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서버와 웅초 김규택

5 comments


어느 날 스튜디오 공사를 하던 몇 사람 인부가 들판에다 커다란 판유리 한 장을 세워놓았답니다. 마침 들판을 급히 날아가던 한 마리 방울새가 판유리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정신을 차린 다음에 그 방울새는 클럽(새들이 모이는)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일하던 종업원(새)이 그의 머리에 붕대를 감아 주고는 독한 술을 한잔 주었어요.

“도대체 어찌 된 일이야?” 갈매기가 물었습니다.
“내가 들판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공기가 얼어붙어 부딪쳤어.” 방울새가 답했습니다.

그곳에 있던 갈매기와 독수리, 매 등이 어이없어 하자, 옆에 있던 제비는 심각한 표정으로 방울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15년간 살아온 나는 이 나라 하늘을 수없이 날아다녔다. 하지만 공기가 얼어붙는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물이야 추우면 얼어붙겠지만, 공기는 얼 수가 없다.” 라고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넌 아마 우박을 맞았을 거야.” 방울새에게 매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지도 모르지, 제비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갈매기가 물었습니다.
“글쎄, 나는 공기가 얼어붙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제비가 답하자, 큰새들은 말도 안 된다며 박장대소했습니다.

약이 오른 방울새는 자기가 날아가던 들판을 따라가면 틀림없이 얼어붙은 공기에 부딪칠 것이라고 하며, 맛있는 벌레 열 마리를 걸고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갈매기 독수리, 매들은 모두 내기에 응했고 방울새가 가르쳐 준 길을 다라 모두 날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너도 따라오지 않을래?” 그 새들은 제비에게 말했습니다.
“글세, 난 그만둘래.” 하고 제비가 말하자,
“그럼, 할 수 없지.” 라고 말하며, 갈매기와 독수리, 매는 방울새가 가리켜 준 들판을 가로질러 날아가서, 인부들이 세워놓은 커다란 판유리에 모두 부딪쳐 정신을 잃고 말았답니다.

이 이야기는 제임스서버(James Thurber 1894~1961)가 쓴 <우리시대의 우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서버는 카투니스트이며 문필가이다. 1925년 창립된 잡지 <뉴요커>의 만화 담당 편집장을 지내면서 많은 만화(카툰)를 발표했다.


(제임스 서버의 목적지,1946년)

그의 카툰은 독특한 선과 단순화된 유니크한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피터.헤렌 호킨슨.윌리암 스타이크.조지 부스.찰스 아담스.소울 스타인버그 등과 함께 <뉴요커>의 위대한 카투니스트들 맨 앞에 거론되고 있다.
그는 카툰 뿐만 아니라 글 재능도 뛰어나 소설가 수필가로도 유명했다. <내 삶의 어려웠던 시절>, <우리 시대의 우화>, <마지막 꽃>, <로스와 같이 지낸 세월>, <위대한 퀼로우> 등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가 1930~1940년대에 쓴 몇 몇 작품들은 현대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내가 만화가의 꿈을 키우던 무렵, 서버의 카툰을 처음 본 것은 1956년 발행된 <만화춘추>10월호에 소개된 해외 만화중 한 컷이었다. 그림이 간결하고 감각적이긴 하지만, 내용도 그저 그래, 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었다.

그 후 청계천7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책들을 취급하는 헌책방에서 표지가 뜯겨진 <뉴요커 카툰앨범 1925~1950>을 구입했다. 국배판 크기에 400여 페이지로 아트지를 사용한 고급 책이었다. 그 책에 서버의 카툰이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서버의 카툰 여러 편을 보다보니, 서버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그 책에 수록된 많은 카투니스트의 카툰 중에 내 마음에 끌리는 것은 오토소글로우의 카툰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생략된 그림, 세련되고 매끈한 선이 좋았다.
그리고 내용도 캡션이 없어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특히 그의 연작<리틀킹>은 나를 매료시켰었다.

한참 후 <뉴요커 카툰앨범>을 구입했던 그 헌책방에서 서버의 카툰집 <남자, 여자 그리고 개> 1946년도 판 페이버백을 구입했다.
240페이지나 되는 그 책을 자세히 보면서, 나는 서버카툰의 진면목을 느끼게 되었다.
미국에 제임스 서버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웅초 김규택(1906~1962)선생이 있었다. 한국 만화의 효시는 관제 이도영 화백이다. 그 뒤 심산. 청전 화백 등이 만화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은 동양화가로 만화나 삽화를 여가로서 했을 뿐이었고, 본격적인 전업만화가는 웅초 선생이 최초다.

