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19 수주문학제 수주콜리키움 (대담한 대담)  ‘수주의 삶과 문학속으로’ 토론 글입니다.

  1. 들어가는 말

주지하다시피 수주 변영로(1898~1961)는 1920년대 초 『폐허』와 『장미촌』,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서 한국의 초기 현대시를 완성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명정사십년』과 『수주수상록』등의 수필집을 통해 한국의 현대수필을 발전시킨 작가이기도 하다.

또한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하여 훗날 대한공론사 이사장에 취임, 영문일간지 『Korean Republic』주재, 발간하며 영시(번역 및 창작)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평론과 외국문학 번역 그리고 영문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남다른 족적을 남겼다.

이 글에서는 수주 변영로가 1930년 3월 5일 창간한 『시문학』지의 참여 배경과 시문학파 동인들과의 교류 관계를 문학 외적인 부분까지 확장해 관계성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1920~1930년대를 중심으로 그의 문학 내․외적 활동상을 살펴 위당 정인보와 영랑 김윤식, 연포 이하윤, 정지용, 김현구 등 시문학파 동인과의 관계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 수주 변영로와 시문학파

시문학파는 1930년대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주도했던 시인들을 일컫는다. 그 핵심인물은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 정지용이며 여기에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의 참여로 창간호가 발간되었고, 뒤이어 수주 변영로·김현구가 제2호에, 신석정·허 보가 제3호에 동참하였다.

『시문학』은 1930년 3월 5일 창간하여 그해 5월 20일 제2호, 1931년 10월 10일 제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풍미했던 카프문학과 감각적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은 채 우리나라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수주 변영로는 1929년 12월 시문학파 창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시문학』 2 창간호(1930.3.5)에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시문학』 2호(1930.5.20)에 시 「고흔 산길」을 발표하면서 합류했다. 용아 박용철이 쓴 『시문학』 창간호 편집 후기와 아래의 사진에서 수주 변영로가 시문학파 창립 동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929년 12월 시문학파 창립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영랑 김윤식, 위당 정인보, 수주 변영로. 뒷줄 왼쪽부터 연포 이하윤, 용아 박용철, 정지용.

용아 박용철은 『시문학』창간호(1930. 3. 5) 편집 후기를 통해 수주 변영로의 시를 게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유감을 다음과 같이 표했다.

우리는 詩(시)를 살로 색이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詩(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매침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詩(시)는 지나는 거름에 슬적 읽어치워지기를 바라지 못하고 우리의 詩(시)는 열 번 스무 번 되씹어 읽고 외여지기를 바랄 뿐, 가슴에 늣김이 잇을 때 절로 읇허 나오고 읇흐면 늣김이 이러나야만한다. 한 말로 우리의 詩(시)는 외여지기를 求(구)한다.

이것이 오즉 하나 우리의 傲慢(오만)한 宣言(선언)이다. 사람은 生活(생활)이 다르면 감정이 갓지 안코 敎養(교양)이 갓지 안으면, 感受(감수)의 限界(한계)가 따라 다르다. 우리의 詩(시)를 알고 늣겨줄 만흔 사람이 우리 가운대 잇슴을 미더 주저하지 안는 우리는 우리의 조선말로 쓰인 詩(시)가 조선사람 전부를 讀者(독자)로 삼지 못한다고 어리석게 불평을 말하려 하지도 안는다.

이것이 우리의 自限界(자한계)를 아는 謙遜(겸손)이다. 한 민족이 言語(언어)가 발달의 어느 정도에 이르면 國語(국어)로서의 존재에 만족하지 안이하고 文學(문학)의 형태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文學(문학)의 成立(성립)은 그 민족의 言語(언어)를 完成(완성)식히는 길이다.

우리는 조금도 바시대지 안이하고 늘진한 거름을 뚜벅거러 나가려 한다. 虛勢(허세)를 펴서 우리의 存在(존재)를 인정바드려하지 안니하고 儼然(엄연)한 存在(존재)로써 우리의 存在(존재)를 戰取(전취)하려 한다.

