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정류장

                                                             전 미 란

 

“아저씨, 이 차 어디로 가요?”

문이 반쯤 닫히려는 순간, 버스기사가 버럭 화를 낸다. 버스는 짧은 정차 후 지체됐다는 듯 사납게 출발한다. 금방 행선지를 묻던 여자 승객의 물음이 덜컹 귀에 닿는다. 이어 냉랭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다음 정류장은 신월동입니다.

  어휴, 근데 열 받아 죽겠어. 내가 하루 이틀 일하는 것도 아닌데, 들어 온지 얼마 안 된 놈이 주인한테 전화 한 거야. 자기도 수다 떨면서 우리가 떨면 사장한테 꼬질른다니까. 얼마나 사람을 얕잡아 보는지 몰라. 오늘 출근하면 또 한소리 듣겠지…. 난 이 집 김밥이 좋아. 시금치는 질긴데 우엉이 많이 들었거든.

앞좌석 등받이 사이로 보이는 오십이 훌쩍 넘은 여자와 그보다 더 나이든 여자가 은박지에 싸인 김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다음 정류장은 합정역입니다.

  승객들이 교통카드를 찍을 때마다 환승입니다! 환승입니다! 연이어 들린다. 먼 곳을 떠돌던 중학교 때 기억이 갈아타듯 환승한다. 시험성적이 뒤처졌던 나는 학교장추천을 받지 못해 명문고가 있는 도회지 진학이 무너졌다. 낮은 점수에 맞춰 도시로부터 떨어진 소읍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다음 정류장은 홍대입구입니다.

  깊은 숨을 내쉬며 신촌거리를 유심히 바라본다. 대학가라 그런지 거리가 젊음으로 활기차다. 젊음의 진원지 같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잘 낫지 않는 상처 같은 기억이 되살아난다. 살아오면서 관통했던 많은 정류장 중에 가장 초라하게 통과했던 열일곱 살 정류장. 멀리 떠나보낸 줄 알았던 좌절의 시간들이 졸음처럼 쏟아지며 차창에 부딪힌다. 나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경계를 얼마나 넘고 싶어 했던가. 버스를 탈 때는 목적을 향해 가고 싶었지만 중간에 수없이 내리고 싶었다.

다음 정류장은 연세대 앞입니다.

  주말이면 고향읍내 정류장에는 대부분 촌에서 도시학교로 돌아가려는 학생들로 붐볐다. 새하얀 칼라에 명문여고 뱃지를 단 약방집 딸은 우월감을 반짝이며 나타났다. 한때 가깝게 지낸 그 친구와 마주칠 때마다 엄지로 눌러 박은 압정처럼 마음이 납작하게 눌리었다. 길은 외길이었고 완행버스는 내가 자취를 하고 있는 소읍을 거쳐 야만 도시로 갈 수 있었다.

다음 정류장은 이대입구입니다.

  어느 날 하필 선망의 감정을 품었던 그 애와 버스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는 그 친구와 짐짓 모른 척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 애의 눈웃음이 자꾸만 날 얕잡아 보는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열패감이 비포장 길 뿌연 먼지처럼 풀썩풀썩 일어났다. 나는 주눅과 창피함이 바싹 죄어치는 바람에 목적지에 못 미쳐 내려버렸다. 어쩌자고 무작정 내리고 말았는지. 낯선 곳에서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음 정류장은 안국역입니다.

  버스는 정류장마다 가쁜 숨을 돌리듯 멈춰 서며 묵묵히 달린다. 김밥 먹던 여자들의 대화가 다시 들려온다. 아휴, 젊은 사장이 어찌나 갈구는지 몰라. 하느님 사랑으로도 용서되는 게 아니야. 일손이 부족해도 인원 보충 안해주지. 휴가마저 못 쓰게 하지. 이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 날씨 좋다. 오늘 같은 날은 즐겨야 하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맞은편 차도에는 차들이 납작하게 엎드린 채 밀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어 보인다. 그녀들은 광화문쯤에서 하차 벨을 누르더니 쫓기듯이 후다닥 내렸다.

  버스는 다시 차창으로 고층빌딩 세상을 끝없이 반사하고 받아내며 달린다. 한숨을 틀어막듯 김밥을 삼키던 여자가 신산한 생의 노선에서 하차하고 싶은 정류장은 어디였을까. 꺾어진 길 없이 순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피곤에 눈을 붙이거나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에 얼굴을 파묻거나 작은 손잡이에 의지하며 휘청거리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 채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를 부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다음엔 더 잘하고 싶었다. 다음이라는 정류장에는 늘 희망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이다음이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들이 쌓여 가는 사이 이마와 눈가에 주름살이 늘고 흰머리가 생겼다. 사는 일이 수많은 정거장을 거치는 것과 같다면 난 지금 생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다음 정류장을 향해 막 출발하려던 버스가 끼익, 브레이크 소음과 함께 급정거를 한다. 문이 열리자, 뒤늦게 뛰어온 한 중년여자가 외치듯 묻는다.

“아저씨, 이 차 어디로 가요?”

“그 많은 노선을 다 말해 달라는 거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