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니

bearlady

만화와 IT 소식 읽기를 즐기고 글쓰기와 피겨 스케이트를 좋아하는 라 라 랜드 거주자. 만화저널 세상을 봐에 제2의 둥지를 틀어 활동하고 있다.

잃어버린 시인을 생각하며 나는 쓰네

오는 3월 7일이면 기형도 시인이 우리와 이 세상으로부터 작별한지 30년이 된다.

내가 그를 시로써 만난 지도 얼추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

유럽여행 중 (1987) 출처: ⓒ문학과지성사

 

어느날 문구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코팅 책받침 속 시, ‘입속의 검은 잎’이 주었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아직도 손끝에 느껴지던 책받침의 촉감이 생생하다. 예쁘고 잘생긴 배우의 사진이 들어간 매끈한 코팅을 기대하며 뒤적이다 뜬금없이 마주쳤기 때문일까. ‘악착같이 매달린 입속의 검은 잎이 두렵다’는 마지막 구절에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등뼈를 타고 흐르던 알 수 없는 공포와 불편한 기분. 그것이 첫 인상이었다. 그때는 군사정권을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박종철과 이한열같은 이름이 회자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주친 시가 서점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동명의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을 만났다. 때로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빨개지며, 또 암울함에 답답한 가슴을 달래며 읽고 또 읽었다. 온통 사로잡혀 빠져들게 한 시들이었지만 언어는 밝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출처: ⓒ문학과지성사

나중에서야 우연히 영화를 보러 들른 극장이 그의 죽음을 목격한 장소였음을 알게됐다. 시인을 알기 전에는 하나의 극장일 뿐이었지만 안타까움과 슬픈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그곳에 다시는 갈 수 없었다. 그토록 기형도 시인의 갑작스런 부고는 더 아프게 다가왔다.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슬픔과 공포, 상실감과 애잔함과 고통이 가득한 그 시들을 썼을까. 그때는 그랬다. 나만이 아니었구나. 이 사람도 두려웠고 외로웠구나.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시집속에서 넘어오는 감정들이 지나치게 선연했으니 말이다. 어릴 적 엄마가 열무 삼십단 이고 나가지는 않았지만 텅 빈 집에 ‘찬밥’처럼 남겨져 공포를 느낀 기억이 생생하다. 또, 가족 또는 가까운 지인의 죽음과 와병 앞에서 절망과 슬픔을 느낀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감하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위로를 전했다. 그러니 놀라울 수 밖에. 어둡고 암울하지만 나 홀로가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 그의 시가 가진 힘이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집 한 권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잠식돼 있던 나의 이십대 초중반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그의 시들은 현대시 중에서도 아직까지 그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사람이 제각각이라 하나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음이 그의 시가 영속성을 가지고 살아 숨쉬는 이유가 아닐까. 1989년이나 30년이 흐른 지금이나 가난, 가족의 죽음과 같은 삶의 불행은 변함없이 힘들고 괴롭다.

다가오는 주말, 시인의 누나를 만난다. 시인의 누나가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시집을 읽고 또 읽던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마음이 아플까 싶어 미리 가슴 속에 보호막이라도 쳐야 될까 싶다. 나이들어가며 무르익어 흘러나오는 시들을 읽고 싶건만, 그는 영원한 29세 청춘으로 남았다. 아주 먼 옛날같이 느껴지는 30년 전,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이 살아있음을 더 생생히 느끼게 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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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설렘을 맞이하면 돼지!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기 한참 전이었던 2011년 경이다. 우연히 100개의 물건으로 1년을 살아낸 경험담을 엮은 책을 소개한 기사를 접했다. 데이브 브루노의 ‘100개 만으로 살아보기’란 책이었다.

데이브 브루노의 ‘도전 100개로 살기’ 책. 미니멀리즘의 풀뿌리 운동을 일으켰다

 

수없는 이사를 거치며 깨지고 망가지는 것들에 속상할 때마다 물건에 종속된 기분이 들어 답답함을 느끼곤 하던 차였다.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끈끈하게 달라붙는 미련을 떨치고 한 달 동안 상당히 많은 물건을 처분했다.

데이브 브루노의 책을 만난 그 해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무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재해 앞에 많은 일본인들이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경험을 통해 소유물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본은 그 이후 실제로 결혼과 출산이 늘었고 동시에 미니멀리즘의 열풍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도 웰빙과 웰다잉, 에코 리빙을 표방하는 요즘, 미니멀리즘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는 것 같다. 일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무언가를 사고 그러한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여유도 없이 일해야 하는 삶에 과감히 작별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 한때 몰아쳤던 제주도 이민 열풍과 한달살이 열풍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책과 방송과 기사와 각종 SNS를 통해 단순하게 사는 삶을 소개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 가운데 또다시 눈길을 끌었던 책이 생겼다. 정리전문가로 일하는 일본의 곤도 마리에라는 작가다. 여러 권의 책을 냈고 정리를 어려워하는 이들을 돕고 있다. 이 작가의 정리 철칙은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것이다.

이 문구는 어느 순간 또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삶에 좀 더 집중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쳐내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리 그 자체에 집착하고 만 것이다. 어쩌다 보니 꼭 필요한 것은 버리고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남기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때로 미니멀리즘 관련 책자에서 언급된 브랜드의 물건이란 이유로 필요도 없는 물건을 구매하는 정말 쓸데없는 소비도 했다.

위대한 종교와 사상들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을 설파한다. 그리하여 자주 잊어버리지만 알고 있다. 물건을 사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걸. 방안에 쌓인 택배 박스가 주는 흥분은 며칠도 못 가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요트로 세계일주를 한 이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배를 사면 이틀이 가장 행복한데 바로 산 날과 파는 날이라고. 깔깔 웃으며 지나갔던 말이 지금 또다시 생각하게 한다.

21세기는 물건이 아닌 가치와 경험을 소비하는 세대가 떠오른다고도 한다. 어쩌다 보니 또다시 쌓이는 물건에 더이상 치이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2019년 한 해는 정말 손에서 놓아야 할 것은 붙들고 있고,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놓아 버리는 것을 멈춰야겠다. 그리고 한 해동안 설렘에 집중하려 한다. 나에게 설렘을 주는 것, 주는 일, 주는 사람, 주는 경험에 집중하고 싶다. 설렘으로 가득한 삶. 그 얼마나 멋진가. 인생은 다른 일에 매어 있기에는 너무나 짧다. 하고 싶었던 가슴 설레는 일을 시작하고 설레는 사람들을 만나 설레는 시간을 보내려 한다. 그리하여 즐겁고 설레는 기해년이면 돼지. 그렇지 아니한가?

후니2019년은 설렘을 맞이하면 돼지!

