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서 아름다운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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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에서 헝가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영화를 봤다, 헝가리 국경을 넘어 부다페스트로 가는 내내 영화에 몰입돼 차창 밖으로 펼쳐진 멋진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루미 선데이’

부다페스트에 사는 자보는 관능적이며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연인 일로나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어느 날 일로나의 요청으로 안드라스라는 피아니스트가 들어오게 되고 일로나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자보와의 관계를 아는 안드라스는 슬픈 마음으로 글루미 선데이라는 곡을 작곡하고 연주한다. 그 무렵 일로나의 매력에 빠진 독일 청년 한스는 그녀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고 글루미 선데이를 들으며 세체니 다리에서 뛰어내리지만 자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그녀를 사랑하려면 내 생의 전부를 바칠 용기가 필요하다며” 일로나의 마음 반쪽이라도 가지겠다는 자보와 안드라스의 기이한 삼각사랑 줄다리기 속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인 한스가 냉정한 나치장교가 되어 나타난다. 일로나는 유대인인 자보는 구하려고 한스에게 무릎을 꿇지만 자보는 가스실로 들어가고 안드라스는 자살한다. 60년이 지난 후 부와 명성을 쌓은 한스는 생일을 맞아 자보의 레스토랑을 찾고, 옛날을 회상하며 글루미 선데이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죽는다는 저주받을 만큼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 정신이 몽롱했다. 일로나가 부르던 노랫가락이 머리에서 계속 맴돌았다. 점심나절 도착한 부다페스트는 늦가을의 정취를 가득 담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겔레르트 언덕에 올랐다. 두나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부다와 왼쪽 페스트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웅장하고 고풍스런 왕궁과 아름다운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본다.

전통시장에 들렀다. 피아니스트가 나타나기 전 자보와 일로나가 시장을 보던 그 곳. 양배추며 홍당무를 흥정하며 행복해하던 둘의 모습이 노점 곳곳에 잔영으로 남아있다. 피아니스트와 밤을 보내고 나란히 걸어오다 자보와 마주친 곳도 이 시장 어디쯤이었을 게다. 분노 보다는 체념과 연민으로 일로나를 바라보던 자보의 애절한 눈동자가 자꾸 떠올라 얼른 자리를 떴다. 자보와 안드라스, 일로나가 함께 걸었던 프랭클로 거리를 지난다. 내게도 애절하게 사랑하는 남자가 동시에 생긴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순간 황홀하던 상상이 확 깨져버렸다. 거기엔 피곤해 보이는 50대 중년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망과 놀람을 애써 감추며 영웅광장까지 왔다. 영화의 모델이 되었던 레스토랑 ‘군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들렸다는 그곳은 음식 값이 비싸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후식으로 토카이 와인을 마시는데 어디선가 감미롭고 슬픈 음악이 흐른다. ‘글루미 선데이’ 손님들을 위해 식당에서 들려주는 서비스였다. 다시 또 몽롱한 기분이다. 예전에는 금지곡이었다는데 빌리 홀리데이나 사라브라이트만이 리메이크해 부르면서 다시 연주되고 있다. 1930년대 레피 세레위가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고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작곡했는데 곡이 히트 치면서 유럽 곳곳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하자 자살을 방조하는 노래라고 연주를 금지했단다.

우울하고 슬픈 멜로디가 2차 세계대전 후 암울했던 사회 분위기와 어우러져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음악에 취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으로 페스트의 밤거리로 나왔다. 사라진 안드로스를 찾아 일로나가 자전거로 누볐던 두나 강변은 야경을 보려고 몰려든 관광객으로 붐볐다. 세체니 다리 위에 섰다. 19세기 중간 두나강 위에 최초로 세워진 다리. 밤에 불을 밝히는 전구가 사슬처럼 보인다고 세체니(사슬)다리라고 하기도 하고 헝가리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세체니 백작의 이름 따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다리 난간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화려하면서도 쓸쓸하다. 독일인 한스가 뛰어내리고 안드라스가 자살 충동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음악에 홀려 목숨을 던진 곳이기에 슬퍼서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르겠다.

부다페스트는 내게 ‘글루미 선데이’로 각인되었다. 헝가리를 떠나 체코로 이동하는 버스에서도 내내 그 선율이 지워지지 않았다.

 

우울한 일요일/ 내가 흘러 보낸 그림자들과 함께/ 내 마음 모든 것을 끝내려 하네/ 곧 촛불과 기도가 다가올 거야/그러니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기를/ 나는 기쁘게 떠난다네/ 죽음은 꿈이 아니리/ 죽음 안에서 나는 당신에게 소홀하지 않네/ 내 영혼의 마지막 호흡으로 당신을 축복하리……

가을비와 함께한 부다페스트의 여정은 우울한 일요일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한 성희슬퍼서 아름다운 그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