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는 다행히 재즈에 의해서 멈추게 된다. 로캉탱이 그토록 재즈를 듣는 이유다. 그에게는 재즈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이제 생각났다. 얼마 전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들쩍지근하고 메슥거리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불쾌하던지! 그것은 그 조약돌 때문이었다. 틀림없다. 그 불쾌함은 조약돌에서 내손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 그거다, 바로 그거야. 손안에서 느끼는 어떠한 구토증.” (구토, 장 폴 사르트르, 동서문화사 27~28p)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다에 조약돌을 던지며 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을 흉내 내어 돌을 집었지만 이유 없이 구토가 나오는 바람에 돌을 떨어드리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로캉탱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후 로캉탱의 구토는 수시로 찾아온다. 컵에 담긴 맥주를 보고, 멜빵에 의해 주름진 카페 직원의 셔츠를 보고도 구토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도 심한 구토를 느껴 공원으로 달려간다. 벤치에 앉아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를 보고 사색을 하던 중 드디어 원인 모를 구토의 정체를 알아낸다. 구토가 주는 의미란 바로 소설의 작가 사르트르의 철학적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개념, 즉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가령 의자는 사람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로서의 본질로 존재하기 전에 이미 물건 그 자체로서 실존한다는 의미 같은 것이다.

즉 로캉탱은 마로니에 나무가 굳이 자신이 마로니에라는 사실(본질)을 내세우기에 앞서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챈 것이다. 결국 인간 또한 어느 누구든 고유한 의미 따위로서가 아니라 그저 이 세계에 내 던져진 피투성(被投性)으로 실존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유로이 의미를 만들어가는 개별적, 주체적 존재라는 의미다. 이러한 자유로움에는 필연적으로 책임과 불안이 따른다. 로캉탱의 구토는 바로 실존함으로서 가지게 되는 자유와 이에 따른 현실 세계에 대한 불안 사이의 괴리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세계에 대한 책임과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인간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르트르는 그것이 이른바 현실참여라 일컫는 앙가주망(Engagement)이라고 말한다. 앙가주망이란 자유를 억압하는 온갖 현실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 자신의 자유를 옭아매는 세계의 현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책임성을 부여하는 ‘현실참여’였다면 로캉탱의 앙가주망은 재즈를 들으며 글을 쓰는 일이다.

재즈는 어떤 면에서 17세기 합리주의와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친 근대 유럽의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와 그로 인한 오만에 의해 단초가 제공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재즈의 기원이 식민지 미대륙에 강제로 정착하게 된 흑인들의 음악이 그 뿌리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건 제국주의 유럽의 식민지를 향한 탐욕으로 생긴 재즈가 오히려 거꾸로 유럽인을 구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재즈에는 본질을 뛰어넘는 확장성, 해석의 주체성, 유연한 즉흥성이 있다. 개별 연주가 각각의 실존으로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로캉탱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다. 자기 존재와 세계의 부조리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도저히 메울 수 없었던 로캉탱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구토밖에 없다. 그러나 구토는 다행히 재즈에 의해서 멈추게 된다. 로캉탱이 그토록 재즈를 듣는 이유다. 그에게는 재즈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카페 여직원이 뭘 드시겠냐는 물음에 구토를 느낀 로캉탱은 ‘Some of these days’를 틀어달라고 부탁한다.

가사 ‘Some of these days, You’ll miss me honey‘는 ‘머지않아 그대는 날 그리워하리 내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말대로라면 ‘그대’가 외로워지는 건 결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어서가 아니다. 외로움은 단지 사랑하는 대상의 존재 부재로 생기는 부정적 의미뿐만 아니라 오히려 홀로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대가이자 책임일 수도 있다. 거기에서 비롯된 불안은 부차적이며 단지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일 뿐이다. 어쨌든 재즈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구토감은 사라지고 로캉탱은 다시 활기와 행복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Some of these days를 어느 유대인 뉴요커가 작곡했고 흑인 여자가 노래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재즈 비평가 미셸 콩테에 따르면 유대인이 아닌 아프리카계 미국인 셸튼 브룩스가 작곡했으며 흑인 여자가 아닌 백인 여자가 불렀다고 한다. (‘건반 위의 철학자’ 재인용) 사르트르의 단순한 착각인지, 혹은 고의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서술한 건지 사르트르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다. 사르트르가 당시에 들었던 Some of these days가 수록된 앨범 역시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아쉽지만 대신 즐겨 듣는 건 사르트르가 묘사했듯 허스키한 흑인 여자 목소리가 매력적인 Ethel Waters의 1927년 녹음 버전이다. 아니, 어쩌면 이 목소리야말로 사르트르가 들었던 바로 그 Some of these days일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우면서도 즐거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