2018 만저봐 총결산-만성 지연증후근자를 위한 변명

 

요즘 즐겨 찾는 사이트가 있다. 그런데 사이트명이 얄궂다. 이름하여 Productive Procrastination. ‘생산적인 늑장’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이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일에 집중하는 대신 관계 없는 다른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시험을 앞두고 하는 책상정리나 청소 같은 것이다. 아마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순간도 해야할 중요한 일 대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하다… 공부는 할 때마다 주로 죽을맛이 났었다.

많은 이들이 연말이 되면 늘 그렇듯 못다한 일에 대한 아쉬움을 곱씹고 새로운 다짐을 하곤 한다. 새해 목표를 위한 다짐 목록을 작성하는 것도 전세계적인 공통점일 것이다. 그렇게 2018년은 솔직히 별다르지 않은 시작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름의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몇 가지 계획과 스스로와의 약속을 다짐했다.

새해의 다짐은 작심삼일…매년 초 다짐하고 연말마다 후회한다. (일러스트레이션=후니)

연초의 계획 중 하나가 ‘만화저널 세상을 봐’에 한 달에 적어도 두 꼭지씩 기사 작성하기로 한 것이다.  한 달에 두 편의 기사는 만저봐 내부 필진간에 기본적으로 약속한 한 기사 분량이기도 하다. 물론, 처음에는 의욕이 넘쳤다. 결단코 미약한 마음이 아니라 창대한 마음으로 한 시작이었다.

Drop the mic On the Global stage라는 신년호 타이틀까지 직접 만들었을 때는 자못 호기로왔다.

개의 해를 맞아 나름 스웩있고 힙하게 아미의 친구답게 제목을 정했었다.

그랬다. ‘생산적인 늑장’이 지난 1 년간 매월 기사 마감을 앞둔 나에게도 닥쳐오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아마도 시작은 3월 성북동을 다녀올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정신차리고 보니 11월이었고, 눈 감고 뜬 것 같은데 벌써 12월을 맞았다. 이리하여 넘긴 마감과 쌓이고 밀린 약속들의 부끄러움이 잡지 속 드문드문 들어 있는 기사 분량이라는 ‘빼박캔트’로 남았다. 결과에 대해서 유구무언이요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기사를 쓰려면  마감이 있어야 한다고는 한다. 헌데 다가오는 마감이 아무리 절박하게 느껴져도 왜 노트북 앞에만 앉으면 백지 상태가 되곤 했는지. 기사 마감을 앞두고 수없이 책상과 소지품을 정리하고 청소와 빨래를 했다. 정말 ‘생산적인 늑장’이었어야 했는데 청소기와 세탁기를 좀 더 가까이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머리로는 이런 것들이 글이 풀리도록 해줄 것이라고 되새겼지만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알고 있었다. 단지, 머릿속은 정리와 거리가 멀었고 다른 일을 하면 할 수록 더 엉켜버렸다는게 진실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만저봐 필진들은 국장님과 부국장님을 필두로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분이 대부분이라 더욱 염치가 없었다. 새롭게 참여하신 외부 필진들도 모두 다 성실의 아이콘들이시다. 

소재가 없어 골머리였다는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일 년간 다양한 프로젝트와 작가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글 쓸 주제야 넘쳐났다. 생각하건데 점잖게 마감을 독촉하신 편집장님 몸에는 ‘후니’표 사리가 자리잡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염보살이라고 불리는 염실장님. 말안듣는 기자에게 마감 부탁하다 지쳐 수액도 맞으셨다.

 

 

 

 

 

 

 

 

 

 

 

 

 

그나마 개연성 있는 변명이라면, 새롭게 시작한 일로 인해 상당히 바쁜 한 해였다는 점이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그 모든 실패한 마감을 해명할 수는 없다. 시간 관리에 또다시 실패했다는 자괴감이 수시로 들었다. 

한때 한국에서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이란 자기계발서가 인기를 끌었다. 책의 원제목은 고효율적인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이다. 효율성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제목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에 이 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효율성이다. 시간 관리와 계획을 세우는 방법, 그리고 일의 중요도에 따른 순서 등을 안내한다. 글쓰기를 위해서도 이러한 계획이 필요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또다시 효율적이지 못했나 보다.

일도 계획을 잘 세워서 중요도에 따라 해야 한다.

 

예전에 직장생활과 일상 사이에서 허덕일 때 직장 보스가 알려준 방법이 있었다. 일이 너무 많아  집안이 엉망이 되어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자 건넨 말이었다. 그녀는 한 마디로 말했다. 모든 것을 너무 완벽하게 하려는 마음을 버리라고. 그 말에 한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완벽하게 하려다 지쳐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었다. 그녀는 이어서 하루에 15분을 이야기했다. 하루는 이를 닦으며 세면대를 닦고 하루는 이를 닦으며 욕실  바닥을 밀면 된다고.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할 수는 없으니 포기하고 할 수 있는만큼 하면서 유지하면 된다고. 그 후 한 3년 간 비교적 균형을 이루며 잘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몇 년간 느꼈던 시간과 마음의 평화. 그때는 잘..했다.

하지만…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익숙하고 오래된 패턴으로 되돌아갔다. 또다시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고 자꾸 쫓기는 그런 일상으로. 뒤늦은 후회와 함께 만저봐와의 약속도 그렇게 되돌아간 셈이다. 개그맨 박명수씨는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늦은거라고 했다지만 이제 2019년을 목전에 두고 다시 한번 그때를 떠올려 본다. 하루 15분의 약속을 지키던 시간들을. 12월을 마치며 1월을 기다리는 바로 지금이 그 때인 것 같다. 하루 15분씩 다시 시작하는 시간. 

이제 더 길게 말해 무엇할까. 시원하게 셀프디스 한마당 벌였으니 기해년 한 해는 심기일전하고 힘차게 또다시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다시 가야겠다.

일단 노트북 켜고 노트 열고 써보련다. 15분간.

 

새해에는 편집장님 몸에 사리를 지난해의 반만 만들겠다고 소심하게 약속해 본다.
자신만만했다가 도로아미타불될까 싶어 완전히 만들지 않겠다고는 자신을 못하겠다.
그리고 꼭 2019년 연말에 다시 한번 이 시간을 뒤돌아보며 정리하겠다.
그때의 시간은 어떤 결과를 마주할까? 약간은 긴장되고 조금은 기대된다.
그래, 다가오라 2019년도의 마감이여!

후니2018 만저봐 총결산-만성 지연증후근자를 위한 변명

편지…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그 무엇

 

 

우리가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또, 어떤 연유였을까?

편지의 다른 말에는 서신, 서간, 서한, 신서, 서찰, 글월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중국인 지인이 편지便紙가 중국어로는 화장실 휴지라고 알려줘서 둘이 마주보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편지를 한자로 쓰면 중국인들은 휴지로 알아듣는다고 한다.

 

 

 

 

 

 

 

 

 

기성세대에게 편지라 하면 편지지에 손으로 내용을 적어 우표를 붙인 봉투에 넣고 봉한 뒤 뒤 우체통에 넣어 부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전자메일과 함께 성장한 지금의 청년세대에게 손편지는 유물과도 같을 것이다.

