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미 블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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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란 산수유가 피었다고 남도 끝자락에서 봄소식이 전해진다. 매섭게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나니 꽃소식이 더 반갑다. 봄볕이 문지방까지 넘어오던 햇살 좋은날, 벼르고 벼르던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얼마나 뒤죽박죽 섞여있었는지 장롱 문을 열자 옷더미가 와르르 쏟아진다. 칼바람과 추위를 막아줬던 털옷과 패딩은 세탁소로 보내고 두꺼운 겨울옷부터 차곡차곡 정리해 구석으로 집어넣고 봄옷을 꺼내 정리한다. 옷장에 걸어놓은 옷들 중에는 유독 블라우스가 많다. 디자인이 단순한 것부터 레이스 달린 것까지 다양한 모양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정작 간택되는 건 별로 없다. 그냥 눈으로 즐기거나 한번 걸치고 거울 앞에서 패션쇼를 하다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나이를 먹으니 헐렁한 티셔츠나 편한 옷에 길들여져 블라우스에 받쳐 입는 여성스러운 옷과는 자꾸만 멀어지고 있다. 언젠가 내 옷장을 들여다본 딸이 기겁을 하며 입지 않는 옷은 버리라고 성화를 댔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옷 하나하나가 내 분신처럼 여겨져서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등짝을 맞아가면서까지 입고 싶었던 지지미 블라우스의 열망이 옷 탐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3학년 봄. 지지미 블라우스 열풍이 불었다. 올록볼록한 ‘지지미’ 란 천으로 만든 블라우스였다. 처음 시작은 우리 반 부잣집 계집애였다. 앞 단추 사이로 오글오글 레이스가 달린 하얀 블라우스에 빨강 멜빵 스커트를 입고 왔다. 거기다 반짝반짝 빛나는 에나멜 구두까지 신은 아이는 공주처럼 예뻐 보였다. 유행은 순식간에 번졌다. 너도나도 지지미블라우스를 입기 시작했다. 차이나 칼라에 레이스가 달리거나 둥근 스텐 칼라에 레이스가 달린, 앞가슴과 소매 끝에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블라우스였다. 한 학급 여자아이들 중 반 이상이 그런 블라우스를 입었다. 블라우스를 입으면 좀 있는 집이라는 은근한 과시도 있었다. 나도 입고 싶어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다. 들일 하는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달라붙기도 하고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협박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화가 난 엄마에게 등짝에 회초리 세례까지 받고 눈물, 콧물 흘리고서야 알았다.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결국 초등학교 내내 엄마가 뜨개질한 스웨터와 목이 주-욱 늘어난 티셔츠만 입고 다녔다.

시간이 흘러 지지미 열풍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 입어보지 못한 블라우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사회에 나와 내 마음대로 옷을 살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블라우스를 보러 다녔다. 그때는 이미 유행이 지나 오글오글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는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비슷한 거라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갈수록 봄이 짧아져 점점 봄옷이 필요 없어진다고 하지만 백화점 매장이나 옷가게 마네킹에 입혀놓은 봄옷들을 보면 마음이 설렌다.

올봄에도 하얀 레이스 블라우스 하나쯤 내 옷장에 살포시 걸릴 것 같은 당연한? 예감이 든다.

hanregina

겉모습과 달리 빈틈 많고 털털한 사람. 17년째 수필을 공부하면서 수필집 '가시연 빅토리아' 겨우 한권 냈다. 10년동안 부천시청 복사골기자로 활동하다가 이제 시민 만화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 주변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카툰으로 표현하고 싶어 '열공' 중이다. hanregina@cartoonfellow.org

한 성희지지미 블라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