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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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꽃이 질 무렵 당신을 만났습니다. 방학때는 어김없이 당신을 만났으니 다음 만남은 여름이 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키우며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빠르게만 지나는 시간이 왜 그리도 더디 가던지요. 그래도 시간은 돌고 돌아 더위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여름을 맞으며 저는 당신에게 곧장 가지 못하고 낯선 바닷가 마을로 들어가 뜸을 들였습니다. 당신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요. 마을은 고즈넉하고 바다는 잔잔했습니다. 백년도 넘은 해송이 늘어서있는 바닷가를 매일 거닐었습니다. 윤기 나는 동백과 천연림으로 우거진 숲을 지나며 꽃이 피어 화려했을 때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봄에 끝 무렵만 해도 곧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우리사이에 이상기온이 감도는 것을 묻어두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저를 받아주었고 시간이라는 변수는 또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습한 바람과 찝찔한 바닷내음을 맡으며 당신이 더욱 그리웠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은 늘 상큼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노송은 없지만 앞산 봉우리는 항상 푸르고요, 바다만큼 넓은 들판에 서면 바람에 속삭임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정이 넘치던지요. 생각을 하다 더 이상 여기서 꾸물거릴 필요가 없겠다 싶어 길을 나섰습니다.
가는 길 곳곳에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땅이 흥건히 젖어있는 곳도 있고 해가 쨍쨍한 곳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을 만나러 가는 제 마음과 닮아 있었네요. ‘여름 소나기 쇠등을 두고 다르다’는 속담처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마음을 바꿨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것은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그 넓은 가슴으로 포근히 보듬어 주셨지요. 그날부터 제 사랑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신에게서 느끼는 아늑함과 편안함이 좋았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마음을 키워갔습니다. 세상에 오직 당신뿐인 줄 알았던 제가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떠나간 적도 있었지요. 어느 곳도 그 품만큼 따뜻하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반복한 후에야 당신에게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 맑은 탐진강을 지나 고개 너머에 있는 초등학교에 잠시 멈춰 섰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제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입니다. 귀신이 나온다는 학교 옆 공동묘지에서 흙을 파다 운동장에 나르기도 많이 했는데요. 그곳엔 집이 들어서 있고 학교는 노인 요양원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얘기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확인해 보기는 처음입니다. 벼가 피어있는 논길을 지나갑니다. 보자기를 허리에 묶고 친구들과 신나게 내달렸던 길입니다. 아버지 서랍에서 훔친 돈으로 과자를 사 저 길 어디쯤에 숨어 앉아 먹었었지요. 아버지에게 들켜 혼찌검이 나던 일도 당신은 알고 계시지요. 그리고 사장나무가 나오네요. 끝도 없이 높이 올려다보이던 나무를 날다람쥐처럼 오르내리며 놀았었지요. 지난 가을 태풍에 가지 하나가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우람하게 서 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같이 떠오르는 풍경들입니다.
저만치에 당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지난번 서먹함을 깨고 달려가 와락 껴안고 싶었습니다. 헤어져 있는 동안에도 당신 생각 뿐이었습니다. 여름이면 겨울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여름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행복했던지요. 멀지 않은 미래에 함께 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봄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요. 온전히 제 자리라 믿었던 당신 곁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 황망함이라니요. 나서지도 못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만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제 기대와는 달리 새살림을 시작한 당신은 모습도 바뀌고 눈길마저도 낯설어 보였습니다. 당신은 예견이라도 한 듯 오히려 차분해 보이시더군요. 묻어두고 싶었던 불안의 정체가 이런 것이었나 봅니다. 당신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요.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제 잘못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새 사람을 떼어내고 싶었습니다.
진즉 용기 내어 고백 할 것을…… 이제는 늦은 일입니다. 제 얘기에 귀 기울여 줄 사람도 없거니와 당신도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무작정 당신이 좋았다는 어느 시 구절처럼 위태위태 지켜오던 우리의 사랑은 이렇게 끝이 나는가봅니다. 새사람과 함께 하는 당신을 지켜보며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습니다.
제 태를 안고 계신 당신, 이렇게 돌아서 가는 길이 영영 이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엔가 모천(母川)을 떠났다 돌아오는 물고기처럼 그리움에 지쳐 다시 찾아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때까지 부디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제 고향집인 당신.

2013. 8

kdongbek

나는 동백입니다.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꽃말을 가지고 있지요. 자신을 포함한 세상 모든것들에 보내는 고백입니다. 누구든 매일이 꽃피는 날이 되었음 좋겠습니다

강 향숙탯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