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스케이팅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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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이 2월 개막을 앞두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큰 축제다. 88올림픽 때 체육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니 여건만 된다면 꼭 어느 경기든 보러 가라고 하셨다.

그 이후 다시는 한국에서 열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올림픽, 그것도 동계 올림픽이 대한민국 평창에서 개최된다.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맞나보다.

이런 특별한 동계 올림픽에서도 가장 인기 종목으로 꼽히는 것이 피겨 스케이팅이다. 나는 피겨 스케이팅 덕에 동계올림픽을 늘 특별하게 기다린다. 피겨 스케이팅은 김연아 선수 덕분에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김연아 선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오랜 기간 이 아름다운 스포츠의 팬이었다.

피겨 스케이팅은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에 4년마다 올림픽 TV 중계로만 보는 스포츠였다. 그 시절엔 4년마다 돌아오는 이벤트를 손꼽아 기다렸던 것 같다. 어린 내게, 피겨 선수들의 연기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강력한 힘과 조화된 완벽한 스포츠로 다가왔다.

80년대는 스캇 해밀턴이라는 남자 싱글 선수(그는 김연아 선수의 밴쿠버 올림픽 때 미국 방송 해설로 국내에서 유명세를 치렀었다.)와 올림픽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 2연패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운 카트리나 비트, 아직도 전설 중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볼레로’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아이스댄싱의 토빌 & 딘 커플 등이 유명했다.

 

84년 사라예보 올림픽에서 라벨의 ‘볼레로’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우승한 토빌과 딘이 10년 뒤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 갈라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보다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고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스포츠 자체를 사랑하고 관심을 두게 만든 커플이 있었다. 세르게이 그린코프와 예카테리나 고르디예바라는 구소련 출신 페어 스케이터다.

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 때였다. 습관적인 올림픽 경기 시청 루틴으로 무심코 이어지는 페어 스케이팅 프리 경기를 보고 있었다. 페어 스케이팅의 특성상 아슬아슬한 장면과 자잘한 실수가 잦아 눈에 들어오는 경기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빙판을 들어서자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춰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20인치 남짓했던 작은 브라운관 컬러TV에서도 그들의 몸짓은 지상에 사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빙판 위를 지치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던 그들의 스케이팅이 얼마나 특별했는지 단순한 언어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얼마나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또 얼마나 힘찬 동시에 정확했던지. 나는 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화면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음악의 시작과 끝까지 이 둘은 빙판 위를 둥둥 떠다녔다. 혹시라도 놓칠까 싶은 조마조마함이나 동작이 서로 맞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같은 것은 없었다. 이미 피겨스케이팅계의 유명한 선수들이었지만, 88년 올림픽에서 펼친 기념비적인 경기로 그린코프와 고르디예바는 전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1988년 16살의 고르디예바와 20살의 그린코프. 어린 나이를 뛰어넘는 천상의 연기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88년 올림픽 우승 이후 은퇴하여 프로선수로 전향하자 다시는 그 둘의 아마추어 경기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규정 변경으로 프로 선수가 다시 아마추어로 전향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은 곧 복귀했다. 그렇게  돌아온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 또다시 가볍게 우승했다. 이렇게 그린코프와 고르디예바, 애칭으로 G&G 커플은 네 번의 세계선수권과 세 번의 유럽 선수권, 그리고 두 번의 올림픽에서 우승하며 페어 스케이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페어 스케이팅 역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는 놀라운 테크닉과 함께 예술성을 겸비했던 선수들로 남아 있다.

88년 이후 팬이 된 나는 그들이 나오는 경기와 기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USB 메모리는커녕 VHS가 최고 사양이던 시절, VHS 테잎에 경기를 녹화해 테잎이 늘어지도록 보았던 것 같다.