전화부스와 함께 점점 사라져가는 우체통/사진=우정사업본부 블로그

 

 

 

 

 

 

 

 

발송 형태의 변화와 관계없이 편지를 보내는 것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편지는 공문서의 형태로 보내는 정식 서한이 있고 회사에서 업무를 위해 발송하는 경우도 있으며, 개인간 소식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는 메시지도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편지다. 호머의 일리아드에서도 언급된 편지의 존재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서기 100년 경 로마에서 발송된 편지는 생일파티 참석여부와 안부 전달과 같이 지극히 일상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편지가 사람과 사람사이에 소식을 전달해온 오래된 수단임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편지(종이에 씌어지지 않았기에 적절한 용어는 아니겠지만) 중 하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1750년경의 점토판이다. 쐐기문자로 기록된 이 역사적 유물은 Nanni라는 인물이 자신이 구매한 구리 주괴의 품질에 대해 상인 Ea-Nasir에게 불평을 전하는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제품 품질에 만족하지 못해 항의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나 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품 불만족 항의 편지/ 사진=대영제국박물관

 

 

 

 

 

 

 

 

 

 

 

사이먼 가필드의 투 더 레터(TO THE LETTER)라는 책에서는 영국의 헨리 8세가 앤 볼린에게 연애 편지를 보내기 위해 우편제도가 발달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편지를 신속하게 보내려고 우편배달에 말을 사용하고 우편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연애편지가 인류 역사의 발전에 한 축을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헨리8세가 앤 볼린에게 보낸 연애편지…편지는 남았지만 사랑은 남지 못했다./사진=바티칸 도서관

 

 

 

 

 

 

 

 

 

 

 

한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편지가 발견된다. 불과 십여년 전 정조가 노론 벽파의 정수 심환지에게 비밀스럽게 보낸 어찰첩이 공개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은밀하게 보낸 탓일까. 정조의 서찰에는 다양한 ‘욕’과 ‘막말’이 시전돼 있다. ‘호로자식’ 등 지금도 쓰이는 욕이 그때도 쓰였고 심지어 그 언어 사용자가 바로 왕이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료다. 정조의 비밀 편지 속 은밀한 언어 생활은 없애라 명했던 의도와 달리 살아남아 책으로 출간됐다.

정조 어찰첩/사진=한국문화재청

 

 

 

 

 

 

 

 

한편, 조선시대 한글 편지 중에는 가슴 절절한 사부곡도 있다. 지난 1998년 안동에서 발견된 한글 편지는 16세기 중반 서른 한 살에 요절한 ‘원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지는 머리카락과 함께 삼은 짚신과 같이 관속에 부장돼 있었다. 다정했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통해하는 부인의 마음이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원이아버지에게 보내는 원이엄마의 사부곡/사진=안동대박물관

 

 

 

 

 

 

 

 

한국에서 발송했던 편지 중에는 군인들에게 보내는 학생들의 위문편지도 빠질 수 없었다. 1988년 위문편지가 폐지되기까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일면식도 없는 군인에게 다양한 위문품과 함께 억지 춘향격 편지를 써 보내야 했다. 그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위문편지는 또 하나의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에피소드로 남았다.

5사단 36연대 통신대대로 수신된 의정부의 어느 여중생이 쓴 패기 넘치는 위문편지…위문편지의 레전드로 웹상을 떠돌고 있다..

 

 

 

 

 

 

 

 

 

 

 

 

받고 싶지 않은 편지도 있다. 이름하여 ‘행운의 편지’. 19세기 영어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편지는 일본을 거쳐 한국에도 들어왔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서 기사로도 언급이 됐다. 한때, 우체국 수입을 꽤 짭짤하게 올려주는 수단이기도 했단다. 종이 편지가 점점 드물어지는 21세기에 직장인 사이에서 이메일로 발송하는 행운의 편지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에피소드가 나온 행운의 편지/사진 캡쳐=응답하라 1988

 

 

 

 

 

 

 

기다리는 가족이나 친구의 편지거나, 혹은 기다리기 두려운 고지서를 담은 우편물이거나 이제는 우편함으로 오는 모든 종류의 편지 자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종이로 된 모든 우편물의 급격한 감소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점토판에서 파피루스, 목간, 종이 등을 거쳐 웹상으로 까지 진화한 편지가 앞으로 또 어떤 형태를 취할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 하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소식을 전달하는 편지의 기능 자체가 없어질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인류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편지를 주고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쌀쌀해지는 날씨와 함께 연하장을 보내는 연말이 다가온다. 무엇이 되었건 한 해동안 고마왔던 분들 또는 소식이 격조했던 분들께 잊지 않고 마음을 담은 연말 인사를 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후니편지…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그 무엇

기억하는가 그대의 찬란했던 시절을? 그렇다면 응답하라 나의 ‘청계천’이여 -어슬렁 청계천 청계천박물관 관람기

기억하는가 그대의 찬란했던 시절을? 그렇다면 응답하라 나의 ‘청계천’이여 -어슬렁 청계천 청계천박물관 관람기

살면서 한번쯤  “그때가 좋았지”라고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다. 그런데 만약 60년대부터 90년대 치열한 산업화 시기를 떠올리는 이라면 청계천 박물관에 가보라. 그리웠던 그 시절을 잠시나마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청계천박물관은 청계천 복원과 때를 함께하며 지난 2005년 개관한 곳이다. 청계천의 역사와 함께 복원과정과 그 이후의 변화를 아우르고 있다.

청계천은 원래 조선시대 태종때부터 오수로 인한 치수 기록이 꾸준했던 곳이다. 도심 내 생활오수가 모여 흘렀기 때문에 주기적인 준설이 필요했고 순조때까지도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원 이름이던 개천에서 청계천으로 바뀐 뒤에도 조선시대와 별다르지 않게 생활하수가 모이고 악취 가득한 도심 빈민의 거주지였다. 박물관에는 일제 강점기 이후의 사진 기록이 있어 이러한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계천 복개와 함께 건설된 청계고가다리와 함께 이곳은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개발이라는 명목로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강제 이주됐다. 그리고 근대화, 산업화의 이름아래 40여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청계천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청계고가다리 노후화에 따른 안전문제로 복원사업 필요성이 90년대부터 제기되면서다. 당시 소설가 박경리 등의 전문가가 참여해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역사적 인식과 고민이 없었다는 자성도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박경리 작가 자신도 반성과 함께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도 미래를 생각하는 혜안이 부족했던 현대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인 것이다. 빨리빨리와 ‘치적’에 대한 조급증, 역사인식 부재가 바로 그것이다. 박물관에는 물론 이러한 정치적 함의를 담은 기록이 없다. 그러나 행간을 읽으면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데 충분하다. 박물관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포인트다.

