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끝난 월요일 아침, 선운사 주차장에 내려 선운산으로 오르기 위해 선운산 관광호텔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산 들머리 초입의 숲속에 들어서니 지천으로 핀 꽃무릇이 산객을 반겨준다. 꽃무릇은 잎과 꽃이 나오는 시기가 달라 서로를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相思花)다. 숲속에 유별나게 혼자 핀 한 송이 붉은 꽃이 눈에 띈다. 꽃무릇 지천으로 피어난 붉은 꽃밭도 황홀하겠지만 홀로 피어난 꽃이 더 귀해 보인다.

사찰에 꽃무릇이 많은 이유는 뿌리가 독성이 강해 즙을 내어 단청이나 탱화의 방부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선운사에 동백꽃을 보러 왔다가 막걸리 집 주모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붉은 동백꽃을 본 시인 서정주의 마음이나 붉은 꽃무릇 한송이를 화석처럼 새긴 산객의 마음이나 같다. 그래서 선운산 가을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산행 들머리에서 약 30분 정도 가파른 경사 길을 오르면 능선에 올라서고, 선운산 방향으로 약 10분 정도 편한 산길을 걸으면 마이재가 나온다. 선운사에서 바닷가의 곰소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마이재로부터 정상인 수리봉까지는 오른쪽으로 서해 변산반도가 펼쳐진다. 곰소항과 위도가 산객을 반기며 손짓한다.

시인 서정주도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왔다가 피지 않은 동백꽃을 아쉬워하며 절집 근처 주막에서 막걸리로 마음을 달래지 않았던가. 시인이야 주모 육자배기 가락에 담긴 붉은 꽃을 봤다지만, 추석 밑이라 ‘풍천장어’ 붉은 글씨 도드라진 산자락 식당들 문은 잠겨있는데 어디서 가을 노래 한 번 들어볼까.

이런 저런 잡념을 이고 걷다보니 어느새 선운산 정상 수리봉(339m)이다.

선운산 서쪽으로는 광활한 서해에 면하여 있고 북쪽으로는 곰소만을 건너 변산반도를 바라보고 있다. 계속 능선을 따라 가면 개이빨산으로 분기되는 삼거리가 나온다. 주능선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나 있어 다녀오는데 30분 정도 걸린다. 개이빨산 정상에 오르자 새소리가 어지럽다. 저 열렬한 지저귐은 생의 노래인가. 날아온 길과 날아갈 길을 말함인가. 무릇 정지한 것들은 애착이나 집착이라는 뿌리를 키울 수 밖에.

다시 주능선으로 돌아와 산행을 계속하면 낙조대가 나온다. 낙조대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도솔암 내원궁이 천진암(千仞巖) 절벽 위에 매달려있다.

절은 왜 깊은 산에 숨는가. 수행이란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고독한 여행이다. 몸둥이가 갈기갈기 찢어지더라도 집착의 화살을 뽑아내지 못하는 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것이 선가(禪家)의 결의다.

깊이 없는 아름다움이 있겠는가. 도란, 깨달음이란, 천박한 인생에 깊이를 부여하여 파란을 넘어서는 노하우를 얻는 일이리라. 암자에 은거하며 도를 구하는 선승(禪僧)들. 그들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는 꽃무릇처럼 고독하고 도도하다. 향기로운 꽃을 몸에 두른 듯, 호수처럼 괸 상처를 혀를 핥는 듯. 흔연히 심취하여 차라리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승냥이 우는 후미진 산방에 홀로 머물러서 도를 구한다. 이렇게 구한 도로 중생을 구한다.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선운산은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있어 선운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을 가리킨다. 낙조대에서 소리재로 다시 돌아와 이무기가 뚫었다는 용문굴로 내려선다. 도솔암 서쪽의 암벽 위 내원궁의 40여m 절벽에 조각되어 있는 도솔암 마애석불은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미륵불이다. 마애석불의 배꼽에는 검단(黔丹)스님이 쓴 비결록을 넣었다는 감실이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새 세상을 꿈꾸었던 동학 농민군들은 투박한 이 미륵불을 통해 새 세상을 기원하였으리라.

도솔암에서 선운사까지 ‘국가 명승 54호’로 지정된 3km의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면 자칫 잊고 있던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크거나 작은 돌들이 포개지고 뒤엉킨 계곡으로 물살이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낮지만 고상하고 독창적인 선율이다. 물가에 앉아 물소리에 귀를 헹군다. 머리를 들어 허공을 보니 금이 가듯 잎들 사이로 햇살이 들이쳐 물위로 떨어진다. 숲을 버리고 부도밭 가는 큰 길로 나오니 길가에 꽃무릇이 지천이다. 꽃향기에 취해 몽환 속을 헤매다보니 어느새 산행 날머리인 선운사 천왕문이 반긴다.

절집 앞마당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은은한 향을 흘리며 유혹한다. 만세루 마루 위에 단아하게 놓인 찻잔에 고인 것도 배롱나무 꽃향기겠지. 선운사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대웅보전 뒤쪽 에 있는 3천여 그루 동백나무숲이다. 봄에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모습의 선운사 동백꽃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텅 빈 만세루에서 결의에 찬 스님들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스님들 언설은 시원한 단비다. 부단히 깨어 있어야 할 까닭을 말하는 그들의 음성에 솔깃했던 내 귀는 행복한 귀다. 그러나 돌아서 하산하면 그 뿐, 귀는 다시 벽창호로 돌아간다. 어쩌랴. 내 귀를 찌를 수밖에.

절집을 나오니 군데군데 핀 몇 송이 꽃무릇이 마지막 화려함을 불태우고 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꽃무릇에게 군락보다는 애틋함을 더하는 한두 송이가 더 어울릴 듯싶다.

꽃무릇의 붉음이 사라지는 만큼 서서히 나뭇잎들이 붉게 변하며 선운산 가을은 절정으로 치닫을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