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숲길을 따라가면 화암사가 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금강산 화암사는 주소는 강원도 고성이지만 위치적으로는 강원도 속초시에 접근되어 있고, 대명 델피노콘도 가까이 있는 전통 사찰이다.

금강산 자락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흔치 않은 체험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가벼운 흥분마저 느낀다. 화암사 숲길 트레킹을 통해 금강산 최남단의 속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화암사는 신라 혜공왕(서기 769년)때 창건된 사찰로 창건 이후 잦은 화재로 설법전 1동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무명사찰이었으나 1991년 제17회 세계잼버리대회가 근처 학사평에서 열리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한다.

혹자는 화암사를 일컬어 ‘몰래 감춰두고 혼자만 보고 싶은 절’이라고 말한다. 그리 크진 않지만 정갈하면서도 고즈넉한 느낌으로 자리한 전각, 그리고 금강산 최남단의 빼어난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남다른 경관 덕분일 것이다. 일주문의 금강산 화암사라는 현판이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암사 숲길 트레킹은 일주문에서 출발하여 수바위, 성인대, 화암사를 거쳐 다시 일주문으로 원점회귀 하는데, 약 8km 거리를 4시간 정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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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트레킹은 화암사 초입의 매점에서 시작된다. 매점 앞에 난 산길을 따라 약 10분 정도 오르면 수바위가 나타난다.

화암사는 백두대간인 신선봉이 주산인데, 원래 사찰 이름은 화엄사(華嚴寺)였다. 신라36대 혜공왕 5년 진표율사가 창건하여 이곳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했는데,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이때 이후 화암사는 지장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지장보살의 가피를 원하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엄사라는 절 이름이 공식적으로 화암사(禾巖寺)로 바뀐 것은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부터이다.

수바위에 올라 설악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울산바위와 달마봉, 화채능선이 아스라이 보인다. 수바위는 화암사 창건자인 진표율사를 비롯한 이 절 스님들이 수도장으로 사용되었다.

벼 이삭 수(穗)가 들어간 수바위(穗岩)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은 항상 시주 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절에 사는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있으니 그 곳을 찾아 끼니때마다 지팡이로 세 번 흔들라고 말했다. 잠에서 깬 스님들은 아침 일찍 수바위로 달려가 꿈에서 노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후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편안하게 불도에 열중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객승 한 사람이 찾아와 수바위에서 나오는 쌀로 스님들이 걱정 없이 지낸다는 사실을 알고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수바위로 달려가 지팡이를 넣고 수십 번 흔들었다. 그러나 쌀이 나와야 할 구멍에서 엉뚱하게도 피가 나오는 것이었다. 객승의 욕심 탓에 산신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그 후부터 수바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전설 때문에 절 이름도 쌀 화(禾)와 바위 암(巖), 즉 화암사(禾巖寺)로 바뀌게 된다.

수바위에서 내려와 성인대를 향해 숲길로 접어든다. 퍼즐 바위를 지나 성인대 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약 30분 정도 치고 올라야한다. 마치 한 여름 같은 땡볕을 뚫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든 산오름을 계속한다.

성인대와 화암사 삼거리 이정표에서 왼쪽으로 가면 울산바위 최고의 전망대인 약 200m 길이의 너럭바위가 나온다. 성인대는 금강산 신선들이 내려와 놀고 갔다 하여 신선대라고도 불린다. 성인대에 서면 남으로 학사평과 속초 시내, 서로 울산바위, 북으로 신선봉이 다가선다. 대자연의 웅장함 앞에 그저 바라만 봐도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오고 말문이 닫힌다.

너럭바위에 우뚝 선 낙타바위는 그야말로 불법을 외호하는 호법신장과 흡사하다. 너럭바위가 끝나는 곳까지 가면 울산바위를 코앞에서 만나볼 수 있다. 둘레가 4km, 6개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울산바위는 고서에 천후산(天吼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람이 6개의 거대한 암봉을 지나면서 내는 소리가 하늘이 우는 소리로 비유한 것이다.

너럭바위 끝에서 뒤로 몇 걸음만 물러나면 좌로부터 달마봉, 화채능선, 대청, 중청, 울산바위, 미시령이 그려내는 파노라마가 대형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뱀처럼 꾸불꾸불하게 이어지는 미시령 정상의 휴게소는 터널 개통 이후 폐업했다. 잊혀진 길을 보면 잊혀진 사람이 연상되어 산객은 잠시 연민에 젖는다. 미시령과 연결되는 상봉, 신선봉 이들 봉우리는 마산봉을 거쳐 진부령,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이룬다. 화암사의 주봉 신선봉은 금강산 제1봉으로, 남녘 땅에는 금강산 1만 2천봉 중 7개 봉우리가 있다.

이곳 성인대에서 신선봉(1,204m)까지 약 6km의 등로는 천국문이라 불리는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가야하는 난이도가 있는 코스이다. 그러나 신선봉에 오르면 푸른 동해가 발아래로 보이고 맑은 날씨에는 향로봉 너머로 금강산 연봉까지 볼 수 있다.

화암사로 내려서는 숲길은 더운 열기를 식혀주는 평화로운 길이다. 도량을 향해 자분자분 산길을 걷다보면 산오름에 거칠어졌던 호흡이 차분해지고 들떠있던 마음도 평정심을 되찾는다.

이윽고 화암사 경내로 들어선다. 시야가 탁 트이고 햇살 투명한 양명한 곳이니 어찌 암자가 깃들이지 않을까. 절 마당 앞에는 신록 숲을 뚫고 나온 수바위가 온 몸으로 백색을 발하고 있고, 청정한 산죽이 목화처럼 눈꽃을 피우고 있는 대웅전 너머에는 주봉인 신선봉이 절집을 협시하고 있다.

느릿느릿 걷는 것처럼 마음에 충만을 주는 행위도 드물다. 햇볕 따가운 이런 날은 청솔 그늘 길을 걷는 것만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화암사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청솔 바람 소리가 일품이다. 물소리에서 솔내음이 나고 솔바람에 돌돌돌 맑은 물소리가 섞여 있다.

산객 가슴에도 솔내음과 물소리가 켜켜이 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