만 15세와 11세의 어린 나이에 만나 완벽한 호흡으로 빙상장을 누비던 둘은 91년에 결혼하여 빙상장 밖에서도 함께 걷는 동반자가 되었다. 고르디예바가 임신 기간 중 만삭이 다 되도록 스케이트를 탔고 92년에 예쁜 딸 다리아를 낳은 뒤에도 순식간에 몸을 회복하여 남편 곁으로 돌아와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는 기사도 보았다. 그때 그 모든 일이 95년까지였다.

95년 11월, 고르디예바와 아이스쇼를 앞두고 훈련하던 그린코프는 얼음 위에서 쓰러져 28살이란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다시는 그들의 아름다운 스케이팅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한동안 피겨 스케이팅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린코프의 비극적인 사망 후 수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96년 2월, 고르디예바가 링크로 돌아왔다. 그녀의 첫 번째 솔로 무대는 고인이 된 남편에게 바치는 헌정 무대였다. 말러의 교향곡 제5번 4악장 C# 아다지에토에 맞춰 얼음 위에서 남편을 추모하던 그녀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평생의 동반자에게 가슴 아픈 작별을 고하고 겨우 몇 달 만에 홀로 서야 했던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단 두 번만 공연했던 이 무대는 아직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페어 스케이팅은 그 난이도와 위험성으로 인해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선수층이 가장 적다. 내게 가장 아름다웠던 그들이 떠나자 페어 스케이팅을 즐겨 보았던 나는 이후 여자 싱글과 남자 싱글, 그리고 아이스 댄싱으로도 다시 눈을 돌렸다.

90년대부터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인생 경기를 보인 옥사나 바율, 언제나 안정되고 매력이 넘치는 경기로 오랜 기간 팬들을 행복하게 해줬던 미셸 콴, 거만과 자신감 사이의 줄타기도 매력이라는 것을 보여준 불굴의 사나이 예브게니 플루센코, 스케이팅이 아름다워 넋을 놓고 보곤 했던 일리야 쿨릭 등이 피겨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주었다. (고르디예바는 후에 다섯 살 연하의 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인 일리야 쿨릭과 재혼해 새로운 가정을 이뤘다.)

 

예브게니 플루셴코의 갈라 프로그램. 팬캠은 언제나 진리다.  이 미워할 수 없는 빙판의 악동같으니.

나는 미셸 콴의 은퇴 후 한동안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이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잠시 멀어져 있던 2006년 쯤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 피겨 신동이 나왔고 심지어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까지 들었다. 유튜브에서 올라온 영상으로 피겨 스케이팅 경기가 아니라 노래방에서 가수 뺨치는 목소리로 노래하는 모습을 먼저 보게 된 김연아 선수였다.

김연아 선수가 그 이후 한국과 세계 피겨 스케이팅계에서 이룩한 것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김연아 선수가 선보인 경기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밴쿠버 올림픽 때의 긴장과 설렘은 잊을 수가 없다. 소치 올림픽 때의 마음 아픈 기억도 연아 선수여서 특별하다. 그리고 그 전과 사이사이 있었던 프로그램들 모두 고맙고 또 고맙다.

그렇지만 내가 김연아 선수에게 가장 감사한 것은 그녀의 경기와 그녀가 이룩한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서 이룬 업적이 아니다. 내가 가장 고마운 것은 피겨 스케이팅을 재발견하고 다시 사랑하고 영원히 사랑하게 만들어 준 것 때문이다.

그녀의 경기를 보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스포츠로서의 피겨 스케이팅을 알아가게 되었고, 해외의 피겨 스케이팅 커뮤니티에도 가입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으니 아는 만큼 더 보고 싶었다. 그렇게 알아가면서 수많은 피겨 스케이팅의 전설들을 하나하나 접했다. 여자 싱글의 전설 소냐 헤니와, 우아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동작으로 현대 피겨의 상징을 도입하게 만든 대명사 재닛 린, 깐깐하지만 피겨를 향한 사랑이 느껴지는 원로 딕 버튼 그리고 피겨 스케이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존 커리같은 선수도 알게 되었다. 유튜브를 통해 예전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영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던 것도 큰 도움이었다.

