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의 한 술 줍쇼 – 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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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역재단협의회 모금위원장 정인조 이사를 만나다

 

 

평소 지역에서 존경받고 있는 정인조 이사장님을 만났다.

어려운 마음과 기대 가득한 마음을 갖고 뵈었는데, 기업리더로서의 카리스마와 인

심 후한 옆집아저씨같은 다정함을 동시에 품고 계셨다.

부천희망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 직을 맞고 계신 정인조 이사장님은

한국지역재단 협의회 모금위원장 겸 이사로 계시면서 부천을 넘어

우리나라 전역에 지역재단을 세우고 선한 힘을 모으고 잘 사용하는데 앞장서고 계신 분이다.

오드리의 한 술 줍쇼는 사람여행이다.

어디한번 정.인.조 사람여행 떠나볼까요?

 

 

 

the 사람

 

 이사장님,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성함은 정.인.조,  그럼 띠는 어떻게 되셔요?

 용띠예요~

 아하~ 그렇군요.  사시는 곳은 요?

 중동 은하마을이요.

 언제부터 사셨어요?

 심곡동 살다가 중동으로 93년인가 이사왔어요.

 네 그리고 이사장님, 교회 다니시죠? 어느 교회 다니셔요?

 처음 부천와서는 기장 부천교회 다녔어요.

기독교 장로회 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에요.

한국 기독교 장로회, 문익환 목사님을 배출한, 문익환 목사님이 교사로 계셨던.

장준하, 문익환 이런 분들이 다 계셨고, 가장 진보적이고

한국 민주화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그런 교단의 교회에 다니고 있어요! (와우~~~~~~)

 

 와우~~ 그렇군요.

옛날에 중동신도시가 처움 세워질 무렵, 은하마을에 작은 교회 하나 있었죠?  혹시 아셔요?

 그런데는 사실 관심없었지. 교회가 워낙 많으니까.

상가에 하나 있다가 지금은 없지 않나?

 네, 거기 상가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제가 서울에 좀 큰 교회 다니다가 부천에 이사와서 그 교회다녔었어요. 참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교단에 대해 좀 아시겠네요?

통합,기장,합동,고신 등…. 그런 전통이랄까~ 그런게 있잖아요.

지금 지평교회는 기장이예요.

 

 네, 교단 알죠. 아~ 지평교회가 기장이군요.

이사장님은 부천에 얼마나 사셨어요?

 하~내가 등본 떼봐야 알겠는데

82년도 가을인지 81년도 가을인지 내가 그걸 기억을 잘 못하겠네

초본을 떼봐야 그걸 알거든. 하하하~

 하하하~~

 인터뷰할 때 초본도 필요해요. 그죠? ㅋㅋ

오래 됬지~어쨌든~ 내 인생의 절반 이상 부천서 산거지.

 

 

 

 

 

 

 

 본인소개를 셀프로~  나는 OO다~라고 한다면요?

 나는 00다?~ 딱 막혔네. (하하하~)

(다시금 진지하게 말씀하시기를)

큰 틀에서는 나는 크리스천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그건 사실은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네 멋지세요. 되게 멋지시네요

 뭐 내일이면 또 다를지 모르겠는데………

 

 

 

the 부천

 

 부천에서 36년을 사셨는데 부천 어때요 살기가?

 이제는 부천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지

 부천을 왜 사랑하셔요?

 결과적으로는 사람을 만나게 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사람 답게 사는 삶!! 그런 걸 고민하는 사람들을 좀 만난거지

제가 인천 살다가 여기 왔거든.

67년도에 군대 마치고 첫 직장이 인천에 대우중공업이었거든요.

그때 총각때 기숙사에 지내면서 인천에서 첫 발 딛고 있다가 80년도에 첫 직장 사표 내고

두 번째 직장으로 입사했는데, 그 회사가 서울 퇴계로에 있었어요

명동 지나서 퇴계로에 있는 그 당시에 호남 00에 다녔는데

그 사이에 결혼도 했고 80년도에 첫 딸이 태어났지.

 

집이 연안부두였는데, 거기서 충무로까지 출퇴근을 하면 편도 2시간 가까이 걸리지.

