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심장이 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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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을 가기위해 광화문에서 만났다.

광화문!!

광화문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맞다 촛불이다.

지난 겨울 그 추위를 다 녹이고도 남을만한

국민의 촛불, 그 속에 나도 있었다.

아무일도 안 일어나도 좋을 만큼 웃으며 그 속에 있는 자체가

의미였던 지난 겨울처럼.

구르는 낙엽만 보아도 웃고울던 중학시절

내 손에는 항상 한용운의 시집이 있었다.

그 시집의 제목은 님의 침묵.

첫 장을 넘기면 나오는 시

님의 침묵.

그의 시를 외워서

학교뒷산 가득한 아카시아 내음새 속에서 누워

친구와 속삭이던 읋었던 지나간 세월 속 오월의 향내가

이번 만저봐 어슬렁 성북동 투어 속에

다시 났다.

그래서, 투어라지만

존경하고 따르던 만해 한용운 시인의 거처,

심우장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들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 더 머물러 있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 용 운 –

성북동 투어 덕분에 다시 만난 만해 한용운.

이번 기회에 그의 일생을 살펴보고자 한다.

만해 한용운

그는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 본명은 정옥, 용운은 법명, 만해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14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고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홍성읍 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 동학 농민 운동에 함께하다가 실패 후 설악산 오세암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고향 홍성군으로 되돌아왔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때문에 의병을 탄압하는 일본 임시직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고, 당시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여,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또한,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1919년 3·1 운동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 반을 복역하였다. 한편 그는 자수하기 직전의 민족대표자들 중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었다 한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다.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을 발표한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다시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선임되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인위적으로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 그가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이어 만해는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연설이었다.

한편 조선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오랜만이오. 만해.”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신이 누구요?”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하자 만해는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남선이 전향을 선언하던 날 한용운은 그의 제사상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

그의 사상과 신념은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경의 사상을 인용하여 이를 현대적 자유사상에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만인의 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

심우장

만해 한용운은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성북동 북쪽에는 산이 있어 대부분의 집은 남향인데 비해, 심우장만은 북향이다.

만해 한용운은 조선총독부가 있는 남쪽과 마주치기 싫어 북쪽을 향해 집을 지었던 것이다.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한용운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심우장의 이름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소박한 명상이 가능하다. 마당에는 성북구에서 지정한 아름다운 나무로 소나무와 한용운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으며 한켠에 올래여행(역사문화여행) 스탬프가 있는 우체통이 있다. 만해 한용운은 이 곳 심우장에서 끝내 조죽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한 메모

주차공간은 별도 없으며,

관람시간은 09:00 ~ 18:00까지이며

관람시간내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마음껏 사진도 찍고 앉아 있을 수 있다.

주변 가볼 만한 곳으로는

성곽과 마을이 아름다운 북정마을과 북정미술관 등이 있다.

오드리

만화, 저널, 시민, 공익, 진실, 전통시장, 청년, 변화, 노인, 장애인, 커피, 가을, 비, 사람, 그리고 부천~ 을 좋아하는 평범한 부천시민 noahne@cartoonfellow.org

오드리 기자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에서 심장이 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