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의 천재적 면모야 고명하신 선생님들께서 연구하고 발표하시니 저는 인간 수주에 대해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주의 술 이야기는 그의 수필 <명정 40년에> 구구절절 쓰여 있습니다. 5.6세 되던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 그의 술 기행(奇行)이 일제 강점기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거나, 시를 쓸 수 있는 마중물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수주는 5살 때부터 술을 마시면 술독에 올라가 도주를 했답니다.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은 제처 놓고 유독 어린 수주와 대작을 하셨다네요.

수주의 술 실력을 알아본 게지요. 수주는 15세 때 두 살 연상 아내 이흥순과 결혼하고 3남 2녀를 두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하니 20여 년을 사는 동안 술주정 참아내느라 얼마나 힘드셨을지 백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1934년 아내가 세상을 뜨자 이듬해 이화여전 제자였던 양창희 여사와 결혼해 3남 1녀를 두었습니다. 앞날 창창한 이화여전 출신 젊은 제자가 왜 술꾼 선생과 결혼을 했을까 의문이었는데 그의 글을 보고 알았습니다. 수주선생이 6년 동안 금주를 했는데 그때 양창희 여사와 결혼한 것입니다. 아내는 선생님이 신문에까지 금주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거니 했답니다. 하지만 수주는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나중 연세가 드신 후에야 술을 끊었는데, ‘펠레그라’라는 홍반병에 걸리는 등, 몸이 허락지 않은 것도 있지만 자식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똑 닮아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해대고(제 에미더러 술값을 안 준다고 살림을 때려 부수고, 택시 값 내놓으라고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동네 창피해서 살 수가 없었답니다.) 부모로서 그것도 못 볼 짓이었겠지요. (1956년 주간희망 조경희 기자와의 대담, 명정 50년의 종지부)

아내 양창희 여사 입장에서 본 수주

수주 선생의 아내 양창희 여사가 1955년 <주간 희망>지에 기고한 <나의 주정받이 반세기>를 보면 매일 만취되어 남의 집, 우리 집, 가리지 않고 이불에 오줌을 싸지 않나, 술 취해 개울에 떨어져 팔이 부러지고 머리는 성할 날이 없고, 사기를 당해 집이 경매로 넘어가 길거리로 나앉을 처지가 되기도 하고, 뼈 없는 글은 안 쓰겠다고 절필하는 바람에 수입이 끊겨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아이들은 영양부족으로 장질부사, 홍역, 복막염에 병마는 그칠 줄 모르는데 수주의 술주정은 늘어만 갔다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어린 아들 둘만 데리고 일 년 동안 집을 나갔겠어요. 가출도 여러 번 했답니다. 그래도 술을 못 끊었어요. 나중에는 별별 짓도 다해봤답니다. 집에서 마시면 덜 마실까 싶어 직접 술도 담가보고, 술이 싫어지는 약도 타보고, 월급을 받으면 술로 탕진하고 빈 봉투만 가져오니 학교에 미리 사정해 월급봉투를 아내가 받으러 가기도 해 봤지만 술을 끊을 수 없었답니다. 원고료를 받으면 만취가 되어 집 가까이에 와 이년아! 하고 소리치면 저녁 밥상에 들러 앉았던 식구들이 전기에 감전된 모양 벌떡 일어나 얼른 밥상을 부엌으로 내놓고, 큰애와 작은 애는 아버지를 부축하러 뛰어나가고, 젖먹이를 안은 아내는 이웃집으로 도망치는 살풍경이 수시로 벌어졌답니다. 세간 사람들은 수주를 주성이니 천재 시인이니 하지만 가족들 눈에는 그저 주정뱅이 남편, 아버지로 밖에 안보였을 겁니다. 오죽하면 YMCA 총무 현동완 씨가 미국서 모자를 세 번이나 선물했는데 모자 테두리 안에 “술 바람아 불지 마라. 시나 읊어라!” 이렇게 적어놓았겠어요. “독자 중에 나와 비슷한 아낙네도 있음 즉 하지만 여자의 일생이 이래서야 도시락 싸 가지고 다니면서 결혼을 말리겠다.”는 양창희 여사의 말씀이 한참 후배 독자인 내게 너무도 절절히 다가옵니다. 요즘 같으면 당장 이혼 감이지만 그 시절이니 모든 게 용납되었을 겁니다. 남편의 술로 인고의 삶을 살았던 양창희 여사는 92세까지 천수를 다하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부산 피난시절 한 일간지의 좌담회에서 사진 왼쪽부터 소설가 염상섭, 시인 오상순, 소설가 박종화, 시인 변영로

막내아들 변천수 씨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더군요.

