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모와 영광의 굴곡끝에 만난 일제강점기 모던 청년의 감성

부천인문路드 정지용 편

 

일제강점기 시를 쓰던 청년이 있다. 아름답고 섬세한 언어로 씌어진 청년의 작품은 그를 한국 대표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렸다. 한국 서정시의 서두를 연 청년은 40대에 막 접어든 1942년 붓을 꺾고 과거 수주라 불렸던 부천에서 그의 종교인 천주교 청년활동에 몰두한다.

이후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가을을 지나면서 그의 행방이 영원히 묘연해졌다. 해방 후 혼란한 시기 조선문학가 연맹에 가입한 연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럼에도 전후 생사가 불명하다는 이유로 월북시인이라는 주홍글씨가 남아버렸다. 그의 이름은 1988년 그의 작품이 해금되고 대표작 향수가 노래로 발표될때까지 제대로 불릴 수 조차 없었다.

바로 정지용 시인이다.

부천 인문로드에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바로 이 정지용 시인이 종교 활동에 몰두한 흔적들을 짚어 나갔다. 안타깝게도 그가 직접 세웠던 성당은 사라졌지만 카톨릭 청년활동을 하며 암울했던 시기에도 ‘한국어’로 된 청년회보를 발행한 그의 흔적은 뚜렷이 남아있다.

1902년 생인 정지용 시인은 대한제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미군정 시기를 거쳐 한국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 절반을 온몸으로 겪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이념으로 나뉘어 싸웠던 시대의 수레바퀴 아래 그의 이름도 함께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한국어로 작품활동이 어려웠을 시기인 1942년 그가 붓을 꺾은 것에 나는 주목했다. 또한, 한국어로 카톨릭 청년회보를 3년간 발행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세례명 방지거-지금은 프란치스코-로 부천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의 머리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었을까? 그토록 고운 시를 써내려 가던 시절 절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제는 그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 해줄 사람이 없어 남겨진 자료의 조각들을 모아 유추할 뿐이다.

<가톨릭청년>에 발표된 정지용의 산문 <소묘 3>의 첫부분

또한 정지용 시인은 이념 갈등으로 존재가 강제로 지워진 예술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존재다. 부천 인문로드 강연에서도 강조했던 것처럼 그는 무엇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소사 성당을 직접 벽돌을 쌓아 올려 지은 그에게 좌익딱지는 이해가 조선문학가연맹에 가입했다는 것말고는 그가 월북했다는 증거 또한 없다. 그의 존재는 대중들에게 접근할 기회를 강압적으로 빼앗긴 수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이유를 극명히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혼란의 시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분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발라드같은 그의 시들을 좀 더 여한없이 누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천 소사동 정지용 집터에는 정부가 아닌 부천 복사골 문학회에서 남긴 표식이 있다. 엉킨 과거사 해결에 아직도 갈길이 먼 한국 문학의 현주소를 내비치는 듯 해 씁쓸함을 남긴다.

<부천>정지용 집터에 남아있는 복사골 문학회의 표식, 부천인문로드 투어 중 정지용 작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카툰캠퍼스 이원영이사

정지용 시인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같은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과 함께 앞으로 남겨진 과제를 바라본다.