임의 一家(일가)의 品格(품격)을 이루어 가지고도 또 이루엇슴으로 作品(작품)의 發表(발표)를 꺼리는 詩人(시인)이 어덴지 여러분이 잇슬듯십다. 우리의 同人(동인) 가운대도 자기의 詩(시)를 처음 印刷(인쇄)에 부치는 二三人(2~3인)이 잇다. 우리는 모든 謙虛(겸허)를 準備(준비)하야 새로운 同人(동인)들을 마지하려한다.

第 1號(제1호)는 編輯(편집)에 急(급)한 탓으로 硏究紹介(연구소개)가 업시되엿다. 압흐로는 詩論(시론), 時調(시조), 外國詩人(외국시인)의 紹介(소개) 等(등)에도 있는 잇는 힘을 다하려 한다. 더욱이 여러 가지 어긋짐으로 樹州(수주)() 를 못시름은 遺憾(유감)이나 次號(차호)를 기약한다.

本誌(본지)는 一, 三, 五, 七, 九, 十一月의 隔月刊行(격월간행)으로 할 作定(작정)이다. 여려 가지 形便(형편)도 잇거니와 詩(시)의 雜誌(잡지)로는 당연한 일일듯십다. 이번 號(호)는 엇저는수업시 三月(3월)에 나가게 되엿스나 第二號(제2호)는 四月初(4월초)에(原稿締切 三月二十五日<원고체절 3월25일>) 第三號는 五月初에(原稿締切 四月三十日<원고체절 4월30일>) 내여서 맞춰나갈예정이다. 編輯(편집)에 주문이 잇스시는이는 거침업시….(龍兒)

수주 변영로의 참여로 1930년 5월 20일 발행된『시문학』2호에는 창작 시 25편 수록되어 있는데, 김영랑 9편, 박용철 4편, 정지용 7편, 변영로 1편, 김현구의 시 4편이다. 그리고 번역시 18편은 정인보 2편, 정지용 2편, 이하윤 3편, 박용철 11편으로 외국 시집에 발표된 시를 번역한 작품들이다.

  1. 사제지간 변영로와 김영랑

수주 변영로는 영랑 김윤식과 사제의 인연으로 시문학파에 참여했다. 변영로는 1898년 5월 9일(음력) 서울 맹현(현재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나 1904년 서울 재동보통학교와 계동보통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0년 중앙학교(중앙고보 전신)를 거쳐 1915년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졸업하고 곧바로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이 시기에 1903년 1월 16일(양력)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영랑 김윤식은 1915년 강진보통학교(현재 강진중앙초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상경하여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 변영로에게 영어를 배웠다. 변영로와 김영랑은 이곳에서 영어교사와 학생, 즉 스승과 제자 관계로 만난 것이다. 이런 인연은 훗날 시문학 창립 동인으로 자연스럽게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스승 변영로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김영랑은 1920년 9월 동경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 인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평생 문우(文友)였던 용아 박용철을 만난 것도 이 때다.

그리고 변영로와 김영랑은 일제 강점기의 삶과 작품에서도 공통점이 발견된다. 변영로의 시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 전까지로 민족 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로 대표작이 바로 「논개」이다. 2기는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서 오는 절망감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로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실제」와 「사벽송」이라고 할 수 있다. 3기는 광복 후에서 사망할 때까지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시를 주로 썼다.

이런 모습 속에서 변영로를 가장 변영로답게 한 것은 당연히 민족시인의 행보다. 조선의 독립선언을 알리기 위해 기미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신가정』의 주간을 맡으면서 잡지 표지에 손기정의 다리만 게재한 사건, 독립운동 단체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07일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영랑 김윤식의 삶은 어떠했는가. 김영랑 역시 1919년 휘문의숙(현재 휘문고등학교) 3학년 재학시절 기미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자신의 구두 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와 고향 강진에서 독립운동(강진 4․4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8년부터 1940년에 발표된 중기 시를 보면 현실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시작을 통해 거둔 성과는 당대의 그 어떤 저항 시나 프롤레타리아의 시가 그 소재나 내용을 통해 거둔 그것보다 더 민족적이며 저항적이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변영로와 김영랑 두 사람에게서 교집합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김영랑은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단발령 거부는 물론 「독을 차고」를 비롯한 「거문고」, 「춘향」 등 항일 저항시를 썼다. 이에 정부는 2008년 금관문화훈장에 이어 2018년 3․1 기미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영랑 김윤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 첫 시집 조선의 마음과 정인보

『조선의 마음』 은 1924년 8월 22일 평문관에서 132면으로 간행된 수주 변영로의 유일한 시집이다. 이 책에는 정인보의 서문과 함께 「버러지도 실타하올 이 몸이」 등 28편의 시와 「남생이」 등 산문 8편을 실었다.

