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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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고)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 시집이 나왔다는 기사를 읽었지만 얼른 사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소설을 쓰신 분이 시를 쓰셨다는 게 흥미롭기는 했지만 워낙 유명한 소설가시라 시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다 선생님의 고향인 통영에서 시집을 만났습니다. 먼저 눈에 띈 건 책 표지에 붙은 선생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연의 숨결이 살아있는 나무판에 그린 선생님의 얼굴은 강인하면서도 따뜻하고 인자해 보이는, 바로 우리의 어머니였습니다.

P4

아련한 추억 속에서 떠올리는 그리움 가득한 어머니.
얼른 책을 사서 품에 안았습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따뜻했습니다.
시를 읽습니다. 문장 하나 글자 한 자 한 자에 선생님의 고백 같은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25년 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냈던 소설 ‘토지’에서, ‘파시’에서, ‘김약국의 딸들’에서 보여줬던 선생님의 마음이 시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원주 토지 문학공원에서 선생님이 가꾸시던 텃밭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짧고 아름다운 청춘들을 위해 방을 내주고 그들이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손수 채소를 가꾸고 음식을 만들어 상에 올리던, 뭉툭하게 닳은 거친 손이 떠오릅니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이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이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곳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하고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함을…
얼마나 더 익어야 알게 될까요?
‘버리고 갈 것만…’을 읽으며 선생님의 문향이 그리워집니다.
드라마로만 봤던, 아직 다 읽지 못한 소설 ‘토지’를 다시 찾아 읽어야겠습니다.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한 성희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