이러저러한 문제점을 차지하고 청계박물관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모습을 따라가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청계천박물관에서 그중 더욱 이목을 끌었던 것은 기실 청계천에 살던 사람들에 관한 경험과 기록이다. 천변에는 각종 상권이 생성됐고  그 시절 사람들은 농반진반으로 탱크도 살수있다고 말했다. 이곳은 내게 학창 시절의 추억을 선사한 곳이기도 하다.

80년대에 청계천으로 가면 대본소에서 빌려보던 순정만화를 권당 3천원에 직접 구매할 수 있었다. 구하기 어려웠던 해외 명반을 카피한 ‘빽판’을 사러 갈 때의 설렘도 아직까지 뚜렷하다. 지금은 토렌트에서 불법다운로드를 하지만 당시는 청계천 음반상점들이 LP 불법복제를 했었다. 검열의 가드가 충분히 내려가지 않았던 80년대 해외 명반들은 한 두 곡씩 삭제돼 발매되거나 아예 발매 자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청계천은 그런 것들을 찾는 이에게 보물같은 장소일 수 밖에 없었다. 골목마다 길마다 희귀한 기계 부품도, 가전제품도, 쓸모없어 보였던 골동품도 많았다. 좋은 향기가 나지는 않았지만 책과 음반, 그리고 오래된 것들에서 나는 냄새가 가득했던 그곳이 ‘응답하라’ 시리즈로 작게나마  ‘복원’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장소가 청계천 박물관이라면 더욱 좋겠다.

청계천박물관 옥상공원에서 바라본 청계천

여러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어머니의 ‘강제’ 처분으로 내 작은 소장품들은 이제 다 사라졌다. 그렇지만 청계천박물관은 지금 진행중인 특별 기획전을 통해 추억을 다시 살릴 수 있다.

청계천박물관 특별전시전

특별기획전 메이드 인 청계천 대중문화, ‘빽판’의 시대는 청계천이 서울에서 대중과 대중문화에 끼친 역할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1980년대까지도 ‘대중문화’는 고급의 반대 혹은 퇴폐적이거나 다소 가벼운 문화를 포괄하는 단어였습니다.

미디어매체의 복제와 유통, 그리고 대중적 소비의 접점에 있었던 청계천은 우리의 대중문화역사에서 가볍지 않은 위상을 차지했습니다.

한때, 세운상가지역을 찾는 다는 것은 문화를 찾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문화의 언더그라운드, 청계천일대의 추억을 메이드 인 청계천 대중문화, ‘빽판’의 시대 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이 타임머신을 탄듯한 추억여행에서 먼저 시작할 곳은 청계천박물관 건너편에 세워진 서울상점이다. 교복과 뽑기 불량식품 조금은 촌스럽지만 정겨운 영화 포스터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청계천박물관 내 기획전시 소설가 구보씨의 천변풍경(2018. 5. 4 ~7.1)

박물관 내부를 돌아보았다면 박물관에서 보았던 주변도 함께 덜아보길 바란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마장동 축산시장에서  고기안주에 소줏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천변을 좀 더 걸어가서 을지로에 있는 맛집도 커피집도 방문할 수 있다. 아직 남아있는 오래된 음식점들이 밀려나지 않고 계속 남아 또다른 추억을 만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청계천을 방문한 당신. 이제 그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라.

후니기억하는가 그대의 찬란했던 시절을? 그렇다면 응답하라 나의 ‘청계천’이여 -어슬렁 청계천 청계천박물관 관람기

수모와 영광의 굴곡끝에 만난 일제강점기 모던 청년의 감성-부천인문路드 정지용 편

수모와 영광의 굴곡끝에 만난 일제강점기 모던 청년의 감성

부천인문路드 정지용 편

 

일제강점기 시를 쓰던 청년이 있다.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로 씌어진 청년의 작품은 그를 한국 대표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렸다. 한국 서정시의 서두를 연 청년은 40대에 막 접어든 1942년 붓을 꺾고 과거 수주라 불렸던 부천에서 그의 종교인 천주교 청년활동에 몰두한다.

이후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가을을 지나면서 그의 행방이 영원히 묘연해졌다. 해방 후 혼란한 시기 조선문학가 연맹에 가입한 연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럼에도 전후 생사가 불명하다는 이유로 월북시인이라는 주홍글씨가 남아버렸다. 그의 이름은 1988년 그의 작품이 해금되고 대표작 향수가 노래로 발표될때까지 제대로 불릴 수 조차 없었다.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부천 인문로드에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바로 이 정지용 시인이 종교 활동에 몰두한 흔적들을 짚어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가 직접 세웠던 성당은 사라졌지만 카톨릭 청년활동을 하며 암울했던 시기에도 ‘한국어’로 된 청년회보를 발행한 그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있다.

1902년 생인 정지용 시인은 대한제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미군정 시기를 거쳐 한국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 절반을 온몸으로 겪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이념으로 나뉘어 싸웠던 시대의 수레바퀴 아래 그의 이름도 함께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한국어로 작품활동이 어려웠을 시기인 1942년 그가 붓을 꺾은 것에 나는 주목했다. 또한, 한국어로 카톨릭 청년회보를 3년간 발행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세례명 방지거-지금은 프란치스코-로 부천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의 머리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었을까? 그토록 고운 시를 써내려 가던 시절 절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 해줄 사람이 없어 남겨진 자료의 조각들을 모아 유추할 뿐이다.

<가톨릭청년>에 발표된 정지용의 산문 <소묘 3>의 첫부분

또한 정지용 시인은 이념 갈등으로 존재가 강제로 지워진 예술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존재다. 부천 인문로드 강연에서도 강조했던 것처럼 그는 무엇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소사 성당을 직접 벽돌을 쌓아 올려 지은 그에게 좌익딱지는 이해가 조선문학가연맹에 가입했다는 것말고는 그가 월북했다는 증거 또한 없다. 그의 존재는 대중들에게 접근할 기회를 강압적으로 빼앗긴 수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를 극명히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혼란의 시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분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발라드같은 그의 시들을 좀 더 여한없이 누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천 소사동 정지용 집터에는 정부가 아닌 부천 복사골 문학회에서 남긴 표식이 있다. 엉킨 과거사 해결에 아직도 갈길이 먼 한국 문학의 현주소를 내비치는 듯 해 씁쓸함을 남긴다.

<부천>정지용 집터에 남아있는 복사골 문학회의 표식, 부천인문로드 투어 중 정지용 작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카툰캠퍼스 이원영이사

정지용 시인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같은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과 함께 앞으로 남겨진 과제를 바라본다.