 

경기보다 공연이 더 멋졌던 존 커리의 셰헤라자데. 개인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스케이터다.

김연아 선수가 은퇴하고 4년이 지났다. 한국의 얇았던 선수층은 많이 두꺼워졌고 김연아 키즈들이 다음 세대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슬픈 사실이 있다. 커리어 내내 단 한 번도 포디움에서 내려온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진 김연아 선수와 같은 기량을 지금의 선수들에게서 기대하면 안 되건만, 어느새 한국에서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80년대와 90년대의 전성기 시절 피겨 스케이팅에 대한 인기는 이미 사라졌다. 세계 피겨계를 주름잡았던 미국에서 미셸 콴 이후 대스타가 없는 것도 한 원인이라고들 한다.

현재는 얼음 폭풍 프로젝트라고 하여 막대한 투자로 우수한 선수층을 두껍게 유지해온 일본과 푸틴의 지원으로 괴물 같은 선수들이 쏟아져 나오는 러시아가 사실상 피겨 스케이팅계의 가장 큰 시장으로 남았을 뿐이다. 미국은 2006년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고 2010년 이후로는 제대로 된 경기력을 갖추고 메달을 획득하는 선수들이 사실상 거의 없다. 이러한 가운데 특히 일본의 시스템은 너무나 부럽다. 피겨계의 스타들을 모아서 상당 규모의 아이스 쇼를 꾸준히 개최한다. 그리고 항상 만석을 자랑한다. 평창 올림픽에는 그들의 슈퍼스타였던 아사다 마오가 은퇴한 뒤 그 뒤를 잇는 스타인 소치 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유주르 하뉴를 보기 위해 대규모의 관중이 한국으로 올 것이다.

피겨계의 변방조차도 되지 못했던 대한민국 출신 김연아 선수가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는 피겨 스케이팅의 인기를 전 세계에서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녀의 피겨 안무가였던 데이비드 윌슨도 한 인터뷰에서 그러한 생각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다 한때였다.

그렇기에 씁쓸하다. 김연아라는 사람에게만 집중했던 한국을 보는 듯하다. 김연아 선수는 한국이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을 두고 사랑해 주어서 단단히 뿌리내리기를 그 누구보다 가장 바랐을 터다. 그녀는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홀로 분투 했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김연아 선수 이후 아직 괄목할만한 성적을 국제무대에서 거둔 선수가 없는 가운데 이제 피겨를 향해 열광했던 순간들은 그때뿐인 듯 박제되어 남겨졌다.

이렇게 화려한 무대가 끝나고 나면 선수들은 여전히 구슬땀을 흘리며 부상의 공포와 힘든 훈련의 아픔을 매일매일 견딘다. 너무나 큰 거목의 그림자를 뒤따르기는 쉽지 않겠지만 묵묵히 피겨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김연아 선수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열악한 한국 피겨 현실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는 선수 하나하나가 내게는 모두 소중하다.

4년마다 보는 경기, 동계 올림픽에서 입장권이 가장 비싼 경기로 남지 않고 매년 가을 그랑프리 시즌부터 3월 세계 선수권까지 시즌을 기다리는 한국 팬들이 좀 더 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이것이 너무 큰 욕심일까? 테니스나 골프 같은 대중적인 인기와 기업의 후원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좀 더 탄탄한 팬층이 생겨 이 멋진 스포츠를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다.

 

내가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는 김연아 선수의 프로그램. 제목처럼 세계로 김연아 선수의 비상을 알리는 프로그램이었다. 한국 피겨는 다시 부상할 수 있을까?

bearlady

만화와 IT 소식 읽기를 즐기고 글쓰기와 피겨 스케이트를 좋아하는 라 라 랜드 거주자. 만화저널 세상을 봐에 제2의 둥지를 틀어 활동하고 있다.

후니피겨 스케이팅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