직장이 인천에 있을 때야 좋았는데 출퇴근이 넘 지치고해서

무조건 동쪽으로 가야 된다, 그걸 ‘동진정책’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정인조의 동진정책’에 따라서 서울방향으로 더 가까이 가려고 알아봤지.

그 ywca 시흥버들연수원 알아요?  거기 연수원에 갈 일이 있었어.

그래서, 부천 남부역에서 내려서 슬슬 걸어가 보았는데,

야~ 너무너무 좋은거야.

극동아파트가 있었는데, 완전 숲속에 있고 “이 아파트가 좋겠다!” 한눈에 반한거지.

연수마치고 전세 알아봐서 바로 이사 왔지요.

어차피 직장 가까운 데로 와야 되니까. 한마디로 코가 끼게 된 거야~ 하하하~

 

돈 조금 더 벌면 오류동으로 가든지, 암튼 서울로 가려고 생각중이었는데

거기서 주저앉았네. 하하하~

하나님이 내게 부천에서 사명을 주셨나 봐.

암튼 내가 서울로 가려다 그렇게 부천에 자리잡은 거 보면

해석하건데 사명이고 또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부천에 자리잡았다 해도 이렇게 정들고 오래 사시게 된데는

특별히 또 무슨 사연이 있을까요?

 

 87년도에 우연하게 동아일보를 구독했는데

동아일보 안 간지에 ymca에서 하는 시민대학이라는 찌라시가 들어있는거야

그래서 야~강사진을 보니 너무너무 좋은거야. 그래서 그걸 신청해서 들었어

 

87년도에 근데 거기서 만난 분들이 지금 부천희망재단 상임이사 김범용씨도 만났고,

박종훈 원장도 거기서 만났고, 오경석 대표도 거기서 만났고

이희병이라는 명성치과 원장도 만났고, ymca의 역사라 할 수 있는 황주석씨

강희대… 그 친구되시는 김관식씨 등 그런 분들을 알게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 된 거예요.

 

87년 민주항쟁 시절에 움텄으니까, 그때 시민대학도 있었고

서울로 못 갔네. 결국.

 

나 고향이 합천인데, 서울간다 서울간다 했었는데 말이야

서울에다 주민세를 한번 못냈네.

 

 부천이 그렇게 인연이 맺어져서

y 활동 오래 했고, y 이사로도 오래 있었고

그 뒤에 강희대 시민상이 만들어지고, 그 뒤에 부천희망재단을 만들고

이런 과정 속에서 있게 된 거에요.

여기저기 꿰어 가지고 지금까지 쉴 수 없게 만드네. 하하하~

 

 

 

 

 

 

the 일

 

 

 부천 얘기하다 보니 일 얘기가 참 많이 나왔는데요

일이 참 궁금해요.

지역재단, 지금 하시는 사업, 교회든…

펼치신 일에 대해 편안하게 말씀해주세요.

 

 지금 가장 비중 있게 현실적으로 부천희망재단이

시민 속으로 들어가고, 진정하게 부천시민들이 믿고 사랑하고

부천시민들의 기부 마인드를 일깨워주고, “기부” 하면 부천희망재단을 찾아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예요.

한마디로 부천 시민 90만의 쌈짓돈부터~ 고액까지

부천희망재단! 여기에 갖다 드리면 이 세상을 맑고 밝게 만드는 기관이다~ 인정받는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1의 현재 과제에요

부천희망재단이 딱 7년이 되었어요

올해 8년째이고, 올해는 1년동안  홍보위주의 캠페인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통계로 보면,

한번이라도 기부한 사람을 세어보니 5,000명이 되어요

올해 10,000명 만들어보아서

부천희망재단을 알고, 금액 상관없이 기부하게 된다면

거의 우리 꿈이 이루어지는 원년이 되지 않겠나 싶어요.

 

그거 외에도 교단 활동, 기장이라 했는데

기장에서 운영하는 한신대학 법인 이사를 하고 있어요.

거기에서 공익활동을 일부 하고 있어요.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들이라서 부천희망재단이랑 같이 잘 되기 바래요.

 

지역재단협의회라고,

한국의 11개 지역재단 합쳐져서 지역재단협의회 가 작년에 정부허가를 얻었어요.

그 지역재단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길 바랍니다.