후니수모와 영광의 굴곡끝에 만난 일제강점기 모던 청년의 감성-부천인문路드 정지용 편

시각으로 경험하는 영성 – 어슬렁 강릉 뮤지엄산 <제임스 터렐>전

시각으로 경험하는 영성

어슬렁 강릉 뮤지엄산 제임스 터렐전

 

사진출처 : 뮤지엄산 홈페이지

원주 뮤지엄 산에 다녀왔다. 어슬렁 강릉 프로젝트의 마지막을 장식한 뮤지엄산은 사실상 또다른 일정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하게도 뮤지엄산을 방문하기 전 나는 제임스 터렐에 대해 터럭만큼도 아는 것이 없었다. 콘트리트 외벽을 먼저 연상하게 되는 안도 타다오의 건축에 대한 기대만 가득했다.

공유의 맥심광고 속 뮤지엄 산

원주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폭 파묻혀 있는 뮤지엄산을 감상하면서 그다지 큰 기대 없이 제임스 터렐의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아…

수많은 말들이 떠오르는 순간 가라앉았다.

모든 것은 빛과 어둠 그리고 공간이 만들어내는 마법으로 가득했다.

일생동안 거쳐왔던 수많은 사원들과 종교 건물들 그리고 명상을 위한 미로와 같은 장소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단언컨대 제임스 터렐이 만들어낸 이 공간과 같은 곳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

 

이러한 공간을 창조한 이가 누군지 절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없이 찾아간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궁금증을 해소하려 찾아 본 제임스 터렐은 누구인가. 그는 1943년 엄격한 퀘이커 부모 아래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행기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의사였다. 터렐은 16세에 항공기 조종 라이센스를 취득했고 대학에서 지각 심리학을 전공했다. 빛으로 그리는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고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로든 크레이터 프로젝트이다. 하늘 위를 나는 조종사로서의 경험과 심리학도와 미술학도로서의 경험이 묻어 있는 듯한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앵글에서 감상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압도적이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가장 대표작인 로든 크레이터 프로젝트(Roden Crater Project)이다. 그가 1979년 애리조나 주 북부에 위치한 페인티드 사막 가장자리의 사화산 분화구를 직접 사들여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채 진행중이란다. 버킷 리스트에 올리고 언젠가는 방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방문에서 만난 원주 뮤지엄산의 제임스 터렐전은 총 다섯 개의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스페이스 디비전은 일정 시간대와 우천시에만 운영한다. 우리 일행은 시간대도 맞지 않고 비가 오지 않아 감상이 무산돼 아쉬움이 남은 프로그램이다. 비오는 날 방문하는 이에게 뜻밖의 좋은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사진출처 : 뮤지엄산 홈페이지

첫 전시공간인 ‘스카이스페이스’는 로마 판테온 신전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고 설명돼 있다. 열린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과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이 바쁜 일상을 잠시 잊게 한다. 주위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을 마주한다는 도슨트의 설명이 절실히 와닿다.

‘웨지워크’는 빛이 거의 차단되다시피 한 어두운 통로를 지나서 만나는 공간이다. 빛이 암전된 공간과 고요한 공간을 손으로 붙잡은 가드레일에 의지해 더듬더듬 걸으며 긴장하기도 했다. 밤눈이 심하게 어두워 동행한 이의 발을 밟는 실수를 하는 등 당황과 혼란속에 어둠의 공간을 지나고 나서 만나는 약한 빛이라니! 빛의 환영을 이용한 시각 효과가 놀라움을 선사했다. 이 장소 또한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겠다. 그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내가 보는 대로만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경험한 곳이다.

‘간츠펠트 효과(Ganzfeld Effect)’로 알려진 간츠펠트 공간은 다양한 색으로 변화하는 스크린을 감상하고 스크린 뒤에서 숨겨진 반전을 만나는 곳이다. 진실의 의미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시각적 기억이 얼마나 왜곡돼 있고 부정확한지 다양한 실험 결과들이 있다. 이곳 또한 시각 자체가 주는 감각이 현실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직접 경험하는 곳 이다. 마치 마술쇼를 보는 듯한 놀라움마저 주는 작품이었다.

호라이즌 룸은 가장 경건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볼때 갖는 무대효과와 더불어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사각의 입구를 향해 걸어 올라갈때의 기대감과 간절함이라니. 아.. 다만 더 좋은 공간이었을 수 있었음에도 현대 자본주의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망친 아쉬움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그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공간이었다.

뮤지엄산은 건축 거장 안도 타다오의 작품으로만 알고 가볍게 방문해서 머리로 망치를 맞은 듯한 강렬한 경험을 선물받고 나온 곳이다.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곳을 그냥 방문한데서 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해보니 무지한 상태로 만났기 때문에 더 큰 감동을 만난 것 같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비오는 날 꼭 이곳에 다시 한번 방문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당신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면 언젠가 그 믿음에 배반당할 수 있다는 진실을 만나는 이 공간을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후니시각으로 경험하는 영성 – 어슬렁 강릉 뮤지엄산 <제임스 터렐>전

격세지감(隔世之感) 소격동 여세부침(與世浮沈) 삼청동

지난 3월 7일 만저봐 어슬렁 성북동 근현대사 투어를 다녀왔다. 말 그대로 서울의 중심가를 관통하여 성북동과 그 인근을 구석 구석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보는 반나절 기행.

어슬렁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한 곳은 투어를 마치고 내려와서 만나게되는 소격동과 삼청동이었다.

그런데, 이 어슬렁 투어의 초입에 만날 수 있는 팔판동이 소격동 삼청동 사이에 있다. 팔판동의 이름은 여덟 판서가 살았던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경복궁 옆 위치값 제대로 하는 이름이겠다.

팔판동의 수많은 가게 가운데 어슬렁 투어가 꼭 짚은 곳은 바로 팔판정육점이다.

그곳 주인을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씨가 ‘전설적인 정육 명장 이경수 선생’이라고 칭송했단다.

무려 3대가 76년째 영업중이고 우래옥과 하동관에 들어가는 고기를 70여 년째 대고 있는 곳이다.

예전에 우래옥 냉면과 하동관 곰탕을 자주 먹었지만 명장의 손길이 닿은 고기를 먹었을 줄이야..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 오래된 추억의 맛에 또다른 감동이 스민다.

인기 많은 상점들이 즐비한 이곳에서도 줄 서서 기다린다는 곳이니 육식파들은 한번 쯤 들려볼만 하다.

 

네이버 지도 캡처. 빨간색 테두리로 쌓인 지역이 위부터 삼청동, 팔판동, 소격동이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맞닿은 삼청동은 경계가 삼엄하던 군사정부 시절을 뒤로하고 서울시내에서 힙하면서 화려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이제는 북촌의 한 부분으로 맛집과 소규모 갤러리, 카페가 즐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동네다. 삼청동은 북촌이 그러하듯 고즈넉한 한옥들이 아직도 원형을 유지한 채 사람들을 맞이한다. 도시재생이던, 전통 보존이던 어떠한 명목이나 이름으로라도 이 아름다운 동네가 후세에도 그대로 유지되길 바란다.

한편, 네이버 검색으로 찾아본 소격서는 다음과 같다.

