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희의 수필향기 – 별밤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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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h1114 1새벽 2시 45분.

기다림에 지쳐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어이- 난데, 여기 아파트 입구다. 모시러 나와라 ”

술이 잔뜩 취한 남편의 목소리다.

처음 몇 번은 동네가 창피해서 ‘모시고’ 들어왔더니 이젠 당연하단 듯이 전화를 해댄다.

‘지는 기분 내면서 새벽까지 술 마시고 나는 마음 졸이며 집에서 기다리는데 모시러 까지 나오라고, 흥, 이젠 안 나간다.’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버텼다. 몇 번 더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잠잠해졌다. 알아서 올라오겠지.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문 여는 기척이 없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슬슬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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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라 차들도 쌩쌩 달리는데 어디 다른 데로 휘적휘적 걸어갔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혹시 벤치에라도 누워 있나 싶어 슬그머니 아파트 앞 공원을 휘둘러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이젠 정말 걱정이 된다. 혹시나 하며 공원 후미진 곳에 있는 정자로 가 보았다. 어떤 남자가 누워 있다. 신발까지 얌전히 벗어놓고 코까지 골면서.

흔들어 깨워
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취해 늘어진 사람을 집까지 데리고 갈 자신이 없다. 이럴 때 아들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보련만 그 아들마저도 방학이라고 훌쩍 어학연수를 떠나버렸다. 하는 수없이 옆 벤치에 앉아 깨어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hsh1114 3밤공기가 제법 시원했다. 며칠 전까지 열대야로 잠 못 이루던 더위는 어디 여행이라도 떠났는지 간간히 바람까지 날려주며 극성스런 모기까지 쫓아주었다.
빙 둘러 세운 건물 사이로 검은 하늘이 보였다. 언제 하늘 한 번 제대로 올려다보고 살았던가! 그동안 화려한 도시의 불빛과 고층 아파트에 가려 하늘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그것도 전체 하늘도 아닌 아파트 건물에 꼬리가 잘려 북두칠성 머리만 보이는 하늘을 말이다.

한 시간쯤 그렇게 하늘바라기를 하다가 다시 한 번 남편을 깨워 본다. 아직도 꿈쩍 안 한다.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다가 그의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냈다. 걸핏하면 지갑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혼자서 들어가려고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그래 이왕 기다리는 김에 더 기다려 주자. ‘하룻밤 안 잔다고 어떻게 되겠나.’ 늦게 들어올 때마다 남편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 동네에 5년을 넘게 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벤치를 차지하고 한가하니 여유를 부려본 적이 없었잖아. 물론 내가 바쁜 탓도 있었지만 나같이 어중 띠기 나이의 아줌마는 이 공원에 나와 수다 떨 명함도 못 내밀었다. 놀이터가 있는 앞 공원은 꼬맹이들을 거느린 젊은 엄마들의 왕국이다. 아침 시간에는 아이들을 학원이나 유치원 차에 태워주고서 벤치에 앉아 놀고 오후에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또 공원에 앉아 수다를 떤다. 매일 보면서도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도대체 공원을 비울 생각을 안 한다. 아예 커피까지 끓여와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어쩌다 지나는 길에 끼어들어 우리 때의 아이들 키웠던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그건 요즘 세대와 맞지 않는 노친네 방식이라고 몰아치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고 무안해져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만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정자도 우리 동네 노인들의 차지다. 노인정 옆에 붙어 있는 탓도 있겠지만 어디 마땅히 갈 곳 없는 노인들은 하루 종일 정자에 앉아 한가롭게 부채질을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가끔씩 부녀회에서 과일이나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 드리면 어린애처럼 좋아하시며 우리 동네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신다. 그러면서도 놀이터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젊은 엄마들을 쳐다보며 고달팠던 시집살이와 자식 키우던 얘기를 하고 또 하신다.

hsh1114 4한참을 앉아 있자니 허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배겨 슬그머니 남편 옆에 누워버렸다. 낮에는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밀려 눈치만 보며 지나치던 공원을 오늘 밤은 남편과 둘이서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참말로 살다 보니까 술 취한 남편 덕에 이런 호사도 마음껏 누려 보네.

한밤중인데도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매미는 잠도 안 자나 보다. 세상에 나와서 일주일 안에 짝짓기를 못하면 7년을 기다려온 보람도 없이 사라져야 하니 얼마나 간절하고 애달픈 시간일까? 오늘따라 매미 소리가 더욱 처량하게 들린다. 정자 옆으로 쭉 뻗어 늘씬함을 자랑하는 리키다 소나무와 좁다란 오솔길에 꽃 대궐을 이루고 있는 목백일홍이 별밤 아래에서도 고운 자태를 뽐낸다. 게다가 바람이 불 때마다 과일향인지 꽃향기인지 달콤한 향내가 은근히 코끝을 자극한다. 평소에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맡기 싫었던 남편의 술 냄새도 오늘은 향기로 느껴진다. 그 향기에 취해 스르르 잠이 들었다.

hsh1114 5얼마나 지났을까, 우유배달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깼을 때 어슴푸레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이젠 깨워서 들어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경비아저씨가 손전등을 들고 나타났다.

“두 분 데이트 잘 하셨어요? 이젠 저희 임무 끝입니다.”

hsh1114 6맙소사. 공원 곳곳에 설치된 CCTV로 우리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생중계되고 있었다.

글/그림 만화저널 세상을 봐 한성희 기자 hanregina@cartoonfello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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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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