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재즈신은 정통주의를 표방하기 보다는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형태의 진보로 진행되는 추세다. ECM을 비롯한 유럽 레이블의 약진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70년대 이후 ECM의 출현으로 가속화된 재즈의 변신은 이제 각 레이블의 고유성에 의거한 스펙트럼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가장 활발하게 신보를 발매하고 있는 ECM, ACT, W&W등은 공교롭게도 모두 독일 레이블이지만 전통적인 재즈 강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와 이태리뿐만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등 북유럽 지역의 레이블 역시 그들만의 특색을 유지하며 현재진행형으로 유지되는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2000년대 초반 국내에 수입 발매된 이탈리아 재즈 레이블 ‘EGEA’는 검은 색 테두리를 두른 독특한 앨범 자켓 디자인과 소속 아티스트들의 면면으로 인해 국내 재즈 애호가들에게 시선한 충격을 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이전에 이미 소개되어 이탈리아 재즈의 참신함을 알렸던 레이블인 Cam Jazz와는 또 다른 음악적 색감과 당시 국내엔 미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태리 연주자들이 대거 소개되면서 현재까지도 적지 않은 매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발군은 지중해의 낭만적인 풍경을 그림으로 그린 아름다운 커버 아트로 유명한 앨범 <Racconti Mediterranei>이다. 당시 소개된 EGEA의 앨범 중에서도 단연 화제였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EGEA의 간판격인 앨범이다.

앨범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출신 엔리코 피에라눈치 (Enrico Pieranunzi)다. 엔리코 피에라눈치는 지금까지 쳇 베이커, 조이 배론, 폴 모션, 리 코니츠 등 여타 쟁쟁한 연주자들과의 협연은 물론 솔로, 듀오, 트리오등 다양한 구성의 앨범을 발표해오고 있다. 특히 그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빌 에반스의 충실한 계승자’라는 칭호답게 클래식과 재즈를 넘나드는 서정적인 피아니즘으로 유명하다. 앨범이 발표된 지 20여년이 흐른 지금 엔리코 피에라눈치를 유러피언 재즈 피아노의 전설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앨범에 참여한 다른 멤버들 역시 각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연주자들이다. 베이스의 마크 존슨 (Marc Johnson)은 빌 에반스 트리오의 마지막 베이스 주자로 브라질의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보컬인 엘리아니 엘리아스 (Eliane Elias)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드럼의 조이 베런과 함께 엔리코 피에라눈치 트리오의 멤버로 엔리코 피에라눈치의 수많은 앨범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클래시컬한 클라리넷으로 이 앨범의 가치를 더해준 가브리엘 미라바시 (Gabriele Mirabassi)는 세계의 곳곳의 저항 음악을 서정적인 솔로 피아노로 구현한 앨범 <Avanti> (Sketch)의 피아니스트로 친숙한 지오바니 미라바시(Giovanni Mirabassi)의 친형이다. 형제는 레이블 EGEA가 위치해있는 이탈리아 페루자 출신이기도 하다.

<Racconti Mediterranei>는 드럼이 빠진 대신에 클라리넷이 들어간 독특한 구성이다. 드럼이 제외되고 가브리엘 미라바시의 클라리넷이 들어갔다는 말은 처음부터 클래시컬한 멜로디 위주의 연주를 들려주겠다는 의도이리라. 여기에 마크 존슨의 베이스 역시 시종일관 피치카토와 아르코를 넘나드는 유연한 주법으로 클래식의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일조한다.

첫 번째 트랙이자 베스트 트랙이라 할만한 ‘The Kingdom (Where Nobody Dies)은 이 앨범의 알파이자 베타이며 오메가라 할 만큼 세 연주자의 모든 예술성을 담고 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먼저 피아노의 명징한 음 몇 개가 흐르는 것과 동시에 클라리넷이 이어 받더니 곧이어 베이스의 현이 투명한 물방울처럼 튕겨 오른다. 부제의 ‘Where Nobody Dies’가 말해 주듯 앨범 자켓의 그림 속 지중해의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아무도 죽지 않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왕국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매번 들을 때 마다 느끼는 이 신비로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엔리코 피에라눈치의 피아노와 가브리엘 미라바시의 클라리넷은 말 할 것도 없지만 특히 마크 존슨의 베이스는 초반 피치카토와 달리 2분여가 지난 지점부터 현을 활로 마찰시키는 아르코 스타일의 연주를 들려준다. 그리고는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주법으로 돌아간다. 어느 순간 자칫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이 부분이 가슴 깊이 들어온다면 비로소 이 트랙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것이다. 1분 30여 초간 이어지는 이 부분만큼은 마크 존슨의 베이스가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아주 가끔, 삶은 결국 미완이고 기껏해야 수동성으로 귀착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땐 차라리 왈칵 울음이라도 터지면 좀 낫겠는데 감정의 한계는 눈치도 없이 끝없이 연장되고 유예된다. 그럴 땐 차라리 이 연주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지중해의 어느 왕국에 도착하는 꿈이라도 꾸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이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스르르 잠이 올 때가 많다. 지루한 연주를 듣다가 졸게 되는 불쾌한 경험이 아니라 지중해의 상쾌한 바람을 흠뻑 맞은 것 마냥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특별한 여행 같은 경험이다. 잠시라도 현실의 번잡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면 이 앨범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비록 한 시간 남짓 꿈결 속 여행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