“고려 때부터 소격전(殿)이라 하여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는데, 1466년(세조 12) 관제개편 때 소격서()로 개칭하였다. 그 후 도교를 배척하는 유신()들의 조직적인 운동과 조광조()의 끈질긴 폐지 주장에 따라 1518년(중종 13)에 폐지되었고, 이때 제복()·제기()·신위()까지 땅에 파묻었다. 1525년(중종 20)에 복설()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뒤 다시 폐지되었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소격서[昭格署]: 관직명사전, 2011.1.7.,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렇듯,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중기까지 국가의 제사를 지냈고, 조선왕조 종친부가 들어서 있던 소격동은 삼청동과 함께 한양 도성의 심장부였고 근대를 지나 현대사에 들어서도 그 위치를 놓치지 않고 있다. 비록 성격은  많이 달라졌지만.

소격동은 청와대를 위에 두고 국군기무사령관이 오랜 기간 자리한 까닭에 위치와 어울리지 않게 개발이 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경복궁 바로 옆 옛 북촌의 한 자락이지만 많이 알려지지도 접근성이 높은 동네도 아니었다. 8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더더욱이나 소격동의 현대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2014년 서태지가 아이유와 콜라보로 발표한 ‘소격동’의 뮤직 비디오는 분명히 존재했으나 지금은 잊혀져가는 그 시절 ‘소격동 시대’를 배경으로 담고 있다.

서태지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서 소격동의 곡 배경을 묻는 손석희 앵커에게 “예쁜 동네의 무서웠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곳은 아름다왔지만 80년대의 무서웠던 동네 분위기를 빼고는 노래의 배경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린 서태지가 뛰어놀던 그 곳에서 서슬퍼렇던 보안사령관은 녹화사업을 빙자해 명단을 작성했다. 그 명단을 통해 강제 징집이 이뤄졌던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이제는 젊은이와 관광객이 몰려드는 상업 지역이 되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예쁘고 공포스러웠던 묘한 추억이 서린 복잡한 동네인 것이다.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에게 지금의 소격동은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요 여세부침이다.

어슬렁 투어의 마무리는 소격동의 한 수제맥주집이었다. 이연실의 노래 가사처럼 30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던 목로주점의 세월은 갔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을 안주 삼아 가까운 이들과 맛있는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 곳.

바로 삼청동과 소격동으로 성북동 어슬렁 투어의 마지막을 함께 해 보길 권한다

후니격세지감(隔世之感) 소격동 여세부침(與世浮沈) 삼청동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마지막화-Now and beyond….

 

개나리에 순이 올라온다. 경칩도 지났고 기온이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봄비 마저도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다.

매년 초겨울이 되면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머랴’라는 시인 셸리의 시 구절을 떠올리며 봄을 기다렸었다.

불어오는 따스해진 바람과 햇살, 여기저기 피어오르는 꽃망울이 겨우내 움츠렸던 몸에 생기를 주는 그 느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벚꽃 핀 경회루 모습. 날씨가 맑은 날의 아름다움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랬던 봄이었건만, 지금은 뿌연 하늘과 메케한 공기가 추가 연관 검색어로 내 기억회로속 정보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여름 몇달(심지어 한 여름에도 미세먼지 농도가 올라가는 일이 종종 있다.)을 제외하고는 가을부터 봄까지 미세먼지가 자주 하늘을 뒤덮는다.

2017년 연말과 2018년 연초의 겨울도 추운날의 맑은 공기와 한결 따뜻한 날의 미세먼지가 번갈아 한국을 찾아왔다.

작년 초 미세먼지 기획기사를 시작하고 1년 3개월여가 지난 지금.. 안타깝게도 변한 것은 그다지 없는 듯 하다. 앞으로도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1년여가 지난 지금, 미세먼지에 관한 나의 마지막 리포트를 시작한다. 지난해 올렸던 기사 링크는 아래와 같다. 마무리 기사가 1년여가 걸린 점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제 1화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제2화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제3화 실내 공기질부터 알아봅시다.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제4화 카드보드 아트컬리지 아워 플래닛 공기청정기 리뷰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제5화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제6화


마무리를 위해 지난 2,3여년 간에 걸쳐 여러가지로 사용해 보고 시도한 기기들에 대한 총평도 함께 올려 본다.

제일 먼저, 나에게 기대감을 주었던 공기질 측정기 어웨어(AWAIR).

결론적으로 넌 내게 빅 실망이었어!

 

어웨어, 넌 나에게 모욕감을..아니 실망감을 줬어..

 

 

요 제법 비싼 센서는 지난해 초, 미세먼지 측정 센서에 문제가 생겼다. 작년 초부터 봄까지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하기는 했다.

1년의 품질보증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아 제품을 회사로 보냈다. 먼지가 센서에 너무 많이 끼어 제대로 측정되지 않았었다는 것과 새제품으로 교환해 준다는 답변을 받았다. 에어스프레이로 종종 먼지를 제거해 주는 관리가 필요하다는 설명과 함께.

새로 도착한 제품을 다시 사용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새 제품이 측정하는 미세먼지 수치가 30 미만으로는 여간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설날 연휴 인터넷을 강타한 결벽증 새며느리에서 자주 나오는 말처럼 우리집은 너무 ‘드러븐가’ 보다. 

무튼, 우연히 알게된 2016년 12월 13일자 환경부 보도자료에서 발표한 공기질 측정기 및 공기청정기에 관한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조사 결과에서 17개 조사 대상 제품이 모두 정확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왔다. 국내 공기청정기 제작사들 뿐만 아니라 어웨어도 포함된 시험이었다. 솔직히 놀랍지는 않았다. 수천만원대 이상의 비싼 미세먼지 측정기가 아니면 측정 수치의 신뢰성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럼에도 구매 후 2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평가를 내린다면 별 다섯개 중 세 개 반이다. 여러가지 문제를 차지하더라도 공기질 측정기를 사용하여 대략적인 수치를 가늠할 수 있고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점, 실내 이산화탄소치 측정이 가능하다는 점이 아직은 사용할 동기를 부여한다. 이 제품은 공기청정기 옆에 놓아두고 사용중이다.  

 

두번째로, 에어플래닛에서 나온 카드보드 공기청정기 역시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먼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사이즈에 어울리지 않는 비싼 필터값도 문제였다. 역시 모터 소리를 견디지 못한 모친의 거부에 사용을 중지했다. 다행히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간단하게 직접 제작해 볼 수 있는 교육용에 중점을 둘 만은 하다. 

 

세번째로, 국내 스타트업 제품 에어톡스(AIRTOX)도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큰 모터소리가 문제였고 여름에는 비록 작은 용량이라해도 물 사용방식이어서 습도를 올리는 문제가 생겨 가을까지 사용을 중단했다. 결정적으로 제품 제작자가 미세먼지를 거르는 기능을 추가했다며 두번째 제품을 내놓았다. 이 첫 제품은 미세먼지를 걸러주지 못했던 거다. (이런!)