‘시 하나만 잘 썼을 뿐 가난뱅이에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자녀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며 늘 만취해 들어오는 아버지를 부축해 방안에 뉘이고 옷을 벗기고 팔다리를 주무르며 얼른 주무시라고 해도 벌떡 일어나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시는 바람에 다시 주무시게 하느라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제일 좋았던 시절은 어머니를 따라 황해도 두메산골로 가서 산 일 년 남짓이다. 그곳에선 교편을 잡은 어머니와 굶주리지 않고 흰쌀밥도 배불리 먹고 도시에서 온 선생님 아들이라 대접도 후했다.’

하지만 수주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도 있었습니다. 첫 부인을 잃고 쓴 시 ‘간 아내에게’ 라든지 둘째 아들이 태어나 쓴 시 ‘축복’을 보면 가족에 대한 기대와 정이 뭉클뭉클 쏟아집니다. 표현은 서툴렀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김동길 선생님은 수주를 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들 술이 그를 망쳤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술이 그를 지탱해 준 것이다. 변씨 가문에 전해지는 곧고 단단하고 야무진 선비정신이 살아있어, 가난했지만 지조 있게 어두운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수주를 제일 좋아하고 따랐던 이용상 시인의 회고록을 보면 ‘일장기 말소사건 등으로 일제가 점점 미쳐 날뛰기 시작하자 수주는 더욱 술과 벗하기 시작하는데 예리한 신경과 일주(逸走)하는 감정을 가진 수주로서는 알코올의 마취력을 빌어서 세사를 망각하고 현실을 도벽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시절 <명정 40년>은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로도 번역되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가장 사랑받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천재는 목욕을 안 한다.>(김은우)

2021년 고강동에 수주 도서관에 수주 문학관을 개설한다고 합니다. 그곳에 수주뿐 만아니라 수주가 있기까지의 숨은 내조 꾼 아내의 이야기도 한쪽에 다소곳이 펼쳐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변천수 자서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허드슨 강으로 흘렀네>

-김광묵 엮음 <나무고을 코스모스의 거룩한 분노>

-민충환 엮 <수주 변영로 시 전집, 수주 수상록>

-구자룡의 <변영로 연구>

 

축복(祝福)

 

그의 제일(第一) 평범(平凡)한 현실(現實)이

우리의 제일 아름다운 꿈보다도

더 곱고, 복(福)스러운 ‘나기 전(前)’ 나라를 버리고,

무엇하러 흙과 연기(煙氣)의 이 세상으로

연(軟)한 그 발을 찢기우러

걸음을 내치었는가?

오, 발가벗은 무산자(無産者)여-

문의(文意) 알 수 없는 난독(難讀)의 페이지여-

‘기쁨과 행복’의 Omega!

‘고통과 오뇌(懊惱)’의 Alpha! 자(字)

 

기쁨의 꽃이든지

설움의 시초(始初)이든지

탄생한 이상(以上)에는 자랄 것이다.

자라라, 쑥쑥 자라라-

뿌리를 땅에, 가지를 별나라에,

오, 나의 어린 나무야,

나의 작은 영웅(英雄)아!

그래서 위대(偉大)하여라,

아범보다도, 할아버지보다도,

증조(曾祖), 고조(高祖), 아니 선대(先代)에 그 누구보다도!

그네들이 쓰다가 마치우지 못한

‘진리(眞理)의 글자’를 피와 땀의 잉크 찍어서

‘영원(永遠)’의 흰 벽(壁)에 또렷또렷이 써라,

 

 

간 아내에게

 

기나긴 20여년 하루같이 살아오다

가는 곳 다른 양 허황히도 나누이니

생신 채 꿈만 같아야 어리둥절합니다.

 

지난날 돌아보니 뉘우침이 반넘언데

슬픔은 일다가도 춤해질 때 있건마는

뉘침은 고집스레도 쳐질 줄만 압니다.

 

철모른 어려부터 만나 지내 그랬던지

남다른 그 무엇을 감감히도 모를러니

오늘엔 이 어인 일로 이렇도록 슬플까.

 

연락도 없이 갖은 추억 자아내어

되붙는 불같이도 와락 이는 그 슬픔이야

쇠 아닌 마음이어니 아니 녹고 어이리.

몸 굳이 가려거던 기억마저 실어가오

애꿎은 몸만은 뿌리치듯 가면서도

무슨 일 젖은 옷같이 기억만은 남기노.

 

뭇 소리 가운데에 괴괴함이 덜어지어

귀만은 시끄러나 마음 홀로 호젓하고나

눈 감고 있던 날 음성 들어볼까 합니다.

 

고요한 불빛이나 감은 눈엔 흔들린다

꿈도 아니지만 생시 또한 채는 아닌

희미한 그 길이나마 걸어보면 어떠료.

<수주 변영로 시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