지역재단이 전국 곳곳에 기초지자체에 설립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여러분과 같은 분이 전국에 막 있을 거 아녜요?

그런 뜻 같은 사람을 모아서 지역재단이 되고,

지역재단 모아서 지역재단협의회가 순수하게 그런 분들과 단체를 서포트 하겠다는 거죠.

 

모금이 잘되면 인건비 지원까지도 해보려고 해요.

지역재단협의회에서 나는 모금 위원장이야.

상당한 금액으로 모금을 해가지고 이것을 어디든지 퍼뜨리고 싶어.

 

 전국 지자체가 243개고 현재 지역재단이 11개예요.

5년 안에 50개, 10년 안에 100개

매년매년 달라진다는걸 실제로 느끼고 있어요.

 

지역재단이 없는 곳에 자원을 발굴해서 그러니까 꿈을 가진 분들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 지역재단을 만들겠다는 프레젠테이션도 할것이고,

그런 관심있는 분들을 만나 후원회도 만들고, 부천희망재단과 같은 지역재단이 창립되기를 바랍니다.

음. 아직 서울에도 없으니, 할 일이 많지요.

 

 

 

 

 실제로 직업적으로 하시는 일은?

 인천서 살다가 충무로로 직장 옮겼잖아요

호남정유로, 지금은 gs칼텍스 이지.

 

2001년도에 나와서 창업을 했어요.

창업을 해서 지금까지 17년 회사를 운영하는건데, 회사가 하는 일은 쉽게 말하면

플랜트(대규모 공장) 정유와 석유화학 회사. 이런쪽에 들어가는 소위 말해서 용역, 검사, 감리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대표이사야, 회사이름은 global21 이고요.

나이가 들어가니까 다음세대한테 물려줘야지 생각이 되요

 

  와~ 이사장님은 전문기업인들에게도 멋진 롤모델이 되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보람된 일이 있다면요?

 참 어째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는데, 이런 기부와 모금 이런 쪽으로 어쩌다보니 하게 됐네.

난 처음에는 이런 사업도 하고 그러니까, 기부만 하고 그걸로 끝내는 것이 내 본연의 의무랄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기부자가 아니고 모금가가 된거지.

그 길이 쉽진 않아요.  실패가 굉장히 큰 자산이 되는 것 같더라고.

어쨌든 나는 지역에서 돈을 좀 모아야해..

캠페인을 해야해.. 누군가는 계속 뛰어야하거든요.

 

 

 

 

 

 

the 인생

 

 내 인생의 3막의 목표야

  1. 직장

2. 회사운영

3. 모금가

 

3가지의 고비가 있었고, 그렇게 구분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

 인생은 OO다 라고 한마디로 말한다면요?

 인생은 [ 이타심을 키워가는 과정 ] 이다.

그러면 어떻겠느냐~~~

 오~~~ 이타심이요?

  원혜영 의원 왈,

가족의 범위를 넓혀가서 이웃에 관심을 갖게 하는 그런 얘길 하시던데

우리 마음속에 이기와 이타가 섞여있는데, 그 중에서 이기심이 없어져서

이타심만 있으면, 예수나 석가 등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되겠지,

우리가 성인 반열로 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보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내는 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것이 안된다고 처음부터 포기해버리면 정말 안되고,

뭔가 닮아가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맞아요. 해보는 거죠~~

 네~ 제가 43살 때 인생목표를 정한 게 있어요

그거 보여드릴까?

 와~~ 네네~

 

 

 가족의 범위를 키워나가라!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야 되거든요.

누구나 한계는 있는데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될 것 인가의 숙제가 남아 있는 거지요.

 

 

정인조 이사장님이 43세에 세운 목표를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성실하고 계획적이고 실천하는 사람, 그리고 이타심을 갖고 있는 사람, 

계획하고 평가하는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존경하지만, 앞으로는 더더더~~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이면서 참 좋은 사람,

정.인.조 이사장님과의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 일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일을 했을까요?

 나의 어릴적 꿈?

이 일이 아니였으면 다른 것 뭘 했을 것 같아요?

하~, 나는 사실 의사가 되려 했어요.

어머니가 내가 어릴 때부터 병을 앓으셨거든.

그당시에는 거의 불치에 가까운 척추결핵이라는 병인데,

허리에서 냄새가 나고, 고름이 계속 몇 십 년 동안 났지.

