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의 고장 군산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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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TV프로에서 ‘도보여행자의 천국 군산 탁류길’을 봤다. 꼭 한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되어 군산 여행을 떠났다. 채만식 소설 ‘탁류’를 읽은 건 고등학교 시절이니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김동인의 ‘감자’와 이광수의 ‘사랑’을 읽으며 고전에 푹 빠져있을 때였다.

금강 하굿둑을 지나 군산 초입에 채만식 문학관이 있다. 배 모양의 문학관에는 작가의 일대기와 그의 작품집이 전시되어 있다. 호가 백릉인 채만식은 1902년 군산 임피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임피 보통학교 졸업 후 경성 중앙학교와 일본 와세다 대학 문과를 다녔으나 장기결석으로 퇴학처분당했다. 그 후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과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 1945년부터 고향에 내려와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1950년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탁류는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장편소설이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을 타고 흘러온 금강이 끝나는 군산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수난사를 그리고 있다. ‘탁류(濁流)’라는 제목에서도 암시하듯 타락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위선, 음모, 살인이 횡행하던 1930년대 한국사회의 단면을 풍자했다. 일제의 억압과 자본주의의 억압이라는 이중 억압이 조선 민중을 내리누르던 암울한 시대였다.

채만식은 소설 탁류에서 군산을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군산은 일제 강점기에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던 항구도시로 식민지 경제의 상징인 ‘미두장(米豆場)’이 운영되던 곳이다.

「군의 고원(雇員)을 지낸 정 주사는 식민지 시대를 지내면서 도시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만다. 미두(米豆)라는 투기 노름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한 탕을 노리며 미두를 시작했으나 가산만 탕진하게 되자, 돈에 대한 탐욕으로 자신의 딸 ‘초봉’을 사기꾼에 호색한인 은행원 고태수와 결혼하도록 강요한다. 제중당이란 약국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초봉’에게는 남승재라는 의학도 애인이 있었지만 부모를 위한 희생정신으로 고태수와 결혼한다. 하지만 고태수의 친구 장형보의 흉계로 남편을 잃게 되고 형보에게 몸까지 빼앗기게 된다. 모든 걸 체념한 초봉은 약국 주인 박제호의 유혹에 넘어가 그의 첩이 된다. 청순하고 예쁜 초봉이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딸을 낳게 되는데 그때 장형보가 나타나 자식의 양육권을 주장하며 박제호에게 초봉을 빼앗는다. 자신의 모든 불행이 장형보 때문임을 알게 된 초봉이 장형보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탁류의 배경인 째보선창(군산 내항) 길을 걸어본다. 내항은 지리적으로도 탁류가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소설 속 배경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군산항 인근에는 전군가도(전주-군산 간 도로로 1908년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아스팔트 도로)를 통해 들어온 쌀을 수출하는 미곡 취인소, 뜬다리, 세관, 은행 등. 근대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고종황제는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군산을 개항했지만 결국은 쌀을 수탈당하고 일본에 토지까지 침탈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째보선창 주변에 장미 갤러리와 미즈카페가 보인다. 장미 갤러리는 장미동이라는 동네 명에서 따왔단다. 장미 하면 꽃을 떠올리지만 곳간의 장(藏)과 쌀의 미(米)가 합쳐 쌀 창고를 뜻한다. 장미 갤러리는 1930년대 “조선 미곡창고 주식회사의‘ 의 쌀 창고였다. 현재는 갤러리와 체험실로 쓰이고 있었다. 맞은편 미즈카페도 그 당시 미즈상사를 개조해 만든 카페다. 2층은 일본식 다다미로 되어있어 차를 마시며 체험하기 좋았다. 미즈카페와 이웃한 건물에 ‘군산 근대미술관’이 있다. 이 곳 역시 1907년에 군산 최초로 지은 일본 제18은행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건물 안은 군산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로 꾸미고 ‘일제 수탈사 사진전’과 ’18은행(일본에서 은행 설립을 허가받은 순서) 건물역사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군산 근대미술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군산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건물이 보인다. 소설 ‘탁류’에서 초봉의 첫 남편 고태수가 다니던 직장이다.

가족을 위해 희생된 초봉이의 고달픈 인생 여정과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가 흐르고 있는 군산항에 눈이 소복이 쌓였다. 아픔과 분노보다는 오히려 평온해지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군산,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다. 다음에는 가보지 못한 군산 골목골목을 누벼봐야겠다.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한 성희탁류의 고장 군산을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