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터지다

No comments

나른한 봄날 오후다.

책도 읽기 싫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 텔레비전 채널만 돌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남편이다. 퇴근시간에 맞춰 여의도로 벚꽃 구경을 오란다. 여의도로 부서를 옮긴 지 10년 넘었지만 꽃구경 오라고 부르는 건 처음이다. 사르르 몰려오던 졸음이 확 달아난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뭔가가 수상하다던데 요즈음 들어서 남편의 행동을 얼른 되짚어 본다. 몇 번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거하고 결혼식장과 상가 집에 다녀온다고 나간 것 외엔 평소와 별다를 게 없다. 회사에서 뭘 잘못 먹었나, 아니면 못 볼 걸 봤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생겼길래 뜬금없이 전화를 다 했을까. 갑작스런 전화에 뒤죽박죽 머리를 굴리면서도 룰루랄라 꽃단장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남편과의 데이트라 입고 나갈 옷도 신경이 쓰였다. 옷장 문을 활짝 열고 남편이 점수를 가장 많이 준 점잖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되도록 오늘은 그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었다. 우리가 단 둘이 데이트라는 걸 해 본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거린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가족 나들이를 다녔던 것 같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라 서울이나 인천 월미도 쪽으로 나가려면 몇 번씩 버스를 바꿔 타야 했다.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안고 한 번 다녀오고 나면 모두 파김치가 되었다.

남편은 이상한 버릇이 있다. 집에서는 아이들보다 더 어린애처럼 하면서 밖에만 나가면 목에 깁스를 한 듯 점잔을 뺀다. 그 통에 밖에서 아이들 돌보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그게 불만인 나는 외출만 하면 투덜거렸고 불평불만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기분 좋게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서로가 소 닭 쳐다보듯 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부모와 함께 외출하는 것을 귀찮아하자 자연스레 우리 부부의 나들이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각자 취미생활을 가지고 자기의 취미에만 충실했다. 어쩌다 단둘이 나갈 기회가 있으면 오히려 그 시간이 어색했다. 우리는 집에서만 친한 부부였다.

50이 넘으면 남성호르몬은 줄어들고 여성호르몬이 많아지면서 남자가 여성화된다더니 언제부턴가 남편이 변하기 시작했다. 물도 혼자 떠 마시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세탁기 단추도 누를 줄 알고, 반찬 그릇을 냉장고에 넣어주기도 한다. 그뿐인가, 스스로 손수건이나 와이셔츠도 가끔 다려 입는다. 무엇보다도 제일 큰 변화는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줄인 것이다. 신혼 초부터 남편의 술버릇은 동네 사람들이 다 알정도로 유명했다. 늦은 밤이건 새벽녘이건 골목 어귀에서부터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이웃들은 단잠을 깨고, 집 앞에서부터 마누라 이름을 불러대는 통에 내 이름은 동네 아이들도 알 정도가 되어 버렸다. ‘술자리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고 술을 마셨을 때 전철역에서 집 사이에 있는 술집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가 남편의 철칙이었다. 그 철칙을 20여 년 동안 꾸준히 지켜오더니 50이 넘으면서 차츰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변화를 보면서 ‘이제 남편도 늙어가는구나’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은 고마우면서도 내 목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한다. 소리통만 커져가는 내게 남편은 주눅이 들어 노래를 불러댄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나는 왜 편안해 질까?”

벚꽃 놀이에 불러준 성의를 생각해서 이제는 내 목소리를 좀 낮추리라 다짐하며 즐겁게 나눌 대화에 부풀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회사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저 멀리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집에서 볼 때보다 훨씬 늠름하고 의젓하다.

“역시 열심히 일한 당신은 멋있습니다.” 한마디 해주려고 별렀던 말이 입안에서만 뱅뱅 돈다. 둘 다 멋쩍게 웃고는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걷다가 버스 안에서 읽었던 동화이야기를 꺼냈다.

「 우리 할아버지는 술 마시고 길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다 자빠져서 이마가 찢어졌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지긋지긋했습니다.」 -유은실의 <할아버지 숙제> 중에서-

“당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손자도 태어나는데 그 아이가 일기장에 이렇게 안 쓰도록 술 좀 그만 마셔욧….”

“큰 맘 먹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줬더니 무슨, 봄바람에 벚꽃 터지는 소리야!”

그렇게 우리는 벚꽃 길을 멀쩡히 걸었다.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한 성희벚꽃 터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