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현의 재즈 브루잉 (16) – 재즈의 벨 에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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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우연히 자신이 꿈꾸던 황금시대인 1920년대 파리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자신의 소설을 보여주고,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와 대화를 하며 피카소, 달리와 카페에 앉아 한담을 나누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그곳에서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정작 아드리아나가 생각하는 황금시대는 1880년대 파리, 곧 벨 에포크(Belle Époque)다. 길과 아드리아나는 일치하지 않은 각자의 황금시대를 포기할 수 없어 결국 헤어지게 된다.

아드리아나가 사랑하고 동경했던 벨 에포크란 ‘좋은 시대’라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대혁명 이후 80여 년간에 걸친 정치적 격랑을 치르고 맞이하게 된 파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배경이 되는 시대,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표현하던 화려하고도 선명한 빛이 넘치던 시대다. 가히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이라 할 만 하다.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말한다.

Boulevard des capucines / Jean George Beraud

길의 1920년대, 아드리아나의 1880년대가 그들의 벨 에포크이자 황금시대라면 재즈의 황금시대는 언제일까? 재즈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위대한 재즈 시대(Jazz Age)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증기선 윌리를 타고 미키 마우스가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시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시대다. 라디오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클럽에서 직접 듣지 않고도 재즈를 들을 수 있게 된 시대이기도 하다. 이후 재즈는 1930년대 중반 대공황이라는 암흑기를 극복하고 대규모 빅밴드에 의한 스윙 재즈 시대를 열며 화려하게 꽃이 핀다. 그러나 댄스를 위한 흥겨운 리듬(스윙, swing) 위주의 연주는 의식 있는 흑인 연주자들이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중 몇몇은 정규 연주가 끝난 후에도 남아 궁극적으로 추구하고픈 자신들의 음악을 새벽 늦도록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를 애프터 아워스 (After Hours)라 부른다. 대략 194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이른바 비밥(Bebop)이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비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재즈가 대중지향적인 면을 털어버리고 순수 예술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난해한 코드 진행과 리듬의 사용으로 다소 괴팍하게 들리기까지 한 비밥은 결국 재즈가 소수만이 즐기는 음악으로 전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순수한 예술성과 대중의 관심도는 별개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쿨 재즈(Cool Jazz)다. 감상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던 비밥에 비해 쿨 재즈는 매우 감상적이다. 1940년대 후반 마일즈 데이비스에 의해 창시되었다고는 하나 빌 에반스, 데이브 브루벡, 쳇 베이커, 폴 데스몬드와 같은 백인 연주자들의 주도로 클래식 음악의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 까닭이다.

이와는 별도로 1950년대 중반 비밥에서 좀 더 확장된 개념의 하드밥(Hard Bob)이 탄생한다. 백인 위주의 조용하고 차분한 쿨재즈와는 대척점에 있다고나 할까? 하드밥은 매우 열정적인 흑인적인 정서를 보여준다. 쿨재즈와 하드밥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 이 시기를 ‘모던 재즈’ 시대라 부른다. 1940년대 후반 ~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있는 이 시대야말로 진정한 재즈의 황금시대라 이를 만하다. 비밥에 의해 몰락한 대중적인 지지를 어느 정도 회복했는가 하면 하드밥에 의해 흑인들의 정체성 또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즈가 술과 춤이 필연적이었던 클럽에서 벗어나 클래식과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정식 콘서트홀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야말로 재즈가 가장 화려하고도 아름답게 꽃을 피웠던 황금시대, 벨 에포크라 부르고 싶다. 10년 남짓 짧았던 시기였음에도 재즈가 결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대중과 함께 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앨범 발매 역사적으로도 엄청난 명반들이 대거 쏟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의 길은 1890년대 파리, 즉 벨 에포크에서 머무르려 하는 아드리아나를 설득하며 길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약간 아쉬운 법이에요. 늘 불만스럽죠.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 머무르면 지금이 현재가 되고 그럼 또 다른 과거를 동경하게 될 거예요. 과거에 사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아드리아나는 현재를 버리면서까지 벨 에포크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길은 벨 에포크를 꿈꾸면서도 현재를 버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현재로 돌아온 길이 새로운 연인과 비를 맞으며 파리를 걷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를 암시한다.

이 장면을 대할 때마다 나는 힘을 얻는다. 나의 황금시대 벨 에포크는 반드시 ‘과거에만 존재하거나 과거로부터 소환해야만 존재하게 된다’는 생각을 바꿔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와 앞으로 다가올 미래 또한 나의 벨 에포크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벨 에포크는 언제인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성현 경경성현의 재즈 브루잉 (16) – 재즈의 벨 에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