 

마지막으로, 에어써큘레이터에 자동차 에어컨 필터를 부착시켜 사용했던 자작 공기청정기가 그중 눈에 띄게 가장 많이 먼지를 걸러냈다. 다만, 이것 역시 미학적으로 매우 거슬린다는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조용히 베란다로 퇴장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아직껏 제 할일은 하고 있다. 필터값과 전기료를 생각할 때 앞선 제품들과 달리 유지비가 제일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다. 볼품없는 외관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강추다.

 

내가 시도한 다양한 방법은 돈 안들이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예상 가능한 결론을 남겼다.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지난 여름에 샤오미 공기청정기 미에어2를 두 대 구입했다. 부모님은 마침내 만족하셨다. 공기청정기 성능도 중요하지만 외관 역시 꽤 중요했었나 보다. 미세먼지 측정 센서가 부정확한 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24/7, 365일 돌릴테니까. 한여름조차도 미세먼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 공기청정기 여러 대를 하루종일 지속해서 돌리는 것은 이제 must가 되었기 때문이다.

 

헌데,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과에 대처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는 하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람은(나 포함) 고집이 세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며, 내주머니의 돈이 나가는 해결책에는 즉각 저항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이런 상황이 중국 탓인데 할말 못하는 정부라고 불만 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우리 모두는 생활에서 화석 에너지를 사용하는 만큼 미세먼지를 만들어 낸다. 중국으로부터의 직접적인 피해는 매우 답답한 상황이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미세먼지도 절대적 정도의 차이일 뿐 지구 생태계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미세먼지에 들어있는 철과 질소가 태평양에서 식물성 플랑크톤의 광합성 반응을 촉진하고 그에 따라 바다물 속 용존산소량을 줄여 결과적으로 바닷속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1인당 화석 에너지 사용량을 측정한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손가락질 해야 할 대상은 미국과 서구를 포함한 선진국 국민들일 것이다.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찬 알바트로스의 사체. 플라스틱은 쓰레기 뿐만 아니라 제조 시 발생하는 오염물질과 미세먼지도 해양 생태계를 파괴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공기중의 이산화탄소와, 대기로 발산된 미세먼지속의 철, 질소가 바다에 침투하여 순환하는 기제. 미세먼지는 육지의 공기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출처: 위키피디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친환경 제품을 사용하며 가까운 거리는 걷는 것과 물과 전기를 아껴 쓰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일들이 우리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필요없는 물건은 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과 아시아의 나라들이 저렴한 제품의 생산기지가 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갈 물건이 만들어지는 만큼, 어느 곳으로 어떤 피해가 가는지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다. 해결이 간단치 않은 이유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해야할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후니미세먼지로부터 내 몸 구하기 마지막화-Now and beyond….

피겨 스케이팅의 추억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2월 개막을 앞두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큰 축제다. 88올림픽 때 체육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니 여건만 된다면 꼭 어느 경기든 보러 가라고 하셨다.

그 이후 다시는 한국에서 열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올림픽, 그것도 동계 올림픽이 대한민국 평창에서 개최된다.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맞나보다.

이런 특별한 동계 올림픽에서도 가장 인기 종목으로 꼽히는 것이 피겨 스케이팅이다. 나는 피겨 스케이팅 덕에 동계올림픽을 늘 특별하게 기다린다. 피겨 스케이팅은 김연아 선수 덕분에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김연아 선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오랜 기간 이 아름다운 스포츠의 팬이었다.

피겨 스케이팅은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에 4년마다 올림픽 TV 중계로만 보는 스포츠였다. 그 시절엔 4년마다 돌아오는 이벤트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다. 어린 내게, 피겨 선수들의 연기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강력한 힘과 조화된 완벽한 스포츠로 다가왔다.

80년대는 스캇 해밀턴이라는 남자 싱글 선수(그는 김연아 선수의 밴쿠버 올림픽 때 미국 방송 해설로 국내에서 유명세를 치렀었다.)와 올림픽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2연패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운 카트리나 비트, 아직도 전설 중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볼레로’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아이스댄싱의 토빌 & 딘 커플 등이 유명했다.

 

84년 사라예보 올림픽에서 라벨의 ‘볼레로’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우승한 토빌과 딘이 10년 뒤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 갈라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보다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고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 자체를 사랑하고 관심을 두게 만든 커플이 있었다. 세르게이 그린코프와 예카테리나 고르디예바라는 구소련 출신 페어 스케이터다.

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 때였다. 습관적인 올림픽 경기 시청 루틴으로 무심코 이어지는 페어 스케이팅 프리 경기를 보고 있었다. 페어 스케이팅의 특성상 아슬아슬한 장면과 자잘한 실수가 잦아 눈에 들어오는 경기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빙판을 들어서자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춰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20인치 남짓했던 작은 브라운관 컬러TV에서도 그들의 몸짓은 지상에 사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빙판 위를 지치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던 그들의 스케이팅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단순한 언어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얼마나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또 얼마나 힘찬 동시에 정확했던지. 나는 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화면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음악의 시작과 끝까지 이 둘은 빙판 위를 둥둥 떠다녔다. 혹시라도 놓칠까 싶은 조마조마함이나 동작이 서로 맞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피겨스케이팅계의 유명한 선수들이었지만, 88년 올림픽에서 펼친 기념비적인 경기로 그린코프와 고르디예바는 전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1988년 16살의 고르디예바와 20살의 그린코프. 어린 나이를 뛰어넘는 천상의 연기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88년 올림픽 우승 이후 은퇴하여 프로선수로 전향하자 다시는 그 둘의 아마추어 경기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규정 변경으로 프로 선수가 다시 아마추어로 전향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곧 복귀했다. 그렇게  돌아온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 또다시 가볍게 우승했다. 이렇게 그린코프와 고르디예바, 애칭으로 G&G 커플은 네 번의 세계선수권과 세 번의 유럽 선수권, 그리고 두 번의 올림픽에서 우승하며 페어 스케이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페어 스케이팅 역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는 놀라운 테크닉과 함께 예술성을 겸비했던 선수들로 남아 있다.

88년 이후 팬이 된 나는 그들이 나오는 경기와 기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USB 메모리는커녕 VHS가 최고 사양이던 시절, VHS 테잎에 경기를 녹화해 테잎이 늘어지도록 보았던 것 같다.

만 15세와 11세의 어린 나이에 만나 완벽한 호흡으로 빙상장을 누비던 둘은 91년에 결혼하여 빙상장 밖에서도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었다. 고르디예바가 임신 기간 중 만삭이 다 되도록 스케이트를 탔고 92년에 예쁜 딸 다리아를 낳은 뒤에도 순식간에 몸을 회복하여 남편 곁으로 돌아와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는 기사도 보았다. 그때 그 모든 일이 95년까지였다.