하루종인 찬 복대에서 피고름이 났어.

 

그때 나는, 내가 크면 우리 엄마부터 고쳐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

근데 막상 의사가 되어야 하는데 의사공부를 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

빨리 돈버는 공대를 갔어. 그래서 엔지니어가 된거죠.

 

엔지니어가 되고 대학 과정속에서도 한 때는 대학을 마치고 신학대학을 갈까 생각했어.

신앙생활을 하는 동료 중에서 신학대 총장이나 교수도 나오고, 그런쪽으로 많이 있었고

그 사람들과 교제를 많이 하면서 나도 한번 대학졸업하고

엔지니어지만 목회의 길로 가면 안될까..  생각했었어.

 

암튼 그래서, 이 길이 아니였다면 의사를 하지 않았겠나

의사로 가다가 목사가 되지 않았을까?

젊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그랬군요. 이사장님은 효자시네요.

효자시면서, 하나님도 잘 믿으시고, 또 지금은 훌륭한 엔지니어시구요.

인생의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가 있다면 뭘까요?

 

 하…

삶이 뭔지 생각하면서 살아라!

존재이유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살아라!

하하하~ 근데, 존재이유와 성찰 그런 걸 찾으며 살면 재미있을까요?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거기론 갈 수 없는데말이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을 좋아해야 하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건 진짜 배부른 돼지의 삶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은 그런 분이 많지만, 워낙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어있으니까

거기서부터 자유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큰사위도 엔지니어예요.

그래서 나는 손주가 인문학쪽으로 꿈을 키웠으면 좋겠는데

부모들은 그렇지 않아요. 어떻게 먹고 사냐….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여전히 내가 엔지니어의 삶을 살다 보니, 손주는 인문학관련으로 갔음 좋겠고 하지.

암튼 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그 일이 즐거운 사람은 행복하겠죠 하하하~

 

 저도 제가 하는 일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요.

그래서 저희 단체 정관에, 핵심가치로

-재미있는가? / 의미있는가? / 지속가능한가?

를 물으며 단체 일을 하도록 넣어놓았어요.

 

 네~ 그게 중요해요.

우리 이거 해서 의미만 있고, 재미만 있다,

재미만 있고 의미만 있다,

그렇지 않도록 성찰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간은 시간 속에 존재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가?에 대한 질문은

수시로 해야 된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달라질 수 있고, 그때는 과감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가야 해요.

체면보다는 잘 체크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세요.

 

 

 네~ 귀한 말씀, 잘 새겨놓을게요.

이사장님, 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기억 1>

내가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학교 때

선배의 소개로 진짜 스승 목사님을 만나게 된 거고,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살게 된 것도 이분의 덕이예요.

어떻게 보면 길잡이고이시고, 나침반이 되어주셨지.

돌아가셨지만.

 

고 3때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가정교사 하면서 내 공부도 해야 하는데,

그때가 가장 민감한 시기였는데 어떻게 잘 넘겼어요.

재수도 안 했고..

그 시기, 내 공부하기도 바쁜 때에 돈 때문에 남의 집 입주해서 학생을 가르치는

나 자신, 내 인생이 답답하다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모든 것이 잘 풀렸지.

 

기억 2>

하나 더 있어요. 어머님이 결혼하고, 외갓집이 바로 만주로 이사를 갔어요.

해방되니까 연결이 끊어졌고, 당시 이산가족찾기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70년대 초 쯤에 우리 어머니하고 아버지 육성녹음을 가지고

방송국을 가서 만주에 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가족을 찾았죠.

방송 탓인지 어쨌는지 만주에서 편지가 왔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던 적이 있어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다 돌아가시고, 외삼촌 외숙모가 다 돌아가신 상태에서

사촌들하고만 연락이 되었지.

편지 왕래 하다가 우리 어머님을 모시고(79세) 만주로 가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한번 했지.

거기 갔다가 북경까지 들러가지고 만리장성 가고, 그때 어머니 기력이 없어서 내가 업고 만리장성을 갔지.

그것도 기억에 남네.

 

 어머니를 업고 만리장성을요?  정말 정말 사랑스럽고 듬직한 효자셨네요.

