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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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는 조실부모하여 일제 치하에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하셨다. 동생 2명, 누나 1명의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계셨다.

6,25사변이 나고 파죽지세로 내려온 인민군은 예천군 감천면 현내동까지 와서 젊은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의용군으로 잡아갔다. 우리 아버지 콩타작하시다가 영문도 모르고 낙동강 다부동 전투까지 갔다가 후퇴하는 인민군에 의해 강제로 북쪽으로 끌려가시다가 김천 근처서 유엔군에 붙잡혀 반공 포로가 되었다.
유엔군은 누가 남한 사람이고 북한 사람인지 구별이 되지 않으니 포로로 잡히면 논둑에 10명씩 일렬로 세워놓고 M1 소총으로 앞사람 가슴에 대고 쏘면 모두가 죽어서 논둑에 쓰러지면 살아있는 사람이 대강 묻고는 다음 포로를 쏘고 하였다. 아버지 차례가 되었는데 미군이 아버지를 옆으로 빼셨단다 그래서 살아나셨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군 장교가 넌 키도 크고 힘이 세서 총을 많이 들 것 같아서 살려 주셨단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끌려가서 수용소장이 인민군 포로에게 인질로 잡힌 사건, 포로들 간의 폭동 사건 등 역사의 산증인이 되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반공 포로로 풀려나서 집에 오셨지만 금방 국군으로 정식 징집을 받아서 제주도에 가서 훈련을 1주일 받으시고 인제 원통 근처 고지에서 큰 전투를 많이 치르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벌인 전투에서 거의 1달 동안 고지를 뺏고 뺏기고 하였는데 낮엔 적과 아군이 쉬다가 밤만 되면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다 나중엔 배고프고 졸려서 전투를 못 할 정도였다고 하셨다. 오죽하면 이번 전투에 차라리 총 맞아 죽었으면 싶을정도였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를 동안수많은 전우가 전사하였는데도 울 아버진 총알 한 방 맞지 않고 전쟁 끝날 즈음을 맞이했다. 38선 근처에선 인민군과 유엔군의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이제야 집에 가나 했는데 운이 없게도 아버진 전투를 잘하고 부상이 없다고 또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여하여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제대를 하셨다.


조금은 끔찍하여 쓰지 않으려 했는데정확한 역사를 위해 쓰려고 한다. 첨엔 사살하거나 잡은 공비들의 귀를 잘라오면 외박과 휴가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나중에는 서로 외박을 가려고 공비가 아닌 사람의 귀도 잘라오고 하여서 이번엔 확인을 위해 머리를 잘라오라 해서 지리산 근처 주막집에서 작두로 머리를 잘라서 확인을 하였다고 한다. 이 얘긴 아버지와 군대 동기 분들이 막걸리 드시며 하신 말씀을 직접 내가 들은 얘기다. 더 많은  끔찍한 전쟁의 참상이 많지만 이만 쓰려고 한다.

아버지께서 많이 아끼던 미제 칼이 하나 있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있을 때 미군 병사한테 선물 받은 거라 하셨다. 첨엔 큰 칼이었는데 계속 사용하다 보니 이제 닳고 닳아 끝만 조금 남아있다. 우리 집에서 쓰이는 용도가 참 다양했다. 겨울엔 고구마 깎을 때, 봄엔 나물 캘 때, 그리고 젤 안 좋은 추억은 내 머리를 빡빡 깎을 때다. 빨랫비누로 빡빡 문질러서 깎을 땐 무섭기도 하고 진짜 많이 아파서 눈물만 흘리고 꼼짝없이 않아서 머리가 스님같이 될 때까지 기다렸었다.
추억이 많이 남은 그 칼을 아직도 나는 보물같이 보관하고 있다.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다.

sanguram

산을 좋아하는 한국화가

장 대식아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