그러나 이 시집은 사상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해 압수되고 말았다. 위당 정인보는 이 시집의 서문에서 변영로를 향해 수주는 나래 업시 발서 구름 사이로 소사서 나붓기는 옷자락이 달 근처의 가벼운 바람을 그리게 된 지 오래다라고 적으며 그의 상상력을 극찬하고 있다. 다음은 정인보가 변영로의 시집 『조선의 마음』 서문에 쓴「수주시집 첫 장에」 일부다.

만나지 않아야 망정이지 만나면 밤과 낮이 어떻게 변하는지 모르고 두 사람의 말이 쉼 없이 글 나라로 쏘대는 것을 보고 내 어린 딸이 수주를 가르쳐 아버지 글벗이라 하기에 수주는 나래 없이 벌써 구름 사이로 솟아나 나부끼는 옷자락이 달 근처의 가벼운 바람을 그리게 된 지 오래라.

내 그의 얼굴도 자세히 보지 못하거든 어찌 그를 내 벗이라 하려고 어린 딸이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건만 나는 알만 한 사람하고 수작하듯이 말하였다.

세상 사람이 나 같기야 하려만은 내가 채 못 보았는지 수주만한 높고 아름다운 재질을 여럿을 곱기는 어렵다 하겠는데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는 하늘이 재주를 준 사람이다. 그의 걸음이 월궁에 들면 그의 나머지 빛이 우리에게 널리 영광이 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건만 시운이 그를 저희할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 그에게 관련함이 심하여 가까울 듯이 멀은 형용할 수 없는 청절한 경치를 바라보면서 중간에서 방황하게 하는 이때야말로 참 야속하다고 흔히 남더러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항상 동정을 바람이 아니요 어린 딸에게 조예 말함과 같이 속에 있기 때문에 헤아리지 않고 발한 것이다.

이제 새로 박는 시집 첫 장에서 서문을 지으려고 붓을 잡으니까 또 이 말이 앞을 쓰니 나는 헤아리지 않고 바람이나 혹 천하의 보배를 천하를 위해 아끼는 이가 있을진대 여기서 심절한 느낌이 있을 줄 안다.

이 시집은 어려 군데 게재되었던 것을 모은 것인데 수주로는 거의 다간 지경이 아니니 달 근처의 가벼운 바람이 항아의 옷 향기와 어찌 분간이 없으랴. 그러나 이 가벼운 바람이나마 뉘 옷자락이 능히 여기 날릴까를 생각하면 자연 그의 방황하는 지경을 상상할 수 있으며, 그의 방황하는 걸음이 이미 허공을 밟음을 보면 월궁을 들어갈 자신이 있음을 믿을 수 있다. … (중략) …

<정인보의 수주시집 첫 장에일부>

 

이 책은 1920년대 민족주의 문학파를 대변하는 시집의 하나로서 1920년대 초 유미주의적 경향이나 1920년대 중반 이후의 계급주의적 경향에 대립하여 민족의식의 확립이라는 뚜렷한 경향을 드러낸 시집이다. 또한, 한용운·김소월·이상화 등의 시들과 같이님을 노래한 일련의 작품 계열을 형성하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후 수주 변영로와 위당 정인보는 1927년 1월 계명 구락부의 『조선어 사전』 발간 작업에 참여하면서 관계는 더욱 깊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박승빈을 중심으로 조직된 계명 구락부는 황족의 이강 및 사회 명사 몇 사람으로부터 원조금을 받아 최남선, 정인보, 변영로, 임규, 양건식, 이윤재 등이 집필자로 참여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4년 경 『조선어 사전』 의 발간 작업은 중지되었다.