95년 11월, 고르디예바와 아이스쇼를 앞두고 훈련하던 그린코프는 얼음 위에서 쓰러져 28살이란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다시는 그들의 아름다운 스케이팅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한동안 피겨 스케이팅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린코프의 비극적인 사망 후 수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96년 2월, 고르디예바가 링크로 돌아왔다. 그녀의 첫 번째 솔로 무대는 고인이 된 남편에게 바치는 헌정 무대였다. 말러의 교향곡 제5번 4악장 C# 아다지에토에 맞춰 얼음 위에서 남편을 추모하던 그녀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평생의 동반자에게 가슴 아픈 작별을 고하고 겨우 몇 달 만에 홀로 서야 했던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단 두 번만 공연했던 이 무대는 아직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페어 스케이팅은 그 난이도와 위험성으로 인해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선수층이 가장 적다. 내게 가장 아름다웠던 그들이 떠나자 페어 스케이팅을 즐겨 보았던 나는 이후 여자 싱글과 남자 싱글, 그리고 아이스 댄싱으로도 다시 눈을 돌렸다.

90년대부터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인생 경기를 보인 옥사나 바율, 언제나 안정되고 매력이 넘치는 경기로 오랜 기간 팬들을 행복하게 해줬던 미셸 콴, 거만과 자신감 사이의 줄타기도 매력이라는 것을 보여준 불굴의 사나이 예브게니 플루센코, 스케이팅이 아름다워 넋을 놓고 보곤 했던 일리야 쿨릭 등이 피겨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주었다. (고르디예바는 후에 다섯 살 연하의 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인 일리야 쿨릭과 재혼해 새로운 가정을 이뤘다.)

 

예브게니 플루셴코의 갈라 프로그램. 팬캠은 언제나 진리다.  이 미워할 수 없는 빙판의 악동같으니.

나는 미셸 콴의 은퇴 후 한동안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이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잠시 멀어져 있던 2006년 쯤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 피겨 신동이 나왔고 심지어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유튜브에서 올라온 영상으로 피겨 스케이팅 경기가 아니라 노래방에서 가수 뺨치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을 먼저 보게 된 김연아 선수였다.

김연아 선수가 그 이후 한국과 세계 피겨 스케이팅계에서 이룩한 것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연아 선수가 선보인 경기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밴쿠버 올림픽 때의 긴장과 설렘은 잊을 수가 없다. 소치 올림픽 때의 마음 아픈 기억도 연아 선수여서 특별하다. 그리고 그 전과 사이사이 있었던 프로그램들 모두 고맙고 또 고맙다.

그렇지만 내가 김연아 선수에게 가장 감사한 것은 그녀의 경기와 그녀가 이룩한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서 이룬 업적이 아니다. 내가 가장 고마운 것은 피겨 스케이팅을 재발견하고 다시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하게 만들어 준 것 때문이다.

그녀의 경기를 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스포츠로서의 피겨 스케이팅을 알아가게 되었고, 해외의 피겨 스케이팅 커뮤니티에도 가입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으니 아는 만큼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알아가면서 수많은 피겨 스케이팅의 전설들을 하나하나 접했다. 여자 싱글의 전설 소냐 헤니와,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동작으로 현대 피겨의 상징을 도입하게 만든 대명사 재닛 린, 깐깐하지만 피겨를 향한 사랑이 느껴지는 원로 딕 버튼 그리고 피겨 스케이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존 커리같은 선수도 알게 되었다. 유튜브를 통해 예전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영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던 것도 큰 도움이었다.

 

경기보다 공연이 더 멋졌던 존 커리의 셰헤라자데. 개인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스케이터다.

김연아 선수가 은퇴하고 4년이 지났다. 한국의 얇았던 선수층은 많이 두꺼워졌고 김연아 키즈들이 다음 세대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슬픈 사실이 있다. 커리어 내내 단 한 번도 포디움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진 김연아 선수와 같은 기량을 지금의 선수들에게서 기대하면 안 되건만, 어느새 한국에서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80년대와 90년대의 전성기 시절 피겨 스케이팅에 대한 인기는 이미 사라졌다. 세계 피겨계를 주름잡았던 미국에서 미셸 콴 이후 대스타가 없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들 한다.

현재는 얼음 폭풍 프로젝트라고 하여 막대한 투자로 우수한 선수층을 두껍게 유지해온 일본과 푸틴의 지원으로 괴물 같은 선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러시아가 사실상 피겨 스케이팅계의 가장 큰 시장으로 남았을 뿐이다. 미국은 2006년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고 2010년 이후로는 제대로 된 경기력을 갖추고 메달을 획득하는 선수들이 사실상 거의 없다. 이러한 가운데 특히 일본의 시스템은 너무나 부럽다. 피겨계의 스타들을 모아서 상당 규모의 아이스 쇼를 꾸준히 개최한다. 그리고 항상 만석을 자랑한다. 평창 올림픽에는 그들의 슈퍼스타였던 아사다 마오가 은퇴한 뒤 그 뒤를 잇는 스타인 소치 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유주르 하뉴를 보기 위해 대규모의 관중이 한국으로 올 것이다.

피겨계의 변방조차도 되지 못했던 대한민국 출신 김연아 선수가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는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를 전 세계에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녀의 피겨 안무가였던 데이비드 윌슨도 한 인터뷰에서 그러한 생각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한때였다.

그렇기에 씁쓸하다. 김연아라는 사람에게만 집중했던 한국을 보는 듯하다. 김연아 선수는 한국이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을 두고 사랑해 주어서 단단히 뿌리내리기를 그 누구보다 가장 바랐을 터다. 그녀는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홀로 분투 했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김연아 선수 이후 아직 괄목할만한 성적을 국제무대에서 거둔 선수가 없는 가운데 이제 피겨를 향해 열광했던 순간들은 그때뿐인 듯 박제되어 남겨졌다.

이렇게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나면 선수들은 여전히 구슬땀을 흘리며 부상의 공포와 힘든 훈련의 아픔을 매일매일 견딘다. 너무나 큰 거목의 그림자를 뒤따르기는 쉽지 않겠지만 묵묵히 피겨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김연아 선수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열악한 한국 피겨 현실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는 선수 하나하나가 내게는 모두 소중하다.

4년마다 보는 경기, 동계 올림픽에서 입장권이 가장 비싼 경기로 남지 않고 매년 가을 그랑프리 시즌부터 3월 세계 선수권까지 시즌을 기다리는 한국 팬들이 좀 더 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이것이 너무 큰 욕심일까? 테니스나 골프 같은 대중적인 인기와 기업의 후원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좀 더 탄탄한 팬층이 생겨 이 멋진 스포츠를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다.

 

내가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는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 제목처럼 세계로 김연아 선수의 비상을 알리는 프로그램이었다. 한국 피겨는 다시 부상할 수 있을까?

후니피겨 스케이팅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