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있는디 머시

                                                             전 미 란

 

 달그락 딸그락 설거지 소리, 화장실 물소리에서 환청처럼 전화벨 소리를 듣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나는 거의 매일 아버지의 전화 시중을 들어오고 있다.

  “여그 날씨는 오그라들었다야, 거그도 오그라들었지야?”

  “예, 아부지.”

  “오늘은 전국적으로 날씨가 오그라든단다.”

날씨 얘기로 시작해서 특별한 용건도 아니요, 어제가 오늘 같은 소소한 일들을 딸에게 보고하신다. 도라지 껍질 베껴서 말려 분가루처럼 만들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할 말이 궁색해지시면 단골 메뉴처럼 텃밭에 상추, 배추 모양새까지 줄줄이 딸려 나온다.

  아버지께서 술이 얼근하게 취한 날이면 두 세 통화는 덤으로 받는다. 평소에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피해가던 어머니얘기로 흘러들어 가면 이 통화는 짧아도 삼십 분이라는 예고이다. 자식에게 들려주는 아내 이야기가 술기운으로 상념의 고개를 비틀비틀 넘어간다. 수없이 되감기해서 들어온 외우고도 남을 과거사다. 했던 이야기 또 하게 만드는 소주가 이럴 땐 못마땅하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들어 주는 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루하고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나붓나붓 말 받침을 해 드리다가도 긴 얘기를 차마 자르지 못한 나는 시큰둥한 대답만 이어진다. 내가 들어도 너무 짧아 인색스럽다. 외로움 탓일까. 성의 없는 딸의 음성은 술기운이 무색할 정도로 금방 들키고 만다.

  “어디 나가야 쓰냐?” 아니라는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오늘은 그만 들어가거라잉.” 서둘러 전화를 끊으신다. ‘뚜둑! 뚜- 뚜-’ 그때서야 가슴에서 뭔가 싸한 것이 쓸어내린다. 그런 날이면 집안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취기로 붉어졌을 아버지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맴돈다. 소주처럼 투명하게 전해오는 아버지의 외로움이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못한 이유로 스스로 무너지는 날이 된다.

  오늘도 어제처럼 전화기에 붙들린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 한 손은 전화기를 들고, 한 손은 여기저기 먼지를 소리 나지 않게 문질러 내기도 하고, 책장의 책을 가만가만 옮겨 꽂아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 방향이 틀어지면 아예 책을 펼쳐 보면서 건성으로 통화를 한다. 마치 얼굴은 웃는데 눈은 웃고 있지 않는 모습을 하고서.

   사람의 본성은 아이를 사랑하고 사람의 교양은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처럼 부모자식간의 그리움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부모의 신성한 정에 대한 모독이랄까.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면 불편해진 마음을 이런 저런 구실을 만들어 메워보지만 여전히 씁쓸하다.

 

 

  여러 날 전화가 오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솔밭 아래 누워 계신 어머니를 만난 이후이다. 무덤을 향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애써 동조를 구할 필요도 없고 대답도 소용없는 지금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사이일까.

  나는 얼마 전에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과 지루함을 벗어나 보려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아버지의 투박한 사투리를 소리 나는 대로 받아쓰며 통화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별 다를 것 없는 어제와 오늘을 불러 주고 나는 그대로 받아쓴다. 전화를 끊고 읽어보면 새삼 정겹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버지의 쓸쓸한 채취가 묻어 있다. 세 딸 중 어머니와 많이 닮았다는 나는 아버지께 말벗 이상의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긴 이야기를 견뎌내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나의 보잘 것 없는 애정. 철없는 딸이 수양하듯 받아쓰기하며 전화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면 무슨 생각이 드실까. 아마 아버지는 미안해서 전화하시지 않을 거다.

  많은 얘기를 쏟아낸 탓도 있겠지만 날이 갈수록 통화 중에 부쩍 침묵이 흐른다. 서로 긴 하품을 주고받기도하고 간간이 마당에 개 짖는 소리도 끼여 든다. 그 공백이 ‘끊고 싶다’는 무언의 압력이 될까 봐 나는 뜬금없이

“아부지, 심심하지라우~”하고 어르듯 말을 건넨다.

“니가 있는디 머시….”

 

<조관제 작 – 마음의 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