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6월의 첫날 우리는 전라남도 강진으로 출발했다. 강진에는 시문학파기념관을 비롯하여 영랑생가, 다산초당, 백련사, 무위사, 현구 길 및 현구 생가, 그리고 우리가 하루를 묵었던 달빛한옥마을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는 길인만큼 설레기도 했고, 내가 알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고 새로운 것을 느낄까라는 기대감에 출발 전부터 내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전남 강진에 있는 시문학파기념관은 시문학파 시인들을 기리고 현창하는 전국 유일의 ‘문파문학관’이다. 2012년 3월 5일 82년 전인 1930년 ‘시문학’ 창간일에 맞추어 개관을 했다고 한다. 강진읍 서성리 김영랑 시인의 생가 터 옆이 그 자리다. 시문학파 시인들의 문학정신을 담은 ‘시문학’은 비록 3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간 되지 않았지만, 당시의 척박한 문학 환경 속에서 순수 문학을 뿌리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으니 이 기념관은 문학사적으로도 충실한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시문학파기념관총서④ ‘김현구시인과 서술적 순수성’에서-

시문학파 핵심 인물인 박용철과 김영랑을 비롯하여 여기에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 정지용이 참여하여 ‘시문학’ 창간호를 발간하면서 시문학파라는 이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뒤이어서 김현구, 신석정, 허보가 추가로 참여하여 현대 시문학파의 틀이 완성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물론 시문학의 문학 활동에 동참한 이들만을 ‘시문학파’라 불러야 옳다는 의견도 아직까지 분분하다.

그러한 시문학파기념관 바로 옆에는 ‘영랑생가’가 있었다. 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깊은 산 속에 팔로 안은 듯한 집터는 옛날 우리 시골집을 연상케 했다. 아담한 우물가를 비롯하여 마당,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며 마당에 피어있는 목단은 내가 좋아하고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던 그 꽃이다. 피어서 져 버린 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아름다운 꽃을 뿌리부터 잎, 줄기, 꽃에 이르기까지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청순하면서 우아하기까지 한 그 꽃은 두 송이만 꽃병에 꽂아도 가득 찬다. 그 옛날 영랑이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영랑생가의 뒤를 이어 도착한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다산초당’은 조선 후기의 주택으로 정약용이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을 하던 중 윤구로의 이 초당으로 옮겨 생활하면서 ‘목민심서’를 저술한 곳이다.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우리는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하여 오솔길을 걸어 올라갔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많은 제법 긴 가파른 비탈을 한참 올라가니 주변엔 신기하리만큼 많은 동백나무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작은 나무도 아니고 두 손으로 가득 안아야 안을 수 있는 몇 백 년은 된 나무들이었다. 이른 봄에 꽃이 피는 동백나무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라는데 강진에서 본 동백은 그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백련사 부근에 있는 동백나무는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 15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백련사 앞에 군데군데 자생하고 있는 이곳의 동백나무는 높이가 7m에 달하고 밑에서 가지가 갈라져 관목이 되는 것이 많다고 한다. 특이하게 소나무는 많지 않았다. 동백과 참나무로 둘러싸인 숲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걸어 올라가며 후덥지근한 날씨에 많은 땀을 쏟았지만 올라가는 내내 그 길은 많은 생각들을 하게 했다. 이 길은 옛날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백련사를 왕래할 때 이용하던 길이다. 이곳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과연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물론 그가 편찬한 책이나 시대상을 보았을 때 단편적으로는 유추할 수 있겠으나, 인간 정약용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가 길을 걸으며 무척이나 궁금했다. 무엇보다 그 길은 나에게 많은 생각들을 하게 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에 자리하는 있는 정자 천일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구강포 앞바다의 모습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그 곳에 다산은 틈틈이 올라 먼 바다를 내려다보며 바람을 쐬었고 다시 만나지 못한 형제의 (다산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려 유배를 떠난 형 둘째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에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했다) 모습을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지금은 간척사업 때문에 바다 풍경이 예전처럼 시야가 넓고 시원스럽지 못한 점이 아쉽다며 옛날에 다녀오신 분들은 말했지만, 내 눈에는 그 가려진 풍경도 감동스러울 만큼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옛날 탁 트인 시야에서 바라보던 풍광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항상 옆에 두고 천일각을 지나서 만덕산을 넘어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오르락 내리락했기 때문에 다산 정약용이 지금까지도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탄생시켰는지 말이다.

또한, 강진 땅은 파릇한 차 향기와 함께 다산 정약용을 기억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학문을 연마하며 다산이 즐겼던 유일한 즐거움은 유난히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향기로움을 다기에 담아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호마저 차의 언덕(茶山)이라 칭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던 그였다. 높은 월출산 봉우리가 올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넓은 차밭에서 다산이 차를 사랑한 마음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뭐라 말할 수 없었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시문학파의 발자취를 알고자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다산을 모르는 일반인들이라고 하여도 찾아서 가고 또 가고 싶은 길이었다. 반면에 우리 동네 수주 삼변의 묘소로 가는 길은 어떠한가? 도로 위에 어디가 어딘지 알려주는 교통안내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주변 환경에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수주 삼변의 묘소가 있는 지양산은 부천시와 서울시 양천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숲이 좋은 산책길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지양산 둘레길은 부천시에서 올라가는 사람들과 구로구나 양천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만나는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시민들의 공통된 트래킹 코스이기도하다. 부천시 고강동에서 지양산 둘레길을 올라가는 초입에는, 밀양 변씨 공장공파 선산이 바로 보인다. 아버지 변정성의 묘 아래 밀양 삼변, 또는 부천 삼변으로 불리는 변영만, 변영태, 변영로 형제의 묘가 나란히 있다.

산책길을 올라 삼변의 묘소 주변에 도착했을 때 도무지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부천시민으로서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무척이나 따지고 싶었다. 그래도 부천을 대표하는 훌륭한 인물의 묘소가 있는 곳인데 묘소 주변의 환경을 비롯하여 묘소를 찾아가는 길까지 모든 점들이 정말 힘들고 창피할 만큼 화가 났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강진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걸어갔었던 길과 너무나 많은 비교가 되었다. 수주 변영로의 훌륭함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하는 시민으로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깊은 고민 또한 생겼다. 물론 그의 흔적이 부천시에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천시청 바로 뒤 중앙공원에 있는 논개시비와 심곡천을 복원하여 만든 심곡시민의강 인도교에 시인의 이름을 붙인 것과 2017년에 변영로교 앞에 조성된 작은 ‘봄비정원’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비와 공원을 조성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그의 흔적들을 누구나 쉽게 보고 접해야 하는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천시를 대표하는 훌륭한 사람들을 무관심으로 홀대하지 않고, 시의 입장에서 그리고 시민들의 입장에서 널리 알리고 홍보해야하는 일이 급선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를 아끼고 보존해서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시민 의식 또한 고취시켜야 하겠다.

어느덧 우리 곁에 말없이 다가온 한여름의 무더위를 겪으면서, 6월에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던 만덕산 오솔길의 아름답고 푸르른 자연이 다시금 그리워졌다. 다음에 꼭 시간을 내서 다시 한 번 가볼 계획이다. 녹음이 우거지고 바다가 훤하게 보이는 그 곳에 가서 다산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느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