웅초 선생은 아동만화, 시사만화, 성인만화 등 다양한 만화를 했으며 신문, 잡지의 삽화도 많이 그렸다. 그림에 관한 한 무소불위였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웅초 선생은 화재(畵才) 못지않게 문재(文才)도 뛰어나 소설 창작도 여려편 발표했다.


“형과 내가 허교(許交)를 맺어 온지 근 30년 그 동안에 소설과 삽화로 짝을 지어온 것도 한두 차례만이 아니었지만 그러한 직업적인 관련보다도 나는 형의 그 기발하고도 유머러스한 만화에 매양 경탄해 마지않았고, 더구나 일제시대에 형이 집필한 장편유머소설 <망부석>, <억지 춘향전> 등의 작품에는 최대의 찬사를 보내도록 열광적인 애독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형을 단순한 만화가로 알고 있는지 몰라도 형의 유머소설은 어휘의 풍부성에 있어서나 문장의 착실성에 있어서나 또는 구성의 오묘한 점에 있어서나 오랜 옛날에 이미 일가를 이룬 분이라고 믿어왔던 것입니다…………(이하 생략)

이글은 한국소설계의 거목 정비석 선생이 쓴 ‘웅초 김규택 화백’ 이라는 글 가운데 앞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내가 웅초 선생의 만화를 보게 된 것은 1960년 초 신문에 게재된 주로 붓으로 그린 선이 굵고, 텁텁한 토속적인 냄새가 나는 시사만평과 4컷 만화였다.


그전에는 선배들의 말과 어쩌다 오래된 잡지에서 삽화를 몇 컷 본 것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것이 웅초 선생은 6.25 전쟁중에 일본 도쿄에 있는 UN군 사령부 심리작전과 전속 만화가로 근무하면서 국내에서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60년 10월 중순경, 나는 채일병과 같이 조선일보사 편집 고문실(?)로 웅초 김규택 선생님을 직접 찾아뵈었다. 선생님이 도쿄에서 8년간 작품 활동을 하시다 귀국하신지 1년쯤 됐을 때였다.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은 우리들이 ‘중앙아동만화작가협회’를 창립하고는, 만화가의 대선배이신 선생님을 협회 고문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확답을 듣지 못하고 돌아왔었다.
다음 해(1961년) 웅초 선생은 한국일보로 자리를 옮겨 사회면에 4컷 만화<명동 태자>를 연재했다.
<명동태자>는 붓과 펜을 병용하여 선이 투박함을 느끼게 했고, 무게감을 주는 구수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세련된 펜선과 단순화된 양식에 익숙해져있던 나는 솔직히 말해 <명동 태자>는 젊은 나에게 크게 어필하지는 않았다.

웅초 선생은 <명동태자>를 135회로 끝내고, 1962년 4월 지병으로 타계하시고 말았다.
국내 현역 만화가 중에도 화재와 문재를 겸비한 이들이 여럿 있으나, 웅초 선생처럼 문단에서도 소설가로 인정할 정도의 만화가는 아직 없다.


지난 6월 2일, 건대역 근처 ‘롯데시네마’에서 김태익 감독의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 <스퀴시> 시사회에 참석했다. 만화가 김산호, 권영섭, 백성민 등이 참석했으나 이외로 애니메이션계 인사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몇 명을 초청했으나 사정이 있어 못 온 모양이었다.
90분가량 되는 <스퀴시>를 관람하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김 감독이 “조 선생님, 제가 새 작품을 구상중인데 시나리오를 부탁합니다.” 한다.

내가 <썬더A>, <슈퍼태권V>, <우뢰매> 등 10여 편을 넘게 시나리오를 집필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김 감독, 나는 자신 없어요. 이젠 젊은 사람들에 비해 감각도 무디어지고 창의력도 전만 못해요.”하며 거절했다.
앞에 예를 든 제임스 서버의 우화처럼, 방울새의 내기에 갈매기, 독수리, 매가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날아가서 들판에 세워 논 유리에 모두 부딪치는 우를 범하기 보다는, 제비처럼 그 새들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hrlcho

신문만화로 시작해서 잡지와 대본소(貸本所)만화를 거쳤고, 일본산 TV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한 뒤부터는 국내 극장용 애니메이션계의 탁월한 창안자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조 항리제임스 서버와 웅초 김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