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정치가 있던 청탑다방에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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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명주동 뒷골목에서 청탑다방을 만났다.
간판도 맘에 들었고, 강릉 정치 일 번지였다는 점이
더욱 나의 발목을 잡았고, 시선을 모았다.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굳게 닫혀있어서 몹시 아쉬웠다.

커피숍의 역사와 유래를 공부할 때
역사 속 카페들이 의식있는 시민들의
정치, 예술, 문화, 사회의 공론장이 되거나
토론, 담소의 장이었다고 배운 것도 생각이 났다.

청탑다방!
1959년 개점이후 지역의 정,관, 언론계 인사들의
단골집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강릉정치 일 번지를 자랑하였던 곳,
강릉시와 명주군에 시장과 군수가 새로 부임하면
반드시 들러 인사를 했을 정도였고,
국회의원 등 정치권 인사들도 명절에 들려서
시민을 만나 담소를 나누던 곳이었다.
단골손님중에 애국지사 김삼 선생도 있었고,
최각규, 김진선 전 지사 등 강릉을 거쳐간
굵직한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정호돈 전 강릉문화원장도
1989년 강릉부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청탑다방에 들려
부임인사를 했을 정도로
강릉의 주요 인사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곳으로
오랫동안 단 돈 천원으로 커피를 팔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단 돈 천원에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신문을 읽고,
당시의 정치를 담소하였던 것이다.

청탑다방의 대표였던 전영자씨는
단골 손님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집도 너무 낡아서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고 커피숍을 좋아한다.
그 맛과 향에도 반했지만,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체가 좋다.
그리고 또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마신
커피 그 자체가 좋기도 하다.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것이 좋고
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것도 좋다.

커피의 역사에서 커피하우스는
꽤 오랫동안 사회활동과 의사소통의 중심지였으며,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혁명의 근거지였다.

미국 독립혁명의 시발점이 된 보스톤차 사건은
‘그린 드래곤 인 태번 앤드 커피하우스(Green Dragon Inn, Tavern and Coffeehouse)’에서
모의되었고,
미국의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dence)이
최초로 일반 대중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된 곳은
필라델피아의 상인들이 만든
‘머천트 커피하우스(Merchant Coffeehouse)’가
이름을 바꾼 ‘시티 태번(City Tavern)’이었다.
시티 태번은
지금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으로
발전한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의
공동회의장이기도 하였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적인 대화와 마음을 터놓는 교류”를 나눈다는
명목으로 드나든 커피하우스였다.
미국의 독립과 건국은
커피하우스에서 볶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초창기 미국의 커피하우스는
사람들의 의사소통과 토론과 공론이
모이는 장소였다.
커피하우스가 생겨나자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체스와 같은 게임을 즐기고
그날의 뉴스를 논하고 노래하고 춤추기도 했다.

커피하우스가 자연스럽게
교양있는 사람들이 모여
공론의 장을 제공하자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문제에 대한
토론과 함께 통치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커피점은
1554년에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던 시절의
콘스탄티노플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물론 그 전에도 메카나 카이로 등
이슬람 지역 여기저기에
커피하우스는 많이 있었으나
일반인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650년 영국에서 생겼는데
곧 커피하우스는 전염병처럼
나라 전역에 전파되어 없어서는 안될
만남의 장소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영국에 커피하우스가 처음 나타날 때는
고등교육을 받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보이던
부르조아 집단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계층으로
부상하던 때였다.
커피하우스는 주로 부르주아 상인과
지식인들이 서로 만나고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고
곧바로 공개적인 토론으로 이어져
순식간에 각종 경제와 정치 문제로 확대되었다.

1페니만 내고 커피 한잔을 사서
하루 종일 커피하우스에 앉아 남들이 나누는
이와 같은 토론과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교(One penny university)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들은
저마다 단골손님의 유형이 달랐다.
작가들이 즐겨찾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던 반면,
의사, 정치가, 상인, 변호사, 성직자, 무역업자,
뱃사람들이 즐겨찾는 커피하우스가 따로 있었다.

주간지 ‘태틀러(The Tatler)’와 ‘스펙테이터(Spectator)’ 같은
언론지도 모두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당시 태틀러의 편집자였던
리차드 스틸(Richard Steele)은
태틀러의 주소를 주로 과학자들의
정보교환의 장소였던
‘그레시안 커피하우스 (Grecian Coffee House)’로 기재하고
그 곳에서 기사를 쓰고 편집했다고 한다.

특정 고객층이 단골 커피하우스에 모여
자유롭게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게 되자
곧 커피하우스는 우체국 역할도 하게 되었다.
즉 특정 고객들이 출입하는 커피하우스를 기반으로
편지나 신문의 발송과 배달을 조직화한 것이다.

커피하우스에 자루를 걸어놓으면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그 자루에 편지를 넣고,
어느 정도 편지가 모이면 배달하는 시스템이었다.
국가에서도 1683년에
이러한 방식의 우편제도를 도입하였는데
당시 우체국뿐 아니라
커피하우스도 편지를 모으는 장소로 지정했다.
1710년대 파리에는 300여 곳이 넘는 카페에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고
보르도, 낭트, 리옹 마르세유 등
프랑스의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맹이어서
사람들은 뉴스를 입소문으로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파리의 카페에서는
마치 영국의 1페니 대학교처럼
글을 읽지 못하였더라도
신문지면을 가득 채운 뉴스를 들을 수 있었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도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마침내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카페 ‘드 포아(de Foy)’에서
“가자 바스티유”라는 외침과 함께
프랑스혁명의 대서막이 오르게 되었고,
커피하우스는 사회의 대변혁을 이끄는
혁명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커피를 마실 때
맥주나 물처럼 후루룩 마시지 않는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커피하우스의 역할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고 있다.
오늘날의 커피점은
더 이상 사회와 정치활동의 중심이 아니다.

예전의 커피하우스가 네트워크의 장소라면
요즘은 오히려 고립의 장소이기도 한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의 이념을 소통하는 곳에서
단순히 커피라는 상품판매점으로 전락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화장실을 찾거나,
와이파이를 이용하기 위해서
커피숍을 이용하기도 한다.

나는 부천에 청탑다방 하나 있었으면 한다.
시민들이 모여 자신이 사는 도시의 성장을 위하여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이슈문제를 공론화하여
더 좋은 방향을 찾아보기도 하고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 작품과 멋을 만날 수 있는
부천만의 청탑다방,
1년 8개월전 시민공익을 위하여
우리가 만든 공간
시민공익플랫폼 채움이 만들어가고 싶다.

시민들의 속삭임이 살아서 정계를 흔들고, 바로잡고,
도시가 함께 성장하는 꿈틀꿈틀되는
부천의 청탑다방이고 싶다.
오드리와 서블리가 만든
우리 채움이.

(돕는 글 : 채움 단체는 의정모니터링을 하는 시민공익활동 단체이며
시민활동을 위하여 열린 공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음.
운영을 돕고자 자체수익활동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판매하고 공간대관 사업을 하기도 함. )

아무튼 강릉에도 또다른 청탑다방이 다시 문을 열기를 바래본다.

오드리

만화, 저널, 시민, 공익, 진실, 전통시장, 청년, 변화, 노인, 장애인, 커피, 가을, 비, 사람, 그리고 부천~ 을 좋아하는 평범한 부천시민 noahne@cartoonfellow.org

오드리 기자커피와 정치가 있던 청탑다방에 다녀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