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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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태풍이 제주도에 상륙한다는 날 친구 몇 명과 여행을 갈 예정이었다. 강원도의 한 휴양림을 예약해 놓은 상태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가족과 지인들은 상상을 초월할 초유의 태풍이 올라오고 있는데 어딜 가느냐며 야단들이었다. 마음에 갈등이 심해지자 여행을 주선한 친구가 결단을 내렸다.

“우리 모험을 한번 해보자. 다들 제정신으로 돌아가기 전에 떠나자.”

강력한 추진력에 허둥허둥 차에 올랐다. 주선한 친구의 말에 의하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바람은 십중팔구 육지로 상륙하면서 약해질 거라는 거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면 오지 않고 아무 대비 없이 무방비 상태일 때 급습하는 것이 자연이라며. “자연도 손자병법을 읽었나 보다” 며 농담을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떠나 온 것을. 쓰나미 같은 태풍이 몰려오면 그 속을 뚫고라도 집에 가겠다는 한 친구의 결연한 의지와 함께, 라디오에서 실시간으로 중계해주는 뉴스를 들어가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금방이라도 휘몰아칠 것 같은 바람은 아직도 제주도 바깥을 서성이는지 강원도 횡성의 하늘은 파랗고 숲은 고요했다. 날씨로 보면 태풍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만찬을 즐기듯 편안하게 숲길을 걸으며 수줍게 핀 야생화에 환호하기도 하고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자신의 얼굴을 셀 카로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평소와 다르게 구름이 동동거리며 빠르게 지나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날씨는 맑고 바람은 잔잔하고 마음은 평온하고… 세상 밖에선 태풍이 온다고 야단들인데 숲 안에 들어앉은 우리는 성찬을 즐기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이 정도의 비쯤이야 하며 각자 가지고 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따뜻한 커피에 와인 한잔을 곁들이며 은은한 가로등 속에 잠겨있는 밤경치를 바라보노라니 집에 있는 가족과 태풍 걱정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50 평생을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족들 위해 살아왔으니 이런 일탈도 필요하다고, 의기투합해서 건배를 외쳤다. 나라 전체가 긴장하며 태풍의 눈만 바라보고 있는 비상시에 과감하게 태풍과 맞서 집을 떠나 온 사람들은 많지 않을 터였다.

식사하러 식당에 내려갔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예약을 취소해서 준비한 식재료가 다 상하게 생겼다며 울상을 지었다. 게다가 남아있던 사람들도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팀은 예약한 대로 다음날 점심까지 챙겨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에는 우산을 쓰고 숲속을 걸었다. 산책로 사이로 핀 구절초와 개망초가 비바람을 견디며 쓰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다. 저런 여린 풀들도 견디는데 이 태풍을 뚫지 못할까!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힘을 보여주자며 ‘파이팅’을 외치고 안내소에서 엽서를 사서 편지를 썼다. 1년 뒤에 배달된다는 내가 나에게 쓰는 편지다.

점심때쯤 되자 장대비가 쏟아지고 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이런 날씨에 올라갈 생각을 하니 불안했지만 한번 해보자는 오기도 생겼다.

태풍이 중부지방을 관통한다는 제일 위험한 시간에 집으로 향했다. 강한 비바람에 차가 휘청거려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차창 밖에는 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비닐하우스와 상가 간판이 날아가 전봇대에 걸려있었다. 돌아오는 내내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고 진땀이 났다.

저기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보인다. 아파트 창문마다 신문지와 테이프가 더덕더덕 붙어있는데 우리 집 창문만 멀끔하게 바람을 맞고 있다. 창문도 주인을 닮아 강심장이다. 1년 뒤 내가 쓴 편지가 도착했다. 단 한 줄 쓰여 있다.

‘태풍 속을 거닐다.’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한 성희태풍 속을 거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