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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현의 재즈 브루잉 (22) –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 작가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이전에 이미 부커상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였지만 처음 작품으로 접한 건 몇 해 전 다섯 개의 소설을 모아 펴 낸 소설집 <녹턴>을 통해서다. 개인적 관심사인 재즈가 무수히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즈 스탠더드 넘버와 뮤지션들의 이야기를 작품에 삽입한 기법 때문에 솔직히 처음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류쯤으로 생각했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나서부터 비로소 그런 선입견을 버리게 되었고 하루키와는 다른 층위의 작가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마치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별 관심이 없던 사람의 진면목을 어떤 계기로 인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작품집 <녹턴>은 애초에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주는 뉘앙스처럼 조금은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로 생각했다. 예컨대 대표작인 부커상 수상작 ‘남아 있는 나날’ 같은 작품에 비해서 그렇다. 그렇게 생각한 배경에 실패자라는 존재의 무게는 당연히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도 한 몫을 했다. 화자인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그저 그렇고 그런, 결코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목과 부제인 녹턴 혹은 황혼이 주는 의미마냥 결코 맥 빠진 인생만을 그린 것만은 아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지난 생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래서 작가가 직접 희망을 말하지는 않지만 읽는 우리는 결국 미세한 긍정의 울림과 몸부림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는 안도한다. 그 미세한 울림과 몸부림은 실패하여 나락으로 떨어졌던 지난 시간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의 시간들도 모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재즈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작품마다 등장하는 재즈 스탠더드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읽기에 아주 그만이다. 작품 속에서의 재즈는 엄청난 위상이다. 재즈가 중요한 서사적 매개체가 되고 있으니 재즈를 빼버리면 그야말로 별 특징이 없는 밋밋한 작품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작품에 들어있는 재즈에 대해 조금 더 세밀하게 감상해 보는 건 작품 자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가령 첫 번째 작품 ‘크루너’를 읽는 중에 크루너(Crooner)란 단어의 의미처럼 저음으로 노래하는 남성 가수들, 예컨대 프랭크 시나트라, 자니 하트만, 냇 킹 콜 등을 들으면 작품에 좀 더 깊게 몰입할 수 있다.

‘비가 오나 해가 뜨나’에서 레이먼드와 에밀리가 춤추며 들었던 곡 April in Paris는 콕 찍어서 사라 본과 클리포드 브라운이 함께 연주한 곡이라고 나온다. 작품 속에서는 두 사람이 54년에 녹음한 연주로서 러닝 타임이 8분간 이어진다고 묘사되고 있지만 내가 가진 54년 앨범에서는 6분이 조금 넘는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아마도 레이먼드와 에밀리가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으며 춤을 추기 위해서는 좀 더 긴 러닝 타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이다. 어찌 되었든 연주 시간까지 정교하게 계산했을 작가의 섬세함에 감탄하게 된다.

이밖에 네 번째 이야기 ‘녹턴’에서 린디에게 들려주었던 주인공 화자의 색소폰 연주곡 The Nearness Of You는 과연 누구의 연주로 듣는 게 가장 좋을지 궁리하는 따위도 즐거운 일이다. 나는 마이클 브레커가 2007년 팻 메스니와 찰리 헤이든 같은 엄청난 사이드맨들과 함께 발표한 <Nearness Of You : The Ballad Book>에서의 연주도 좋아하고, 브랜포드 마살리스가 팔팔한 20대였던 1988년에 내놓은 앨범 <Trio Jeepy>의 두 번째 트랙 The Nearness Of You도 좋아한다. 특히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연주를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이 대목을 읽으면 주인공과 린디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까지 느껴질 정도로 좋다. 이 작품에서만큼은 특별히 브랜포드 마살리스의 연주가 더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종종 소설 속에 묘사된 어떤 장면에 특별하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재즈를 고르는 작업을 하곤 하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즐거운 취미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녹턴>은 힘들여 수고할 필요가 없어서 더욱 좋다. 작품 속 연주를 한 곡 한 곡 천천히 찾아 들으며 책장을 넘기면 마치 작품 속에 나 자신이 들어가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문학과 재즈의 매력을 동시에 주는 흔치 않으면서도 멋진 작품이다.

경 성현경성현의 재즈 브루잉 (22) – 녹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