  1. 성균관대 교수 시절의 변영로와 이하윤

수주 변영로와 연포 이하윤(1906~1974)의 관계는 시문학파 동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동료 교수로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변영로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해 1955년선성모욕사건으로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이 시기에 연포 이하윤은 변영로보다 한 해 늦은 1947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해 1949년 서울대학교로 이직할 때까지 3년간 직장 동료로서 돈독한 관계로 지냈다. 그리고 변영로는 이하윤과 함께 1948년 동방문화사에서 『영시선집』 을 출간, 그해 변영로가 제1회 서울시문화상(문학부문)을 받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연포 이하윤

훗날 두 사람은 문인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영문학자로서 우리 문단에 외국문학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여 문예지에 소개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 부천과 정지용, 그리고 김현구 후손

수주 변영로의 숨결이 깃든 부천은 시문학파 동인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정지용은 1944년 늦가을부터 3년간 머물다 다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 산 11번지로 이사할 때까지 바로 이곳 소사읍에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했다.

당시의 지명은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이고, 정지용의 집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기찻길 옆길이었다. 현재 그곳의 주소는 경인로 316번길(부천시 소사본동 89-14)이다. 상가건물이 들어선 그곳 벽면에 1993년 복사골문학회가 만든 작은 표지석이 붙어있어 정지용 시인의 집터였음을 기억해준다.

그리고 부천 최초의 성당인 소사성당은 정지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사성당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소유의 소사별장이었고,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방치된 것을 정지용이 미군정청을 설득하여 본 모습을 찾게 됐다.

이후 소사성당은 1950년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미군정청의 지원으로 1955년 재건되었다. 1960년 10월 부천시 원미로 12에 새로운 건물을 지으면서 옮겨가게 되었고 옛 소사성당은 성가요양원의 부속 건물로 남아 있다가 2016년 성가요양원의 재건축 과정에서 헐리고 말았다. 정지용에게 있어서 부천 소사리의 3년은 일제 강점기에 시를 버리고 무위 칩거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마지막 저항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와 함께 1930년 5월 20일 발간한 『시문학』2호에 변영로와 함께 문단에 나온 김영랑과 쌍벽을 이루었던 전남 강진 출신 김현구의 후손(차남 김문배 시인)이 현재 부천 원미동에 거주하고 있다. 변영로와 김현구가 시문학파라는 문학적 인연에서 시작해 후일 김현구의 후손이 부천에서 거주하고 있으니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1. 나가는 말

지금까지 수주 변영로의 삶과 문학적 텍스트를 중심으로 시문학파 동인들과의 관계성을 찾아보았다. 변영로는 1930년 3월『시문학』이 창간하기 전 이미 1924년 8월 발간한 첫 시집『조선의 마음』서문을 위당 정인보에게 받았다는 것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그 보다 훨씬 앞섰을 것으로 보인다. 정인보는 변영로의 첫 시집 서문에수주는 나래 업시 발서 구름 사이로 소사서 나붓기는 옷자락이 달 근처의 가벼운 바람을 그리게 된 지 오래다라고 적으며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극찬했다. 이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 문인과의 그것보다 더 친밀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변영로와 김영랑의 관계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중앙기독교 청년회학교 영어반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만났다. 훗날 김영랑은 동경 아오야마(靑山)학원 영문과에 입학해 영미문학에 심취하며 문학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변영로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울러 변영로와 이하윤의 관계 역시 시문학파 동인을 넘어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서의 직장 동료, 그리고 1948년 두 사람이 공동으로 출간한 『영시선집』 등에서 그들의 문정(文情)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변영로와 더불어 시문학파 창립 멤버였던 정지용이 1944년 늦가을부터 3년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소사읍 집터가 부천에 남아있고, 정지용의 노력으로 부천 최초의 성당인 소사성당이 해방 후 본 모습을 되찾았다.

이와 함께 1930년 5월 20일 발간한『시문학』2호에 변영로와 함께 문단에 나온 전남 강진 출신 김현구의 차남(김문배 시인)이 현재 부천 원미동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뜻밖의 일은 아닐 것이다.

김 선 기 시문학파기념관장 ․ 文博

2019년 수주문학제 수주 콜로키움 대담집 ‘수주의 삶과 문학속으로’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