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시비한 행로들을 파괴하며 그들의 도시를 짓밟는구나. 이젠 우리네 삶에서, 진실한 사랑 앞에 알몸을 드러낸 소녀 같은 순결함을 찾아보긴 어렵겠지.”

지방 소도시의 라디오 방송 디제이가 오프닝에 시를 낭송한다. 이어 오프닝 송으로 재즈 한 곡이 흐르고 턴테이블 옆 전화기의 수신 사인이 깜박인다. 디제이가 천천히 수화기를 든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다. 라디오 디제이, 시, 재즈, 턴테이블… 여기까지만 본다면 대충은 영화의 분위기를 감 잡을 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오싹할 만큼 스릴 넘치는 사이코 영화라는 게 반전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재즈광이자 배우이며 감독 크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영화에 재즈를 즐겨 사용한다. 그의 감독 데뷔 영화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71‘)에도 예외 없이 ’Misty’라는 재즈가 영화 전편에 흐른다.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집요하게 Misty를 틀어달라는 편집증 환자 에블린과 그녀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라디오 디제이 데이브. 우연히 만난(에블린에 의해 우연으로 조작된) 두 사람은 그렇고 그런 ‘작업’ 멘트를 주고받은 다음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이후 디제이 데이브는 에블린에게 스토킹과 협박을 당하게 되고 급기야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스토리다.

Misty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에놀 가너가 1954년 작곡한 곡이다. 원래는 피아노 연주곡이었고 제목 또한 ‘Play Misty for Me’이었던 것을 이 영화에 삽입되면서부터 Misty로 바뀌었다고 알려졌다. 특히 1959년 자니 마티스가 불러 히트한 이후 재즈 스탠더드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곡을 특히 좋아한 크린트 이스트우드는 에놀 가너에게 직접 부탁하였고 에놀 가너는 최소한의 사례금만을 받고 흔쾌히 영화 삽입용 버전을 녹음했다.

1954년 당시 에놀 가너는 뉴욕에서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안개가 가득한 창 밖 풍경을 보며 Misty의 멜로디를 떠올렸다. 하지만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악보를 읽거나 쓰는 방법을 몰랐던 에놀 가너는 비행기 안에서 필사적으로 멜로디를 기억하려고 애를 썼고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호텔의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 급하게 구한 녹음기로 멜로디를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유머러스한 탄생 비화이긴 하지만 사실 재즈사적인 면에서 본다면 스릴러 영화인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만큼이나 오싹한 이야기다. 만일 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중간에 잊어버리기라도 했다면?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하다.

재즈 스탠더드로서 워낙 유명한 곡이기에 수많은 연주가 존재하고 또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는지금 이 시각에도 연주되고 있을 것이다. 1955년 에놀 가너의 앨범 ‘Contrast’에 수록된 원곡과 스탄 게츠 등의 보컬 없는 연주도 좋지만 대개는 보컬 버전으로 더 많이 듣게 된다. 아마도 안개에 싸여있는 듯한 사랑의 감정을 묘사한 가사의 아름다움 때문인 듯하다. 보컬 연주로는 자니 마티스, 사라 본, 엘라 피츠제랄드, 줄리 런던의 버전이 유명하다. 특히 1959년 자신의 앨범에 Misty를 수록한 자니 마티스에게는 Misty야말로 인생 곡이라 할 만하다. 발표한 이듬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고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이 밖에 사라 본과 엘라 피츠제랄드 등 역대 재즈 보컬의 버전과 블론디 보컬의 대표 격인 줄리 런던의 허스키한 매력의 목소리로 듣는 것도 좋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속에는 Misty 말고도 명곡이 또 하나 들어 있다. 바로 로버타 플랙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다. 이 노래에 이어 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로버타 플랙은 스타가 되었다.

영화 자체의 히트는 별개로 하더라도 자니 마티스와 로버타 플랙 두 사람을 대 스타로 만들었으니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어떤 면으로든 대단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대학 시절 변두리 음악다방에서 잠깐이나마 디제이 노릇을 했었기에 더더욱 인상 깊은 영화다. 몇몇 장면은 내 지나간 경험과 추억을 경험까지 떠올리게 한다. 가령 오프닝 멘트 때 시를 읽어 주는 것도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고 진부한 진행 형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제법 인기가 많았다. 술집에서의 어느 장면에서는 에블린이 마시던 술이 내 학창 시절 당시 인기 있었던 칵테일 ‘스쿨 드라이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영화 속 디제이 데이브는 전화로 신청곡을 받기도 했지만 내가 디제이였던 당시의 음악다방에서는 오로지 리퀘스트 박스 유리창 구석의 반원형 구멍을 통해 곡목이 적힌 메모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가끔 사랑 고백 비슷한 내용의 쪽지를 받은 적도 있다. 물론, 데이브가 겪은 끔직한 스토킹을 당한 적은 없다. 스토커를 당할 만큼 매력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리 억지를 부리며 우긴다 해도 나한테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없다. 당연한 일 아닌가.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