 어머님이 15살에 시집을 왔는데 외갓집이 한 2년인가 있다가 만주로 가버렸고.

나를 34살에 낳았거든. 그 뒤로 아파서 지내시면서

아프면 항상 하는 말씀이 “죽기 전에 한번만 보고 싶다.” 였거든.

그 소원 한번 들어드리려고 늘 생각했었지.

 

어머니는 늘 “내가 쟤 중학생 때까진 살아야겠다”,

“고등학생 때까진 살아야겠다”

그러셨는데….

동네사람들도

“인천댁이 오늘 밤은 넘기나?” 이런 소리 하는 걸 많이 들었거든. 어렸을때…

 

좋은 약이 나와서 나았어.

울어머니가 환갑 될 때 결혼했는데, 나 결혼하고도 24년을 더 사셨지

 

 아~ 그러셨군요. 감사하네요. 건강은 회복하셨구요?

 그 때는 내 마누라가 약사였거든. 돈만 주면 약은 사지.

시골에 계셨지만 며느리가 잘 공급해줘서 어떻게 보면 84세까지 사신 거지.

 

 어머님 신앙심이 깊으셨나요?

이사장님이 어머님의 신앙심을 영향 받으신건 아닌지요?

 신앙심은 무속 열심히 믿으셨지

그것도 신앙심이야~

때가 되면 손 비는 것도 하고

 

죽는다, 산다 할 때는

우리 집에서 굿을 얼마나 했는가 몰라

용하다는 점쟁이 다 데려와서 또 굿을 하곤 했지.

 

 

냉수 떠 놓고 손 비비며 빌던 한 여인의 간절한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어린 정인조.

치열하게 살면서 신앙과 성실로 바르게 자라서 온 세상에 빛을 비추는 참 어른 정인조.

눈물나게 하는 고생과 난관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세상과 함께한 그 분의 삶은 뭉클한 감동 그 이상의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었다. 

 

 

the 인생

 

 

 현재 이사장님의 행복지수를 점수로 말한다면요?

 한 90점은 되지 않겠나

 

 10점은 왜 모자른 걸까요?

 세상에 대한 걱정, 회사에 대한 걱정, 시집간 딸에 대한 걱정 등등 때문이지요.

우리는 살면서 앞날은 모르잖아요. 그래서 걱정을 하지.

 

살면서 내가 너무너무 행복하다 느낄 때가 한번은 있었어요.

아무 걱정이 없었을 때가 있었어.

하나님이 시기하면 어떡하지 싶을 때가 있었지.

그게 애들이 시집 가기 전,

애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다 건강하고 걱정 없고

여러 여건들이 교회, 회사, 하는 일들이 잘 되었고

잠깐 그런 때가 있었어요.

 

그럴 때도 사람은 약간의 두려움? 그런 게 있더라구.

때로는 무인도 가서 있고싶은 생각도 있지.

 

 무인도요?  와~~ 굉장히 기대되네요.

10년 후 인터뷰 다시 해주세요.

 그래요. 아직도 마음은 청년 같은데. 하하하~

 하하하~ 너무 즐거운 인터뷰였고, 뭐가 뭉클한 감동과 깨달음이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한 장소는 글로벌21이 있고,

정인조 이사장님의 헌금으로 지평교회가 세워진 건물 옥상이었다.

옥상에는 작은 텃밭이 아기자기 있었고 야채보다는 봄꽃이 가득했다. 

차가운 봄바람에 인터뷰 도중 다시 글로벌21 사무실로 옮기기도 했는데

그 곳에서 ‘플랜트’라는 기업전문 용어를 들었다. 신기하고 존경스러웠다.

 

결코 한 사람의 인생이나 업적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던한 노력과 성실!!

정.인.조 라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로 얻은 많은 것들은 세상과 나누기 하는 통 큰 선택!!

그 값진 선택이

그가 믿는 이세상 너머 있을(있다면, 오드리는 믿는) 저세상에서도 부요하고 존귀한 자리로

그를 인도하리라 생각되었다. 

 

 

오드리

만화, 저널, 시민, 공익, 진실, 전통시장, 청년, 변화, 노인, 장애인, 커피, 가을, 비, 사람, 그리고 부천~ 을 좋아하는 평범한 부천시민 noahne@cartoonfello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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