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희의 작가 산책 – 시인 고형렬의 ‘일편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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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상과 색이 파묻혀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세상은 사진리에서 그 끝까지가 고요, 고요였다.
공룡 청봉이라는 것들이 눈앞에서 잡힐 듯하였다.
후우 세게 입김을 불면 날아가버릴 듯이 작아져서
마치 산은 사진리에서 멀리로 내려다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오후 이후 이때까지 설악이
그처럼 낮아지고 아름다운 적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해가 지고도 한참을 설광 때문에 새벽 같았다.
발간 등불과 후레쉬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던 마을
사진리는 그제서야 사람 사는 마을이 되었다.
아흐레 동안 산이 눈 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날 내다본 동해는
무슨 일인지 물속에 다니는 고기 소리가 날 듯이
맑게 개인 하늘 아래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눈도 한 송이 쌓이지 않고, 그만으로 흐르고 있었다.

-시 ‘사진리 대설’ 중에서-

고형렬 시인은 속초의 시인이었습니다.
1954년 속초에서 태어나 1974년 눈 내리던 날, 강원도 고성의 한 면에서 면서기 생활을 시작했답니다. 꾸준히 시를 쓰다가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면서 시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대청봉 수박밭’ 이라는 첫 시집을 낸 그는 30여 년 전 대진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금강산을 보았습니다. 신 새벽 어로저지선까지 나갔다가 아침 햇살을 받는 금강산의 모습에서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환멸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시’를 쓰고 싶었답니다. 그에게 속초와 그 아래 위의 항구 도시는 삶과 시의 모든 원천이었습니다. 우리가 늘 우울하고 마음 한 쪽이 텅 빈 듯 공허한 것은 그저 ‘인간이니까’ 하는 설익은 감상이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가느다랗게나마 뿌리내릴 수 있는 근원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시인. 양양 남대천에서 치어로 방류된 연어에 심취해 연어에 대한 글 을 쓰고 싶다는 그의 강연을 들으며 언젠가 그가 쓴 연어를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한 성희한성희의 작가 산책 – 시인 고형렬의 ‘일편시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