한 직장에 몸담았네요.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당신은 잘 견디어 냈고 잘 적응해주어 고맙고 감사해요.

당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회사 생활 아쉬움 남지 않게 잘 마무리하고 가족에게 돌아오세요. 긴 마라톤의 완주를 목전에 둔 당신에게 열렬한 응원과 사랑을 보냅니다.〕……

새삼 진심을 다해 편지를 썼던 그때가 생각나네요. 퇴직한지 아직 1년도 안됐는데 당신을 불편해 했던 내가 미안해집니다.

그동안 긴 하루를 보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 지… 헤아리지 못했네요. 35년의 직장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귀환한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늘 가족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요.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둘만 남은 인생 여정(旅情), 이제부터 손 꼭 잡고 오순도순 살아요. 그동안 마음속에서만 맴돌다 하지 못한 말. 당신요! 사랑합니데이~~

 

한 성희고마운 당신에게

[한성희의 작가산책] 시인 허영자의 ‘가슴엔 듯 눈엔 듯’

마음이 어지러운 날은
수를 놓는다.

금실 은실 청홍(靑紅)실
따라서 가면
가슴 속 아우성은 절로 갈앉고

처음 보는 수풀
정갈한 자갈돌의
강변에 이른다.

남향 햇볕 속에
수를 놓고 앉으면

세사 번뇌(世事 煩惱)
무궁한 사랑의 슬픔을
참아내올 듯

머언
극락 정토(極樂淨土) 가는 길도
보일 상 싶다.

– 허영자 시 ‘자수’ 전문

70이 훨씬 넘으셨지만 선생님은 그의 시만큼이나 정갈하고 아름다우셨습니다. 말씀도 얼마나 단아하시 던지요.
“문학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인품이며, 쓰는 사람의 인격이고 인품 그대로 드러내는 그 무엇이라”라고 하는 선생님은 그야말로 문학소녀 그대로였습니다.
193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숙명여대에서 김남조 시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박목월 시인의 추천을 받아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성신여자대학교 국문과교수를 지내셨지요. 신달자 시인과는 선후배 지간이라 하셨습니다. 같은 대학에서 김남조 시인의 가르침을 받고 똑같이 박목월 선생님의 추천으로 등단하셨다고요.
‘친전’,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들판을 걸어가면’, ‘조용한 슬픔’ 등 많은 시집을 내셨지요.
“시 앞에서 나의 재능은 회의하는 어린 나무이고, 시 앞에서 만은 한 없이 겸손하며, 획 한 점을 아껴가며 엄격하게 시를 쓰는 일만이 제가 할 일이다.”라고 하시던, 한없이 겸손하신 선생님을 뵈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한 성희[한성희의 작가산책] 시인 허영자의 ‘가슴엔 듯 눈엔 듯’

한성희의 작가 산책 – 시인 고형렬의 ‘일편시에 대하여’

모든 세상과 색이 파묻혀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세상은 사진리에서 그 끝까지가 고요, 고요였다.
공룡 청봉이라는 것들이 눈앞에서 잡힐 듯하였다.
후우 세게 입김을 불면 날아가버릴 듯이 작아져서
마치 산은 사진리에서 멀리로 내려다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오후 이후 이때까지 설악이
그처럼 낮아지고 아름다운 적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해가 지고도 한참을 설광 때문에 새벽 같았다.
발간 등불과 후레쉬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마을
사진리는 그제서야 사람 사는 마을이 되었다.
아흐레 동안 산이 눈 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날 내다본 동해는
무슨 일인지 물속에 다니는 고기 소리가 날 듯이
맑게 개인 하늘 아래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눈도 한 송이 쌓이지 않고, 그만으로 흐르고 있었다.

-시 ‘사진리 대설’ 중에서-

고형렬 시인은 속초의 시인이었습니다.
1954년 속초에서 태어나 1974년 눈 내리던 날, 강원도 고성의 한 면에서 면서기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꾸준히 시를 쓰다가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면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대청봉 수박밭’ 이라는 첫 시집을 낸 그는 30여 년 전 대진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금강산을 보았습니다. 신 새벽 어로저지선까지 나갔다가 아침 햇살을 받는 금강산의 모습에서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환멸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시’를 쓰고 싶었답니다. 그에게 속초와 그 아래 위의 항구 도시는 삶과 시의 모든 원천이었습니다. 우리가 늘 우울하고 마음 한 쪽이 텅 빈 듯 공허한 것은 그저 ‘인간이니까’ 하는 설익은 감상이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가느다랗게나마 뿌리내릴 수 있는 근원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시인. 양양 남대천에서 치어로 방류된 연어에 심취해 연어에 대한 글 을 쓰고 싶다는 그의 강연을 들으며 언젠가 그가 쓴 연어를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한 성희한성희의 작가 산책 – 시인 고형렬의 ‘일편시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